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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63
작성일 | 22.07.26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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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전도 1,2).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반향되고 있다. ‘헛되다’(hebhel)라는 단어가 전도서에 22번이 나온다. 그 본래 의미는 ‘수증기’, ‘숨’을 의미하여 폐에서 콧구멍과 입에 이르자마자 없어지는 ‘숨’처럼 단기적이고 단명한 모든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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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전도서 1,2; 2,21-23
헛되고 헛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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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고 제1독서는 말한다. 돈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일에 대한 수고와 걱정과 불안에 대해 돈이 과연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는가 라고!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21절). 그러므로 돈을 쌓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보통 두 가지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갑자기 닥치는 죽음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자기의 재화를 누릴 수가 없고, 자신의 고뇌를 행복과 평온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즉 부자가 된 그는 이제 그렇게 애써 모은 재화를 지키기 위해 밤에도 마음을 죄어 걱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제1독서의 내용은 세상의 것들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알게 함으로써 인간을 고통과 실망 속에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부’(富)에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복된 가난한 이들’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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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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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재화’ 앞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재산분배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즉 첫째로 인간은 그 내부로부터 이기주의라는 악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기주의를 치료함으로써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산의 공평한 ‘심판자’처럼 행동하려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청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 필요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은 재화와는 관계가 없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관한 것이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15절).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갖고있는 ‘재산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정 반대의 의미이다. 소중하게 여긴 그 재화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잃게 한다. 즉 애덕과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재화를 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21절)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의 이기심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되고, 스스로 자신을 자신이 지은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 안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존재할 수 없고 그의 재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은 그에게 허무를 안겨주는 모습이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20절). 생명과 재산이 그에게는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 보였던 그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고 있다. 성서에서 ‘어리석다’는 개념은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시편 14,1) 잘못된 근거에 자신의 신뢰심을 두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후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이 부자는 아둔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고 전혀 가진 것이 없는 ‘어리석고 가난한 자’이다. 즉 자신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못한 자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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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골로새서 3,1-5.9-11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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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3,17). 이 세상에서 재화와 재물에 집착하여 거기에 매여 노예가 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성과 사랑에 대해 신뢰심을 가질 것을 권고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 12,29-31).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화나 재물에 매여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재물이나 재화에 집착하고 거기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우상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재화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재물이 그것을 만드신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사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2-3절).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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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513 12.8%
베품은 하느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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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형제간의 유산 시비에 개입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재판관도 아니고 재산 분배자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회에 재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큰 창고를 지어 재산을 쌓아두고 이제 걱정할 것이 없으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재산이 인간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잔뜩 쌓아놓고 죽으면 그 재산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으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재물은 좋은 것입니다. 재물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리합니다. 남보다 더 편하게 살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재물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가 좋으면, 그것에 몰두하여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단편적입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도취하면 부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바로 듣지 못합니다. 권력에 맛들인 사람은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도 오로지 그것만을 얻기 위해 매진합니다. 재물 앞에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쉽게 잃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고, 형제간에 불목하며, 친구를 배신하기도 합니다. 재물도, 사랑도, 권력도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 한 가지를 자기 삶의 최대 보람으로 단정하고 나서면,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합니다.

구약성서는 장수(長壽), 건강, 사람들의 존경과 더불어 재물을 선하신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오복(五福)에서, 명대로 살다가 편하게 죽는다는 고종명(考終命)이라는 항목 하나가 빠진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23,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에 풍족함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시편은 “맹수들은 먹이 찾아 배고플지 모르나, 야훼를 찾는 사람은 온갖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34,10)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곤경에 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신으로부터 복을 얻어내기 위해 신에게 제물(祭物)을 바쳤습니다. 바치고 더 큰 복을 얻어내기 위한 제물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오면 재물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구약성서와 시선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새로운 실천이 발생한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셔서 예수님도 그 자비를 실천하셨고,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서 당신도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심취하여 사셨습니다. 그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마르 10,21 참조)을 가르치고, 당신 목숨을 실제로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과 같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고, “장사꾼이 발견한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마태 13,44-46). 그것에 심취한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가졌던 것을 모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도 가르쳤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태 6,24)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재물을 얻기 위해 하느님에게 빌지도 않고, 재물을 보람으로 삼아 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루가 6,20), 재물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부유한 사람이 불행하다”(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무소유(無所有)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도 재산을 상당히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를 초대했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태아 사람도 부자이면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리마태아 출신인 한 부자가 왔는데, 이름은 요셉이고 그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마태 27,57).

