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13 12.8%
연중 제15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31
작성일 | 22.07.08
루가 복음 10장  25절-37절

-------------------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에 이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반문하셨고, 율법교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반쯤 죽여 놓고 갔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하였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라는 율법 교사의 말에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 교사는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에서 제물 봉헌 업무를 하는 사람이고,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성전의 여러 가지 잡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과 율법이 중요합니다. 원래 성전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지침 조항들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그들 상상의 산물입니다. 세상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상상하여 만든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모든 일을 주제하고 사람들을 엄하게 벌하면서 군립하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이 성전에 제물을 잘 바치고 율법을 잘 지킬 것을 원합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만 예의주시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사마리아 사람은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성전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강도 맞은 사람을 보고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는 반쯤 죽게 된 이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끝에 율법 교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유대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출애 33,19 참조)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초적 체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이 깨닫도록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성전과 율법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현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우리의 삶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려준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35절).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최선을 다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고린 3,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이고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사제와 레위는 강도 맞은 사람을 버려두고 길을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영은 살립니다. 하느님은 살리십니다. 하느님은 율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의 계획에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비로운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법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영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513 12.8%
[수원] 착한 사마리아 사람 : 그리스도

------------------
제1독서 : 신명기 30,10-14
-------------------
하느님의 법전은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킬 것과 항상 하느님께 나아오고 그분 안에 남아 있으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 그 법은 우리와 항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이 드러남을 말하고 있다. 즉 이웃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법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셨다(요한 12,1-8: 향유를 부은 마리아).

-------------------------------------
루카 10,25-37 :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웃 사랑
-------------------------------------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강조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시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 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여기에 율법학자는 그러면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사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잃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오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생명을 되찾게 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인지를 묵상해 보기로 하자.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지나쳐 갔던 사제와 레위인의 부정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들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율법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일을 맡아 하는 자들로서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피를 만지고 부정을 탄다는 것은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그가 죽었다면, 시체를 대하는 것 자체도 부정을 타기 때문에 성전에서 자기들의 일을 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다는 율법에 매인 형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한 그에게 달려가서 즉시 응급 처치를 하고 끝까지 보살펴 주는 자선을 베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 각자가 강도를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강도일 수도 있고, 사제나, 레위인일 수 있고, 착한 사마리아인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중에서 과연 누구일까?

-----------------------
제2독서 : 골로새서 1,15-20
-----------------------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나왔다가 그분을 통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그러기에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고 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로 평화를 이룩하시었다고 바울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죄로 잃었던 그 형상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한 그 형상을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는 닮아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다면, 인간의 모습도 사랑이어야 할 것이며, 이 사랑으로 우리는 이 모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과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즉 사마리아인과 같은 정신을 삶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랑을 실천하는데 인간적 사고나 기준에 얽매여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척도로 재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영원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든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했으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며, 그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 만물은 새로이 변화되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청하도록 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7.09
513 12.8%
이번 주 주일 복음은 “자비”가 단지 어떤 느낌이나 마음에 와닿는 어떤 깊은 감정 정도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자비는 분명히 이러한 느낌이나 감정에서 시작하지만, 나아가서 어떤 행동이나 실천, 실제 자비를 행하는 동사動詞로 번역되어야만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던 “어떤 율법 교사”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적인 답으로서 “자비를 베푼”, 그리고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서 애덕을 실천하는 “(자비를) 베풀다”, “(자비를) 하다”라는 동사動詞가 바로 “자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명한 복음이고 잘 아는 복음이어서 또 한 번 읽는다는 식이 아니라 처음 읽는 것처럼 신중하고 정확하게 읽어 나가야 한다. 이미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읽었던 복음 내용이므로 그저 그 내용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읽는 정도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품위를 훼손하는 일이 되고 만다. 오늘 우리의 복음은 전혀 새로운 복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고 우리 안에 그 효력을 새롭게 발휘하신다.

1.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루카 10,25-37)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시작하신 대목에 위치한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길’에서 또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루카 10,25) “율법(νομικός, nomikós) 교사”이다. 이스라엘의 토라와 전통에 관한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다. 곧 예수님의 성경 지식이나 전통에 관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ㄴ) 하면서 유다이즘 안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 늘 논란이 되었던 고전적인 물음으로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이라기보다 그 율법 교사 스스로 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하고 반문하신다.

이에 그 전문가는 모든 유다인이 어려서부터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하며 잘 알고 있는 신명기(6장 4-5)의 구절, 소위 ‘쉐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 Shema‘ Jisra’el)’을 인용하고 또 영적인 지성을 발휘하여 레위기(19,18)에서 발췌한 내용을 추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셨다고 기록하는 루카 복음사가에 따를 때, “율법 교사”는 “사랑”에 관한 두 계명 사이의 유사점에 착안하여 멋지게 해석하여 대답한 셈이 된다. 문맥상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가 말하는 “사랑”의 범주를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에게까지 확장하면서 동시에 그가 살아온 과정에서 깨달아 알고 있는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초대하기 위하여 그의 대답을 승인하셨다고 할 수 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드린 질문이 비록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이라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적이며 유일한 질문인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항상 더 나은 삶의 의미에 대하여 굶주림과 갈증을 느낀다. 과연 우리는 영원한 생명, 충만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선물인 놀라운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비결은 무엇일까? 질문하던 율법 교사는 말 그대로 613개에 달하는 율법을 준수하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항 준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이라 하신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하신 대로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여쭈었고, 예수께서는 “살 것”으로 답하신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요 둘째이며 두 가지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이들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이다. 십자가의 세로축이고 가로축일 뿐이다. 시리아의 성 에프렘(306~373년)은 이 두 사랑을 두고 『모든 가르침은 두 날개와 같은 이 두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두 날개로 (인간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되는 것』이라 한다.