복음서는 재물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장애물이라서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9,21).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루가 16,19-31). 라자로는 부자의 집 문간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자와 걸인이라는 빈부(貧富)의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비극은 라자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우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위해 책임감을 느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의 재물을 보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웃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재물만 보고, 그것을 더 가져야 하겠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재물에 시선이 고착되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경고로써 끝맺었습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을 자기의 실천 안에 살려내지 못하면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입니다.

베품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베품은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이 우리를 통해 많은 이에게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는”(2고린 9,11) 계기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먼저 은혜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은혜롭게 보이면,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도 우리가 가진 것의 은혜로움을 체험하도록 그들과 나눕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탁월한 예배인 미사는 예수님의 삶이 ‘내어주고 쏟는’ 나눔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미사에서 예수의 몸과 피라는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도 내어주고 쏟는 실천을 하여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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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7.26
513 12.8%
탐욕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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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지 영감. 어릴 적 읽은 그림책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나눔과 공감이 결핍된 삶, 모든 것을 긁어모아 축적하는 삶의 함정을 분명하게 학습시킨 책이었기에, 스크루지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불길한 운명의 대명사였고, ‘할아버지’보다 ‘영감’이라는 호칭으로 무례하게 불러도 되는 부도덕한 인물이었으며, 미워하고 지탄해도 되는 탐욕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스크루지를 다시 떠올려보니 그의 문제는 재산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실과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의 문제는 두려움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지성의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심각한 파업상태에 들어간 어떤 기업의 소유주가 서슬 시퍼런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라 기업주에게 더 많은 재화를 모으게 할 때’라고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서, 정녕 탐욕은 어리석음을 더욱 내재화시키는 도발이고, 그러므로 소유에 대한 집착은 철저히 이성의 문제임을 깨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근심과 공포,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인색함과 그 두려움의 끝이 어떤 어리석은 종말로 이어지는지, 그 여정을 이성적 통찰과 지혜로 가르쳐줍니다.

■ 복음의 맥락

루카복음은 크게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1~4,13)과 공생활 중(4,14~24,53)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공생활 이야기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아가는 공간적 흐름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9,51~19,28)에 발생하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서서히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군중 가운데에 있던 한 사람이 형제들 간의 유산분쟁에 대하여 의뢰하고, 예수님은 재산과 재물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를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 하느님 앞에 부유하다는 것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루카 12,16)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해보면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가 됩니다. 새 번역 성경이 문장의 주어를 “부유한 사람”으로 본 것에 비해 그리스어 본문은 “땅”을 주어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이 그 어떤 노력과 공헌을 다 한다하여도 결과를 내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심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의 본질적 문제는 창조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없으니 당연히 그분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 역시 이러한 사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17절)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표현은 수확물의 진정한 주인과 주체가 누구인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그가 받은 ‘은혜’는 ‘재앙’으로 변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주신 은혜를 선물로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 은혜의 결과를 하느님의 일을 위해 나누지 못한 탐욕이 비극을 자초한 형벌이 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이 문장에서도 여전히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 허무로다, 허무!

재물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집착이,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복음의 관점은 제1독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첫 문장에 무려 5번이나 등장하는 단어 ‘허무’는 히브리어 ‘헤벨’에 해당하며 ‘숨’, ‘입김’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의 것을 의미합니다. 숨이나 입김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만 중요하다고 해서 이를 부여잡거나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할 때 그 숱한 노력들은 부질없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이 찰나적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찰나적인 것들을 삶의 본질인양 소유하려 하고, 하느님의 선물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하려 하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2,22~23)

코헬렛의 저자는 찰나적이고 잠시적인 것을 영구하게 간직하려는 노력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모습은 모으고 쌓아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걱정, 지나친 심각함, 지나친 근심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걱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도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 새 인간을 입은 사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촉구하는 것 역시 인간이 마주해야할 모든 현실적 문제들을 불성실하게 혹은 하찮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 공부, 가족, 재산, 건강 모두 삶을 위해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다만 이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추구하라는 것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이를 “새 인간”이라고 표명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9절)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언제나 권력과 계급을, 자본의 축적으로 확보되는 결과물로 인식합니다. 자본의 축적이 힘이 되는 사회는 그것의 분배를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밖에 없고, 이 모든 악순환은 파괴와 선동의 원인이 되어 더욱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불안을 산출합니다.

노동과 헌신의 결과를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누리고, 이를 기꺼이 나누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에 지배당하고 치열한 과정 속에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발생한 여러 범죄들은 도덕과 윤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지만, 사실 도덕과 윤리는 감정보다 이성의 결여로 발생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의심하고 고독해하며 공허가 가슴을 채워 분노하고 혐오하여 스캔들을 낳습니다.

삶의 찰나성과 재물의 소유가 주는 불안을 지혜롭게 간파하여 인색과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에게 허락된 현실적 가치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것,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며 확실한 구원의 길입니다. 부의 축적과 소유에 집착하면 급기야 소유의 노예가 되어 결국 소유 당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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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김혜윤 수녀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4일
  | 07.26
513 12.8%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에게 참된 지혜를 가르쳐 주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걷게 하소서.

독서

재산 문제와 죽음의 문제. 오늘 복음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치 두 가지를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달아보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 일에 개입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것은 사실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관계된 문제라면 라삐에게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을 재물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기회로 삼으십니다. 유산 분배가 아니라 재물의 가치 자체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 15)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창세기 첫 페이지부터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보시니 좋았다.”라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성경은 (창세 1, 4. 10. 12 등) 창조의 근본적 선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의 가치는 죽음 앞에서 상대화되며, 물질적 재물이 생명을, 더구나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지는 못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를 들거나 아니면 다른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자명한 것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을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며 나에게 살날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하는 생각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재물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내몰아 갑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위해 많은 포기와 희생을 치르며 애써 일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언제나 가진 것이 부족하여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오늘의 제1독서, 곧 인간의 모든 노고가 ‘헛되다.’ 는 코헬렛의 말은 (1, 2; 2, 23) 사치로 들릴 것입니다. 무엇인가 말씀 안에 걸림돌이 들어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현실감이 없다는, 예수님이 너무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문제에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사실, 이 세상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그 삶이 우리에게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끝없이 살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더 절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한한 삶이기에 이 짧은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걸림돌은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 21) 핵심은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살 것처럼 창고를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워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준을 잘못 세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더 많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성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잠시 머무는 지상의 이 삶이 진정으로 행복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 그 목적에 맞갖게, 하느님 뜻에 따라 나누임 없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삶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야 하듯, 우리의 삶도 육적이고 영적인 모든 의미에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선하고 아름다운 씨앗들을 성실하게 가꾸어 당신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 이것이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느 날 죽음이 올 때, 하느님 앞에서 충만한 삶을 위해 노력한 오늘의 삶이 후회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도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시편 9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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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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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을 율법서인 토라를 비롯하여 성경 말씀을 권위 있게 풀이할 수 있는 라삐요 스승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나 청중들로부터 당시 유다이즘의 논란거리나 일상의 문제들에 관하여 질문을 받으셨다.