2.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5-37)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했던 첫 질문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루카 10,29) 이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루카 10,30ㄱ)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응답하신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그의 질문에 말려 들어가 “이웃”에 대한 정의를 하게 되면 그 율법 교사가 속해 있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범주의 한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웃인가?”하는 질문 역시 우리 인간들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나의 가족과 친지를 비롯하여 내 식대로, 또 우리 식대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선을 그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만이 과연 나의 이웃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그들만이 우리의 이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그은 범주의 감옥에 갇힌 포로들로서 우리 이웃이 아닌 그들을 적대시하고 미워하며 살기 일쑤이다. 유다인들의 입장에서도 자기 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요 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오히려 의무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까지도 전수된다. “이웃”은 우리 각자가 되기로 하는 모든 이이기 때문에 “누구”라고 하는 한정된 범주에 속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비유의 마지막에 또 하나의 질문으로 그 율법 교사를 이끄신다.

“어떤 사람(국적이나 사회적 신분, 종교적 소속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루카 10,30ㄴ-ㄷ) 별로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오늘날 늘 우리 주변 도시에서 대낮에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묻지 마’ 공격을 당하거나 심지어 잡혀가 인신매매에 넘겨지거나 생명을 잃기까지 하는 일 중 하나인 사건이 발생한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돌보는 사제와 이스라엘에서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레위인이라는 두 종교인이 묘사된다. 율법에 정통하였을 그 두 종교인은 하느님의 처소에서 아마도 집으로 향하는 길을 가던 중에 상처 입어 다 죽게 된 그 사람을 보고도 “(멀리) 길 반대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무심하거나 사악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아마도 “정결한 이”(민수 19,11-16)로서 시체에 가까이해서 부정不淨한 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시편 41,2)라는 구절을 늘 읽고 보았으면서도 실제로 읽지 않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나쁜 짓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죄나 형제적인 사랑을 거스르게 되는 행실은 누군가에 대한 증오나 악행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무엇인가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 주님께서 “나에게서 떠나…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않았다.”(마태 25,41-45) 하신다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3. “가엾은 마음이…
이웃이 되어 주었다…그렇게 하여라”(루카 10,25-37)

비유가 이어진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얼굴을 맞대고 자세히 살펴) 보고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엾은 마음(안쓰러운 마음, 연민, 동정심, 자비심)이 들었다.”(루카 10,33) 예수님께서는 사제와 레위인이라는 전형적인 종교인 다음에 놀랍게도 사마리아인을 상정하신다. “정결한 이”라고 하는 완벽한 유다인들에 대조하여 불결하고 이단적이며 분열주의자들로 여겨져 유다인들로부터 항상 온갖 천대를 당하던 사마리아인을 대척점에 놓으신다. 비유라고는 하지만 유다인이 듣기에는 너무하다 싶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자비’는 자식을 안타깝게 보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본능으로 그 누구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마침내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4-35) “사마리아인”은 강도에게서 상처를 입은 이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35절,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꺼내다)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주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돌보다). 비용이 더 들면(비용이 들다) 제가 돌아올(돌아오다)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갚다).’ 하고 말하였다(말하다).”에서 사마리아인의 행위가 7개의 동사로 드러난다. 사마리아인의 처신이 자비의 행위라면 바로 하느님의 동작이요 행동인 셈이다.

강도 만난 이가 유다인이라는 가정에 따라서 사마리아인이 했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율법 준수가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고 믿던 유다인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전혀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역사 안에서 친히 인간이라는 강도를 만나 살해되신 분이실 뿐 아니라,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된 인간과 그 인간의 세상을 찾아오시어 인간에게 다가와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부어 인간이 입은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다시 살려주신 분이시다.

부정不淨한 이요 믿음에서 정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 홀대를 받는 이가 ‘자비를 행하는 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이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율법이나 전통, 그리고 신앙을 떠나 도움이 필요한 이를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이웃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가 봉사하며 보살피는 법을 알고 있는 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에 반해 율법을 잘 알고 그 법을 세세하게 따져 잘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인이나 신앙인들이 있다. 그저 문자로 쓰여 있는 것을 잘 보려고만 할 뿐, 그 쓰여 있는 내용을 제대로 살려고는 하지 않는 이들 말이다. 그들은 대대로 전해지는 것을 알 뿐 그 율법이나 전통이 그렇게 전해진 이유와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율법이나 전통의 존재 이유는 다른 이를 섬기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성당에 매주 꼬박꼬박 나오고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꼼꼼히 읽으면서 기도도 열심히 한다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다른 형제나 자매를 보는 척 마는 척하면서 이방인 취급을 할 수 있는지, 이는 참 신비로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흔한 일임을 우리 모두 안다.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 있는 ‘부정不淨한 이들의 신비’라고나 할까? 놀랄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나 자신이 이웃을 보지는 못하면서도 하느님을 본다고 말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완고한 의인이나 율법주의자, 교만에 사로잡혀 있는 “거짓말쟁이”는 아닌지 자문해야만 한다.(참조. 1요한 4,20) 이런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 공동체나 교회에 속해 소위 ‘열성분자’로 활약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선행이나 이웃 사랑에 걸림돌이 되거나 눈가리개 역할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를 묻고 따져 알거나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힘써서 누군가에게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나의 인생길에 만나는 모든 이 안에 내가 되어 주는 이가 나의 이웃이다. 현대인은 어떤 의미에서‘이웃’이 모두 죽어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웃이 없이 나와 내 가족이라는 굴레만으로 뭉쳐 고립된 인생을 적막하게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sns 같은 것을 통하여 친구도 아니고 이웃도 아닌 이들을 친구이고 이웃인 양, 면대면으로, 손에 손을 직접 잡을 수 없는 이들, 눈을 마주 보고 만나지 못하는 이들을 이웃인 양,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인 양, 그렇게 착각하고 기만하며 살아간다. 현대 생활 안에서 진정한 ‘이웃’을 먼저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더는 살아갈 수가 없다.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 교사에게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하신다. 이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애초에 이웃이 누구인지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했던 비유는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즉 보살핌이 필요한 이를 잘 살펴보고,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그가 필요한 대로 최선을 다해 돌보는 자비를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단락이 끝나는 문장이라면, 두 번째 단락 역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라고 끝난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를 연상시킨다. 시종일관 대가를 셈하지 않는 자비의 실천이 선포된다.

이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두고 내가 가까이하기로, 되기로 한,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다.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물었고, 예수께서는 “하여라”, “살 것이다.”로 대답하신다. 아멘!

------------------------

작성자 : 벤지
2022년 7월 10일
  | 07.09
513 12.8%
사마리아인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사제,
레위인의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루카 10, 36-). 이 비유는 그 첫 대목만 들어도 다 아는 비유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와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오늘은 복음은 샌드위치형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율법학자와 디알로그 즉 대화 사이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비유가 들어가 있는 형국입니다. 오늘 복음의 렉시오디비나는 크게 보면 대화분석이고 비유해설입니다. 대화의 자락에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 ‘사랑의 실천’ 등의 굵직한 주제들이 깔려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와 예수님과 대화라는 큰 틀 안에 하나의 팩트일 수 있는 비유가 들어가 있습니다. 비유는 이웃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료하게 해줍니다.

먼저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이 중대한 질문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교사가 예수님이 과연 율법을 알고 있는지 또 무시하고 거부하는지 확인하며 시험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가 좋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거꾸로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예수님은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물어보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표현하면 "너는 율법 교사가 아니냐? 정말 몰라서 묻나? 너 율법에 정통한 전문가이니 네가 한번 대답해 봐라."하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법 교사는 즉시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모범답안입니다. 율법교사는 전문가답게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신명 30, 10) 한 마디로 손쉬운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라고 명하십니다. 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선,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어떤 희생과 수고도 감수합니다.

이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를 칭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칭찬을 들은 율법교사는가 짐짓 자신이 정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교사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고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다분히 논쟁적인 질문이며 공격하기 위해 자락을 까는 질문입니다. 당대에 유대 랍비들의 율법 해석에 따르면 누구든지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이웃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가족, 자기 친척과 친구들, 그다음에는 같은 신앙과 혈통을 가진 유대인들입니다. 여기에 그래도 이웃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같은 혈통은 아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여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까지만 이웃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모든 이방인은 물론 같은 유대인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죄인들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는 세리, 창녀, 사마리아인, 나병 등 부정한 병에 걸린 사람 등이 속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들과는 이웃이 아니기에 식사나 대화를 꺼려하고 아예 상종하지 않을려고도 했습니다. 착한 유대인들이라 해도 이웃의 범주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실제 삶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자들이나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고 치유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다”라며 예수님을 비난했겠습니까? 율법이 말하는 이웃은 당신이 함께 먹고 마시고 하는 그런 창녀나 세리나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이웃이 누구인지 말해 봐라, 당신이 생각하는 이웃은 율법에서 나오는 이웃과는 다르지 않는가? 어찌 세리와 창녀가 이웃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이방인들과도 같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당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지 않는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질문한 율법교사의 의도는 순수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자기가 옳음을 보이고 예수님의 행실을 문제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의 이웃에 대한 정의를 물으면서 예수님께서 틀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적대감이 내장된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어떤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대답하십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장소적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입니다.(30절). 이런 장소의 언급은 이 이야기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종종 발생할 수 있는 팩트임을 암시해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의 거리는 약 27km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 정도 되는 높은 언덕에 있는 도시이며 예리코는 예루살렘보다 1000미터 정도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광야이며 또한 그 길은 꼬불꼬불하고 거칠며 양쪽에 바위가 많아 예로부터 강도들이 빈번하게 출몰하였습니다. 강도들은 인적이 드문 이 길에 숨어서 무방비 상태의 여행객들, 특히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을 노렸습니다. 5세기에 예레니모 성인은 그 길이 “피의 길”로 불렸다고 전합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지름길일지라도 일부러 돌아갔습니다. 예리코에 사는 제사장들과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갈 때 이 길로 종종 다녔습니다.

사건은 이 길에서 벌어집니다. 먼저 어떤 사람과 강도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그 길에서 강도들을 만납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립니다. 강도는 가고 강도를 만난 사람은 탈탈 털리고 초주검의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그다음 등장인물은 사제입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강도에 당한 사람의 얼굴을 외면합니다. 초주검의 호소에 반응하거나 응답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타자와 약자에게 책임있는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웃이라면 당연히 취해야 할 응급처치도 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피해서 반대쪽으로 지나갑니다. 사제는 그 강도만난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해서 실천해야 할 이웃사랑의 계명을 모르는 사람처럼 피해 달아납니다. 그리고 사제는 그 피투성이에게 이웃이 되어줄 생각이나 행동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텐데 머리 속의 개념인 이웃과 바깥의 실제 이웃이 길항적으로 서로 분리된 상태로 매칭이 되지 않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인 것은 분명히 알았겠지만, 사제는 이웃되기 혹은 이웃되어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되는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사랑의 계명을 무시하였습니다. 사제는 누구보다도 더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살피고 캐어하고 돌봐 줄 의무가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피투성이를 피해 반대로 피해 감으로써 이웃 사랑의 계명 의무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물론 사제도 핑계와 변명을 댈 수 있습니다. 당시 사제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번을 정해 제사 일을 총괄하였습니다. 사제들은 대개 예리코에 모여 살며 예루살렘으로 일을 보러 가는데 보통 당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가서 한 달 정도 일을 합니다. 본문의 사제는 가족이 있는 예리코로 급히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이 길에 강도가 가끔 출몰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도 빨라집니다.