1.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3-21)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동안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제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2,13) 한다. 어떤 이가 두 형제 사이의 유산 분배라는 아주 구체적인 요청을 예수님께 해 온 것이다. “맏아들…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에서 두 몫을 주어야 한다.”(신명 21,17)라는 구절에 따라서 율법은 토지나 집과 같은 부동산의 소유주가 사망할 때 장자에게 우선권을 두고, 부동산이 쪼개지지 않게 하면서 동산의 일부를 다른 자녀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예수님께 자기의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만 보아서는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로서 장자가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주장이었으며,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하는 말씀처럼 형제들이 유산을 적당하게 서로 잘 분배하여 우애 좋게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요청이라기보다는 아예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듯이 강박적으로 예수님께 말씀드린 사람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청 자체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사람아(Ἄνθρωπε, ánthrope, =man),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4) 하는 반문으로 대답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하신다. 우리는 적대적인 상대방을 만나거나 누군가와 싸움에 말려들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누군가의 질문이나 요청을 받을 때 비유나 은유, 혹은 수수께끼 같은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그분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토라에 의해서 확립된 재판관이나 중재인의 권위를 당신께서 대신하고자 않는다는 뜻을 내비치신 것인지(참조. 신명 16,18-20;21,15-17), 아니면 하느님의 율법이 명시하는 정의와 사랑의 요구에 따라 각자가 양심껏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재산 분배와 같은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하시려던 것일까? 당신의 사명이 오로지 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강조하시려던 것이었을까? 두 형제의 갈등과 분쟁을 형제간에 서로 책임지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을까? 나로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요청이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는 모양새를 취하고는 있으나 내심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에 대한 요청이었음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답변하시지 않았을까 하고 추론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9) 하셨고,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33)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루카 18,22) 등과 같은 말씀을 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유산 분배와 같은 상속 문제를 규정하시는 분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예수님께 요청을 드린 당사자가 법적이고 경제적으로 온당한 결정을 얻고자 했다면 자기에게 우호적이고도 합법적인 특정인을 내세워서 자기의 몫을 제대로 챙기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정당한 유산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자기의 욕심에서 시작한 문제임을 감추고,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떠나 표면적인 문제로 문제를 호도하면서 자신을 은근히 표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탐욕이 인간의 마음에 차게 되면 주변에 갈등을 부추기고 눈을 멀게 하여 이웃이나 형제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아신다.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요청한 사람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πλεονεξία, pleonexía)을 경계하여라.(Ὁρᾶτε, horâte=see *우리 말에서는 ‘경계하여라’라고 한 마디로 번역하였으나 희랍어 원문에서는 Ὁρᾶτε라는 말과 ‘삼가라φυλάσσεσθε, phylássesthe=to guard, watch’라는 두 마디로 구성되어 있어서 직역하면 ‘보고 살펴라’ 하는 말이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모든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신다. 소유와 재산이라는 우상 중의 우상에 사로잡혀서 그러한 것들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각자가 살아내야 하는 온전한 인생을 제대로 사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계속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고 말씀이다. 우리 인간은 곧잘 우리 인생의 충만함이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을 추구하는 데서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나 재산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여기는 환상의 먹이가 되곤 한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1900~1980년)은 40년도 훨씬 넘는 세월 전에 『현대의 인간 사회는 존재의 참 본질이 소유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아무것도 지니지 못할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만다.』라고 말한다.

2.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루카 12,13-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가르침을 더 깊이 새겨주시려고 비유 하나를 말씀하신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생각지도 않게)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곳간들이 너무 작아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6-19) 비유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에서는 “내가 수확한…내 모든 곡식과 재물…나 자신에게…네가…” 하면서 오로지 ‘나’라는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나’가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주체로서 ‘내가 헐고, 내가 짓고, 내가 나에게 말하고, 내가 쌓아두었으며, 내가 먹고 마시며 즐긴다.’ 비유는 순전히 ‘나’와 ‘나의’라는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리석은 부자’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스스로 말한다. ‘rest, eat, drink, enjoy’ 전형적인 인간 욕구의 4가지 동사이다.