이 상황에서 사제는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봅니다.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 사제에 빙의되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오늘 이 피범벅이 잘못 건드렸다가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불똥이 나에게 튈텐데! 강도가 또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이 피 묻은 사람 건드렸다가 나도 부정해지잖아? 그리고 혹시 이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내 책임도 생길 수 있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에이 모르겠다. 그냥 가자." 처음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사제는 이런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을 것이지만 그다음부터는 그냥 자동적으로 삼십육계를 하는 방향으로 몸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비록 그가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하는 정결 의무를 지켜야 한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고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 행위는 어떤 변명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제는 강도 만난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지도 않은 무사유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사제는 아마 언젠가부터 그렇게 늘 자기가 해오든 그 경로대로 행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만난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얼마 후에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지만 똑같은 짓을 합니다. 레위인들은 사제 밑에서 성전의 기물들을 운반, 보관하는 역할을 감당하면서 제사의 실제적인 모든 일을 보조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무사유의 사제와 비슷한 이유로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하고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이런 경우에는 붕어빵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제와 레위인은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을 분배받을 때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백성을 섬기는 사명이 주어졌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하였습니다.(민수18, 21-24) 그런데도 백성들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의 얼굴을 외면하고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시 지도층의 심각한 도덕적 불감증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고 돌아간 것은 명백한 도움 거절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모든 율법 규율에 앞선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주검을 구해주지 않습니다. 금과옥조로 여기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면서 지키지 않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보다 더 큰 이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은 이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도움이 절실한 이웃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않는 무사유의 거짓 종교 지도자의 전형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과는 달리 초주검의 사람을 버려두고 그냥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은 첫째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 극대화 된 사람이고 둘째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일상화된 사람입니다.

첫째, 경로의존성이란 일정한 경로에 의존해서 타성적으로 행동하는 하비투스 혹은 행위습관을 말합니다.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한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다른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그 특이성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더라도 그 경로를 탈주하지 못합니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관성(inertia)이라 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타성(惰性)이라고 합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초주검의 사람을 보고서도 과거의 경로에 따라 그냥 자기 몸과 발이 가는 대로 갑니다. 타성은 대개 이기적인 방향으로 굳어집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그렇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알면서도 경로에 따랐던 것입니다. 죄의 영향아래 경로를 의존하고 있는 뇌와 몸이 반사적으로 저절로 초주검을 피해 가게 만듭니다. 이것은 결국 갈라파고스가 되는 과정입니다. 오래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누구나 대개 과거 경로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화석화된 경로에서 탈주하여 숙명을 운명으로 바꾸고 반대편으로 되돌아 가던 길을 순리에 따라 미래를 향해 발길을 돌리는 것이 회개의 첫 한 걸음입니다.

둘째 경로의존성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입니다. 철학자 안나 아렌트에 의하면 무사유는 악의 뿌리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그녀의 저서에서 무사유는 악의 누추함이나 평범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악은 일상생활 속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을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는 무사유의 경로의존성에 따라 창없는 모나드에 갇힌 사람입니다.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을 가스실로 보내 죽인 아이히만은 뿔이 둘 달린 악마가 아닙니다. 마음씨 좋은 보통 아저씨이고 자상한 가장입니다. 레위인이나 사제도 집에 가면 자식들에게 착하게 살아야 하고 율범을 자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평범한 가장이고 아버지입니다. 누구나 악의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검색만 하고 사색하지 않는 맹목적인 인간은 누구나 무책임한 레위인이나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그리스도교 성직자와 신자들은 나치의 만행을 보고서도 못 본 척하였습니다. 물론 유대인을 숨겨주고 보호한 사람들도 있지만 극소수였습니다. 무사유는 어리석음이나 무식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유란 데카르트의 사변적인 코지토가 아니라 칸트의 실천이성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인을 불학무식(不學無識)의 사람이 아닙다. 레위인이 사악한 악마는 아닙니다. 어쩌면 관습이나 진영논리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정결함의 사명을 유지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무사유의 인간들입니다. 윤리적으로 무뇌아인 것입니다. 무사유란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깨어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사유란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깨어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윤리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바로 사유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아이히만을 한 명씩 가지고 있습니다. 사유하지 않으면 나와 너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하면 종교체제, 사회체제, 국가체제에 의해 훈육되고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포기하면, 누구도 자본주의 세상 안에서 주인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거나 완장을 차고 있는 사람이 사유하지 않으면,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사제나 레위인이 되기 마련입니다. 악의 방관자가 되거나, 일조하는 부역자가 되거나, 가담자가 되거나, 심지어 가해자가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이 내 자신에게 녹아 들어가고 흡수되어 버립니다. 경로의존성과 무사유는 부지불식간에 주체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에 무섭습니다. 우리는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 레위인에게서 이러한 경로의존성과 무사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만 더 윤리적으로 사유하면 못 본 척 그냥 반대쪽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로의 노예가 된 무사유의 인간이 높은 자리에 앉아 경로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아랫사람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의 대응은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는 피하는 대신에‘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가엾은 마음이라 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입니다. 맹자는 無惻隱之心 非人也 (무측은지심 비인야) 즉 가엾은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사제나 레위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측은지심은 타인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불행에 같이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엾은 마음의 희랍어 어원은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스플랑크논 (σπλάγχνον)’이란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스플랑크논은 내장, 간장, 창자, 폐 또는 심장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측은지심이란 내장이 녹아내리고 창자가 뒤틀리고 위경련이 일어나고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아픈 마음을 뜻합니다. 바로 아기가 아플 때 엄마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 단어는 온 몸에 열이 심하게 나는 아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차라리 내가 아프면 좋겠는데……’라는 엄마나 아빠의 마음의 표현을 할 때 쓰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이러한 가엾은 마음은 12번 나옵니다. 이 마음은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즉 하느님이 세상과 우리 인간을 바라보시는 마음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며, 우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마음이며,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지는 마음이며 눈먼 이와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의 예수님 마음입니다.