사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인생 설계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설령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마음 깊숙이 잠복하고 있으면서 부富와 재산의 증가가 우리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담보해 줄 수 있다고 믿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내가 소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읽어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운 좋고 풍요롭게 수확하고 가지게 된 것이 가지지 못한 가난하고 운이 없었던 이들과 나누고 공유해야만 하는 기회라는 생각조차 못 할 수가 있다. 자신의 재화에만 눈이 멀어 그것만 바라보면서 그 재화가 지닌 의미를 볼 줄 모르는 이러한 고독한 인간상은 우리 모두의 각자 안에 어느 정도씩은 존재한다.

3. “어리석은 자야”(루카 12,13-21)

이런 이에게는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알려 주는 놀라움이 찾아든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어리석은 자에게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고 그가 애써 축적한 것을 자신과 함께 지니고 갈 수 없다는 비유의 후반부이다. 인생의 끝에 가서야 나의 재산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나의 참다운 인생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자기가 가진 것에 취해 진실로 보아야 할 인간 실체를 보지 못한 눈먼 자이다.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을 따르며 그 말을 좋아하는 자들의 운명이다.…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시편 49,13.21),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시편 49,17-18) “그들은 양들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시편 49,15) 부富와 재산, 그리고 소유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우리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치명적致命的인 환상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우리 인생의 많은 선택에 이런 기준을 들이대곤 한다.

사실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인 죽음은 소유와 권력, 그리고 쾌락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인간 각자에게 근본 존재를 맞닥뜨리게 한다. 각자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도대체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깊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한계와 허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께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서술하기 전에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하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개미나 벌, 혹은 다른 동물들도 가끔 자기들의 양식을 축적한다. 그러나 인간은 양식뿐만 아니라 부질없는 잡동사니까지 축적하고 그에 묻혀서 자신을 잊고 마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무엇도 비축하거나 저축하지 말고, 대책 없이 그저 오늘 먹을 것에 만족하고 주저앉아 있으라는 것, 혹은 부유함이라는 것이 그저 사악하고 못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가르침은 아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날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근면성실이라는 미덕이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고, 그렇게 이루어낸 모든 것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그저 내 것인 줄만 알고, 하느님 앞에 알몸으로 선 인간만이 참인간임을 잊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고 부질없는 것이며 일장춘몽이고 emptiness요 nothing이 되고 만다. 생각을 약간 비틀어서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만을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므로 뭐 그리 나쁠 것이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가난한 이’들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이 두 가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가난’을 개인적인 노력과 근면의 부족이라고 보는 시각과 사회적 구조 탓으로 보는 시각이다. 많은 경우에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이 개인의 노력 부족 탓이라고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헤어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처절한 가난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오늘 이 세상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죽음의 시간은 또한 우리 각자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해서 심판자이신 하느님과 만나 셈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에는 우리 각자 살았던 ‘지금, 여기’의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곧 ‘지상의 부’라는 식탁에 서로 형제자매가 되어 둘러앉아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의를 실천했는지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이기심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축적하고 다른 이와 그것을 나누지 않은 이, 하느님의 뜻을 좇아 자신을 풍요롭게 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외로움에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많이 잊어버리고 살지만, 사람의 인생이 이 지상의 삶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이 땅에만 재물을 쌓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체사레아 지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교가 되었던 성 바실리오(330~379년)께서는 『과연 네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네가 네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 그것들을 얻었는가? 가끔 보면 부자들이란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극장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먼저 왔다고 모든 자리를 사재기하는 것처럼 말이다.…네가 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벌거숭이로 나오지 않았더냐?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역시 벌거숭이로 떠나가지 않을 것이더냐? 너의 것이라는 그 재화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들이냐? 우연히 얻었다 하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것이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모르고 너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모르는 것이다. 한편 너의 모든 재화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안다고 하면, 어떤 이유로 그 재화를 얻었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차별하여 재화를 허락하신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불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이유로 어떤 이가 부자이고 어떤 이유로 어떤 이가 가난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자인 네가 착하고 정직하게 이 재화들을 사용하여 그 재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그로 인하여 너에게 주어질 상급이 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탐욕의 자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면서 많은 것을 가로채며 움켜쥐고만 있다면 과연 네가 그 누구에게도 불의한 적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지금 너의 빵이라고 들고 있는 그 빵이 굶주린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고, 네 옷장에 보관해 둔 그 옷이 벌거벗은 누군가의 옷일 수도 있으며, 네 신발장에 넣어둔 그 신발이 누군가의 먼지투성이 맨발에 신겨져야 할 신발일 수도 있고, 땅 속에 묻어둔 너의 금화가 이 순간에 절실하게 필요한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네가 도와줄 수도 있었던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은 불의를 하느님이 아닌 네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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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7월 31일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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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 탐욕(貪慾)을 경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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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결국 죽고 말 인생의 허무에 관한 유명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특히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하여 소유하게 된 것을 결국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허무에 관해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탐욕은 우상숭배(에이돌롤라트레이아 : εἰδωλολατρεία, eidololatreia)”라고 돌직구를 날립니다. 희랍어 에이돌롤라트레이아는 에이돌론(εἰδωλολ, 형상, 우상)과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섬김, 숭배)의 합성어로 우상 숭배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콜로새서 3,5)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탐욕을 경계하여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전례 말씀은 인간이 탐욕을 부려봤자 결국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교훈을 줍니다.