가엾은 마음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은 먼저 피해자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이제 우리가 다 알다시피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고 비록 그리짐 산에 세운 다른 성전에서 기복신앙에 빠져있긴 해도 여전히 모세 오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피나 시신을 만지면 부정탄다는 것도 사제나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엾은 마음으로 피해자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감으로 그 사람의 얼굴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줍니다. 당시는 올리브유와 포도주가 소독과 치료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환자에게 응급조치를 취합니다. 상처를 싸매 지혈을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 몸처럼 피해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새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 자기 볼일을 보러 떠납니다. 밤새도록 곁에서 돌보며 케어했다는 뜻입니다. 피해자가 거의 사망직전의 피투성이가 되었기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시간과 돈을 써가며 밤새 강도당한 자를 돌본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이튿날”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실현됩니다. 그는 두 데나리온 주면서 여관 주인에게 그는 돌보는 비용까지 다 선불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돌아온다면 비용의 두 배를 지불한 셈이고, 혹시 그날 안에 못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면 미리 2일치 품삯을 다 지불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여관주인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가 완전히 낫을 때까지 치료해 주는 것을 원했으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는 언약입니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정성껏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돈을 전혀 아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인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이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익명의 기부천사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S사장님이라고 그런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의 자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부는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 도우려고 돈을 버는 것 같은 분들입니다.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타자와 약자를 어려움이나 궁핍에서 구해주거나 도움이 절실한 피해자를 단순히 위급한 상황에서 건져내 주는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고 보따리도 찾아주는 행위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행위, 이웃이 되어주는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라내기, 수정, 왜곡, 딜리트(delete) 즉 지우기가 없는 무한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게 되었으니 그것만도 칭찬 받아 마땅한 선행입니다.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가족이나 지인에게 연락하여서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에게 비대칭적으로 무한책임을 집니다. 그는 지금 누가 이웃인가를 따지는 탁상공론을 하지 않고 타자와 약자에게 자기 시간과 경비를 아낌없이 희생하며 이웃이 되어줍니다.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과 사회적 종교적 지도층 인사들은 그냥 다 지나가고 이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의 옆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가고 있는 유대인을 보고는 도와 줍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이었고 이웃 사랑의 대상조차도 되지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교사에게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꿔서 자기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라는 뜻을 비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교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합니다. “너는 피해서 지나간 사제나 레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응답하는 사마리아인가 될 것인가? 너는 이런 식의 이웃되기를 해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물음을 제시합니다. 이 질문은 오늘 복음 전체에서 볼 때 샌드위치 뒷부분의 식빵 역할을 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서 29절의 율법 교사의 질문과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의 샌드위치 구성에서 앞부분의 빵 역할을 하는 부분에 있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과 짝을 이룹니다.

앞에서 율법학자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29절에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고 되묻습니다. 이 두 질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웃은 나다’ ‘내가 이웃이다’ ‘내가 이웃이 되자’ 이웃사랑에 관한 접근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비유에서 누가 이웃인가? 라는 질문에 따라가면 물론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사고의 대전환을 가져오게 하시는 질문으로 되묻습니다. 문제를 살짝 비틀어서 새롭게 합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으로 바꿉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의 주체가 되라는 말씀이십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과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역질문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더해지는 질문입니다. 구체적 보편의 질문입니다. 구체척 긴급재난의 상황에서 누구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요구가 담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되어 주기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참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전환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하는 관심에서 ’타자에 대한 나의 이웃되어주기‘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즉 이웃이 어떤 대상이냐에 대해 이 비유의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내가 타자와 약자에게 이웃이 될 것인가 말것인가의 결단으로 초대합니다. 이웃은 누구인가? 누가 이웃인가? 가 아니라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인가? ‘’되어 주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즉 예수님의 질문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물으십니다. 단순한 이웃에 관한 관념적 토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웃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웃과 이웃되기는 다릅니다. 본질이 아니라 되어주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되어주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γεγονεναι(게고네나이, gegonenai)’는 생성하다, 이루어지다, 출생하다, 존재하게 하다, 창조하다, 되다 등의 뜻을 가진 ‘γίγνομαι(기노마이)’에서 나온 단어로 어떤 존재의 발생적 근원까지 담아내는 심오한 어휘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Be가 아니라 Become이며 제네시스(genesis)입니다. 프랑스어로는 정적인 에트르(존재, ȇtre)나 에상스(본질, essence)가 아니라 더브니르(되기, devenir)입니다. 이웃이 되어 주는 과정과 자세가 강조되는 생성의 표현입니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맥락으로는 역동적인 ‘이웃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서로‘ 이웃 되기가 아닙니다. 그냥 이웃되기입니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타자의 얼굴로부터 주체의 무한책임의 의무가 지워짐을 강조합니다. 레비나스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책임과 응답'입니다. 무관심하지 않음(non-in-difference)이 중요한 덕목입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다 비대칭적인 관계이기에 대등한 관계에 놓이는 인간관계는 없다고 봅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의 현현(l'Épiphanie du visage)‘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얼굴, 즉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타자(L'Autre)와의 관계는 상호성을 넘어서고 비대칭성에 처합니다. 똑같은 권리와 힘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받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여 관계를 맺을 때 무조건적인 ’이웃되어주기‘가 있을 뿐이지 ’서로‘ 이웃되기는 없다고 합니다. 'give & take'라는 거래는 통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이해관계에 있을 때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누구에게 강자이고 또 누군가는 약자입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주체는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응답하는 주체'입니다. 책임의 프랑스어 ’responsabilité’는 ‘응답하다’는 뜻의 ‘répondre’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그 어원적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말은 어떤 부름이나 호소에 대한 응답을 뜻한다. 이웃되기의 책임은 얼굴 앞에서 ‘가엾은 마음’의 측은지심으로 응답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제와 레위인의 그냥 지나감의 태도 앞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까? 부정타는 것을 피하는 일입니까? 다 죽어가는 사람을 돕는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는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환원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제사보다 이웃사랑이 우선입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기도하고 고백하고 매달려도, 그 하느님은 우리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돌려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절대너’ 이시기에 항상 3인칭으로 계십니다. 성부 하느님은 “당신”으로 계시지 않고 “그분”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성자의 가르침 대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돌려 보내십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타자는 인간에게 사랑스럽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뭐라도 하나 베풀어 줄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분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타자, 약자, 나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사랑스럽거나 욕망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제단에는 나아가려하지만 타자에게는 나아가지 않으려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제단으로 오는 사람을 너는 나에게는 이제 그만 오고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너의 이웃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살라고 되돌려보내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제사를 지내고 기도하는 것은 알겠는데 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타자와 약자의 얼굴에 응답하는 일이라고 되돌려보내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기복신앙으로 구애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복을 주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너는 타자와 약자에게 가서 이웃이 되어주라고 명하십니다. 인간이 보기에 절대타자 하느님은 욕망하고 사랑할 만한 분이지만, 이웃의 타자는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지옥입니다. 바로 이 하나도 욕망스럽지 않은 타자에게 측은지심(스플랑크니조마이)을 가지고 말없이 조건 없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는 이웃의 개념을 범주적으로 제한하려는 의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의도가 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누가 이웃이 아닌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따르면 이웃은 내가 결정하는 어떤 특수한 사람입니다. 이 경우 이웃은 고정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가족, 친척, 친구, 유대인, 유대교인 특수한 대상이 이웃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만 이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 혹은 죄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흔히 생각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의 이웃이라는 범위가 거의 뚜렷히 정해져 있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친구, 이웃집, 같은 동네, 성당사람 등 이것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입니다. 하지만 비유에 나타난 이웃의 대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한 것은 누가 이웃이고 누가 이웃이 아닌지 사람들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며, 그보다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국 네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의 대상자를 마치 어떤 특수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불완전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웃이란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혈통이나 종교적 정체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내가 미리 범주를 예단하여 그 범위를 설정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바로 그 사람이 이웃입니다.

사실, ‘이웃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웃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지 사랑을 실천할 그 대상을 관념적으로 따지기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태여 이웃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라고 연역해낼 수 있습니다. 이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여하간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 셋 중에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일 수밖에 없으며 나머지 둘은 아예 이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대인 청중들은 갑자기 띵 받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상종하기도 싫은 원수 같은 사람이 갑자기 이야기에 등장하고 더 나아가 그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제,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직접적인 대답은 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구냐고 물었을 때, 율법교사는 너무나 쉬운 이 질문에 즉시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애매모호하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선택지에도 없는 기발한(?) 표현으로 대답을 하면서 핵심을 피합니다. 그는 경로 의존성에 따라 편견과 고정관념 혹은 무사유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끝까지 어려웠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명과 예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가 여전히 배타적인 이웃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인종적이고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그 호칭을 입에 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관건이 되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자신이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교사에게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사마리아인처럼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며 하느님 계명을 참으로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오늘 복음의 도입부에서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율법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너희가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단언적인 명령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단언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을 본받아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자기 이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길 바라면서, 자기는 사제, 레위인 혹은 심지어 강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자기는 좋은 이웃이 아니면서 남은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언명령입니다. 이웃 되어 주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와 친한 사람이든 아니든, 다문화 이주민이든, 탈북 정착민이든, 민족과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좋은 이웃되기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말만 많이 하지 말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위험요소가 되는 사람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돕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는 명령은 단순한 추임새나 훈훈한 결말이 아닙니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말이 아닌 행동에 나서라는 요구입니다. ‘이웃이 되어 주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그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머리로 하는 논쟁은 여기에서 그치고 이제 중요한 것은 이웃이 되어주는 실천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삶이 한계상황에 달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은 율법교사의 무지와 무사유 그리고 경로의존성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여라’라고 번역된 희랍어 원문은 ‘ποιεϊ ομοίως(포이에이 호모이오스)’인데 이것은 ποιέι(포이에이, 하여라)+ὁμοιως(호모이오스, 그렇게)입니다. 여기에서 ‘하라’에 해당하는 ‘포이에이’는 현재시제 명령형으로서 현재 행위의 계속성을 강조합니다. 즉 아비투스(habitus)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되 헐벗은 반복이 아니라 역동성 있게 ‘계속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일회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일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뜻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비유에서뿐 아니라 이 현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꼭 존재해야 할 사람, 존재하나 마나 한 사람,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기 하기에 달렸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고, 있으나 마나한 사람은 방관자들이며,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첫째 강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암과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해악만 끼칩니다. 그리고 사제와 레위인은 그저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더 모범이 되어 도와야 할 신분인데 오히려 여러가지 핑계를 댑니다. 이들은 방관자들이고 달리 보면 “기생충”아닌 기생충입니다.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밥만 축내는 밥보입니다. 이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내장이 떨리지 않습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과거 경로의 노예가 되어 어떤 측은지심이나 콤패션 혹은 공감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고 꼭 존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계를 만들지 않고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사제와 레위인들을 비난하고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기는 쉽지만, 정작 실생활에서는 사제나 레위인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는 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바쁘니까, 내 아니라도 누군가가 돕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이웃 되어주기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는 것이고 돕는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아야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이든지 편견을 버리고, 결과를 기대하거나 보상을 바라지 말고,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돕는 것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는 삶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다 함께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성당에서 필요한 사람인가, 아니면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인가, 아니면 불필요한 사람인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은 우리 세상을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그래도 살만하게 만들어 주며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무애(自由無碍) 즉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한편으로는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한편 무사유에서 탈주하여, 이 세상에서 확실한 존재이유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주간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는 주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한 주간, 타자와 약자의 이웃이 되어주는 한 주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7월 10일
  | 07.09
513 12.8%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1)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학자와 ‘가장 큰 계명’에 관해서 대화를 하신 다음에,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28).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 지식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지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는 것이 많은 박사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2)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다고 생각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37).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주님, 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 떠넘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키셨을까?
직책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했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사제와 레위인을 지목하셨을까?
사제와 레위인은 성직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사랑 실천’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고,
사랑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성직자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
일부러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키셨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모든 사제와 레위인이 전부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제와 레위인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성전을 정화할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꾸짖으셨는데(루카 19,46),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죄의 주범은 바로 사제들입니다.
(장사꾼들은 ‘종범자’들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셨을 때,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봉인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도 사제들입니다(마태오 27,62-66).

3)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보서 2,15-16)”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실천이 없으면,
그 말은 ‘빈말’이고,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요한1서 3,17-18).”

실천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말만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사랑’이라는 말이 ‘거짓 사랑’으로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입니다.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라는 뜻입니다.)

4) 옛날에는 ‘강도당한 사람’을 우리 자신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강도당한 사람’을 예수님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을 우리 자신으로 생각해서,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우리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면,
금방 마음가짐이 바뀔 것이고, 금방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고,
나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인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일에 ‘강도당한 사람’과 사제와 레위인이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면,
또는 친한 사람이었다면, 또는 가족이었다면,
사제와 레위인은 그렇게 그냥 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5) 그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으로 대할 때에만
‘참 사랑’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또는 잘 알고 친한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오 5,46-47)”

(이 말씀에서, “무슨 상을 받겠느냐?”라는 말씀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도
똑같이 사랑을 실천해야 ‘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7월 10일
  | 07.09
513 12.8%
제1독서(신명기 30장 10절-14절)는
하느님의 기쁨의 원천은 백성의 돌아섬이라고 합니다.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씀으로서 모압 땅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의미를 확인시켜줍니다(28, 69-30,20).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는 일에 축복을 주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번영을 두고 기뻐하시겠다는 데,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설 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세는 다섯 번(4,1; 5,33; 8,1; 16,20; 30,16)에 걸쳐서 가르쳐주는 데 오늘 제1독서가 마지막 경고입니다.

하느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율법서에 쓰인 하느님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번성하고 싶다면,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실천해야 할 계명들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람의 입과 마음에 있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실천이 가능한 것입니다.

말과 마음과 실천은 인간이 회개하는 세 가지 방법입니다. 백성이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도 백성에게 돌아오실 것입니다(말라 3,7).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의 이름을 사랑한다면(시편 69.37) 하느님의 말씀을 단지 입으로만 주절거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 6,5)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루카 10,25-37)은
율법교사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영원한 생명”(전반부)에 대한 율법교사와 “유다의 지도자”(18,18-27)의 질문은 율법의 모든 것이 사랑(후반부)으로 집약된 것을 알면서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대해 반문하심으로써 율법교사 스스로 대답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있던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던진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율법(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5: 셰마)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고 대답합니다. 원래 유다인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 율법교사는 함께 붙여서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칭찬으로 시작된 이 말은 너는 율법을 잘 알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으니,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마치 자기를 비난하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슬며시 화가 난 율법교사는 애써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또 질문합니다. 첫째 계명으로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는지, 둘째 계명으로 주제를 얼른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교사가 도망칠 틈을 주지 않으시려고 대답 대신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과일과 채소가 많이 생산되는 예리코에서 살던 “어떤 사람”이 과일과 채소를 약 27km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에 가서 팔고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난 것 같습니다 “사해와 예리코의 초원으로 가는 자는 입고 내려가서 벌거벗고 돌아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이 길은 항상 강도들이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습니다.” “초주검”이란 “반쯤 죽여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 모범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저와 같은 사제는 무자비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했던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무자비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어떤 주검에도 다가가서는 안 된다.”(레위 21,11)는 율법 때문에 반쯤 죽은 이를 보자 모르는 체하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간 것입니다. 율법은 남의 짐을 져주는 것(갈라 6,2)인데도 이들이야말로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로마 1,31) 하느님의 말씀에 가장 가깝게 머무르면서 소위 열심하다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과 너무 거리가 멀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마귀 들린 자”(요한 8,48)로 취급하면서 상종하지 않던(요한 4,9)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자비심을 발동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반쯤 죽은 사람의 상처에 당시 치료법에 따라서 기름(세균을 차단하는 막을 형성)과 포도주(알콜로 소독)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자기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떠나야 했기에, 이틀 치 품삯(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환자의 이웃이냐?” 하지 않으시고,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웃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쉽게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합니다. 비천한 족속의 대명사로 여겨왔던 사마리아라는 말조차 떠올리기 싫었던 유다인 율법교사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린 대답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율법학자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었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음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던 율법교사와 예수님 사이에 이웃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이웃이란 곤경에 처했기에 사랑과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즉시 자비심을 드러내고 그 자비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이웃은 곤경에 처한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사랑을 발생시키는 사람,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내 곁에 이웃으로 두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이웃이 되어준 사람, 즉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다 내어주시면서 우리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을 이웃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제2독서(콜로 1,15-20)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업적을 찬미합니다.

바오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가를 읊으면서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세상을 다스릴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마련해 주셨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켜 주시면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으로서의 완전한 본질을 충만히 지니고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신 사랑의 모범, 우리의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을 내어주시고, 매일 성체로 변화되시어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가까운 이웃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이웃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웃은 항상 가까이 있기에 내가 어려울 때 얼른 달려오는 사람입니다. 이웃은 상처를 주고, 그 상처의 아픔을 후비고 파헤치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감싸주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하는(시편 19,8) 사람입니다. 이웃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주는 사람이며, 고통 받는 이들을 멸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이웃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사마리아 사람, 아니 예수님처럼 좋은 이웃이 되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미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거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보십시오. 이것을 명령하시는 분은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면서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이웃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참된 이웃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의 말씀은 늘 우리 입에,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만 바꾼다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7월 10일
  | 07.09
513 12.8%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 10,25-37)

----------------------

오늘의 전례는 단순하게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지만, 가장 중요한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며, 그 계명은 높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계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고 내가 실천하려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지키며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신명 30,11-14).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단지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만은 아니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항상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의 체험은 이 어려운 계명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만 주실 뿐 아니라, 실천할 힘도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콜로새서 1,15-20는 성 바오로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서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15절),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까지도 보여주는 완전한 하느님의 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마음 그 자체로부터 사랑의 샘이 솟아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수의 인격과 행동과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주셨다. 우리는 이제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그 계명을 항상 실천하여야 한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구약에서 이웃이란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을 말하였다(레위 19,33-34).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집단의 그룹의 한 구성원을 의미하는 듯이 축소되었다. 예를 들면, 바리사이, 에세네파, 열성당원, 헤로데 당원 등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테두리를 없애시면서 사랑의 개념을 무한히 확대하신다. 친구이든 적이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어떻게 만나든지 간에 그를 만나게 된 사람 모두에게 이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30-35절)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그 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사마리아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유다인들에게 괄시를 받는 사람이었기에 그 강도 사건에 말려들어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서 쓸 수도 있었지만, 상처를 보고 응급치료를 해주며, 자기 일처럼 처리한다. 그의 시간과 가진 돈은 더는 그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있다. 게다가 앞으로 필요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습니다.”(35절). 참으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애쓰는 분이다.

이 역할 분담은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명백한 어떤 쟁점이 있다.

1.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형식주의적인 전례, 결실 없는 예배행위를 반대하신다. 구원을 위해서 단지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구원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런 예배행위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사제와 레위인의 잘못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두 계명 사이의 밀접하고도 필연적인 일치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데 있다.



2. 선을 어떤 일부 사람들에게만 편중시키는 사회적 종교적 차별주의와 민족적 편견을 반대하신다. 유다인들에게는 외국인이며, 이교도인 사마리아 사람이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지 못한 사랑의 행위를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실천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선은 국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처하게 되는 낯선 모든 처지에서 창조적 능력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 사람이 했듯이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 대하셨다.

이 비유는 실제로 아주 지극히 실천적인 어조로 끝을 맺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6-37절).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비유는 상처 입은 사람이 반쯤 죽어, 길에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이웃에 대해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가 우리 곁에 있다 하더라도, 즉 목전에 두고서도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주 멀리 있을 것이다.

참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참으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비록 하느님의 드높은 성전에서 내려오시지만, 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던 그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폭발적인 힘을 찾게 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는 마지막 말은 이 사랑의 실천이 다시는 생각으로나 시도해불 수 있는 비현실적이거나 공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는 무한한 사랑의 역사와 체험 즉 우리 모두를 위해 자유롭고 인정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되신(요한 8,48) 그리스도의 역사를 다시 시작게 한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2년 7월 10일
  | 07.09
513 12.8%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말씀]

■ 제1독서(신명 30,10-14)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훈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신명기는 실은 오랜 시간에 걸친 이스라엘 백성의 반성과 다짐의 결과이다. 이 작품은 우선 히브리 백성이 율법을 끊임없이 어겨왔음을 숨기지 않는다. 흔히 지키기 어려운 법으로 인식되어 온 이 율법은 그러나 실제로는 너무나도 단순한 법이었다. 인간을 사랑하시면서 이웃을 사랑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배여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 제2독서(코로 1,15-20)

앞서의 서간들에서 바오로는 유다교가 왜곡시켜온 율법을 거슬러 자주 논쟁을 벌여 왔으나, 오늘 서간에서는 보다 긍정적인 논지로 그리스도교의 역동적인 힘을 강조한다. 이 힘은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는 우주 만물의 기원으로부터 출발해서 이 세상 모든 흐름 안에 살아 숨 쉬는 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난 현실이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통하여 세상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분의 사랑을 본받고 펼칠 능력을 선사 받았기 때문이다.

■ 복음(루카 10,25-37)

삶의 유일한 법칙은 사랑,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제사를 올리기 전 피의 접촉으로 부정(不淨)을 두려워했던 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를 만나 반죽음 상태에 놓인 나그네를 피해서 지나가나, 흔히 ‘무법자’로 경시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주저함이 없이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긴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이 사람은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새김]

■ 하느님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분이기에 그분의 말씀은 그 내용이 어떠하든 사랑의 말씀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사랑이 담긴 이 말씀이 결국 보다 전문화된 용어인 ‘율법’으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근본정신까지 바뀔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율법의 근본정신이며, 이는 이미 신명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수없이 강조해 왔던 바다. 문제가 있었면 그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문자로서의 법 준수에 집착한 나머지 이 법을 부담스러운 법, 지키기 어려운 법으로 인식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율법학자의 질문 앞에서 그리스도는 잊혀 왔던 법의 정신을 기초로 응답하신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정신이고 완성이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임을 천명하신다. 특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이것저것 따지거나 통상적인 관례에 구애받지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참 이웃으로 소개하시며, 알고 있는 대로 행할 것을 명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지식 쌓기에는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면서 실천에는 한없이 인색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며, 이웃 사랑 실천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교우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김건태 신부
2022년 7월 10일
  | 07.1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29   연중 제26주일 성경 말씀 해설  [4] 82
828   [수도회] 부자와 라자로  [14] 4020
827   [수원] 대문 앞의 라자로  [8] 2751
826   [인천] 사랑이라는 계명  [11] 2502
825   [서울] 신앙고백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삶  [10] 2565
824   [마산] “나잇살”, “낫살”  [4] 2774
823   [부산] 풍요로움의 진정한 가치는?  [5] 2698
822   [안동] 무관심과 겸손  [3] 2236
821   [대구] 내가 가진 라자로의 몫  [6] 2548
820   [전주] 선을 소홀히 한 죄  [2] 264
819   [광주] 인정받길 원합니다  [3] 2335
818   [청주]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는 교회의 신앙인  [2] 686
817   [대전] 부자와 라자로... 당신은?  [2] 327
816   [군종]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  [3] 235
815   [의정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유  [5] 2675
814   [원주] 나눔의 실천  [3] 2240
813   [춘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3] 326
812   (녹) 연중 제26주일 독서와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 예화)  [6] 2277
811   연중 제25주일 성경 말씀 해설  [1] 61
810   [수도회] 돈보스코의 의미  1973
809   [인천]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1940
808   [수원] 하느님의 뜻에 맞는 재물 사용  [2] 2293
807   [서울] 재물은 천국을 가는 데 장애물로 나타나지만, 잘 사용할 때  [2] 2256
806   [부산] ‘영리한 집사(執事)’의 비유  [3] 2300
805   [대구] 약삭빠른 청지기  1994
804   [광주] 재물의 노예  270
803   [의정부]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1970
802   [원주]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  2110
801   (녹) 연중 제25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과 재물, 약삭 빠른 집사))  [2] 1602
800   연중 제24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13
799   [수도회]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  [4] 2715
798   [수원] “하느님의 기쁘신 용서와 자비”  [4] 2587
797   [인천] “아버지” 하느님  [6] 2536
796   [서울] 너무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7] 2505
795   [마산] 잃은 자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4] 2606
794   [부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8] 2685
793   [안동] 나약한 인간  [5] 2521
792   [대구] 아버지의 마음  [4] 2544
791   [의정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4] 2467
790   [군종] 죄인들 중의 가장 큰 죄인  [2] 639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2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