중세교회에서 탐욕은 일곱 개의 근원적인 대죄 즉 칠죄종(七罪宗, The seven deadly sins,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ia 또는 septem peccata mortalia)의 하나입니다. 칠죄종은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식탐, 나태입니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 따르면, 탐욕의 죄를 지은 자는 '탐욕 지옥'으로 갑니다. 탐욕은 축재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소유의 공유의 부절제를 뜻한다. 우연이든 행운이든 합법이든 불법이든, 재화를 획득하는 일은 선 보다는 악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세의 생각이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요행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화보다 더 중요한 일에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탐욕을 자신과 이웃에게 가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첫째, 먼저 자신의 필요보다 더 가지려 하는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신에게 저지르는 죄입니다.
둘째, 탐욕은 실제로 세상의 한정된 재화를 지나치게 획득하고 소유해서
누군가는 결핍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게 하는 면에서
이웃에게 저지르는 죄입니다.

신곡에 의하면 탐욕에 몸부림쳤던 영혼들은 지옥에 떨어져 거기서 자기가 모았던 돈을 담은 산더미 같은 돈주머니를 가슴으로 굴리는 형벌을 영원히 받습니다. 죄인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굴리기에 몸이 부딪힐 때 서로 막말로 욕합니다.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도 여기에 있다고 하는데 죄인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칠해져 있어 누가 누군지 모릅니다. 무거운 바위를 진 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형벌을 받는데 그것은 그들의 탐욕이 그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치지 않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지칠 줄 모르던 탐욕에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세밀하게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먼저 도입부에 예수님께 재산 분배를 요청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 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 탐욕에 관한 메시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예화’혹은 ‘바보 같은 부자의 예화’를 말씀하십니다.

전반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탐욕에 대해 말씀하시게 된 배경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어떤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땅의 일과 관련하여 생뚱 맞는 부탁을 해옵니다.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유산 분배의 일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즉 탐욕의 여러 가지 속성과 차원을 잘 나타내 보여 주는 인간사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과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저 정도면 자기 형을 설득해서 자기 몫의 유산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다가 기껏 생각한 것이 예수님을 이용할 요령이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그가 예수님을‘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이야기의 주제로 보아 예수님을 정상적인 랍비로 보았습니다. 유산 분쟁을 해결하는 일은 랍비의 의무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임무는 세속적인 분쟁의 해결이 아니기에 일단 그의 요구를 거절하십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예수님께서는 유산 분배를 중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단호히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장이나 중재인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겪는 문제에 관심이 없으시다거나 공정하시지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동생뿐 아니라 모든 이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탐욕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동생과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명령과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말씀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엄중한 말씀입니다. 충만한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탐욕이라고 단호히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를 탐욕의 대표선수로 제시합니다.

비유에는 ‘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부자가”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풍년이 들어 곡식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해 소출이 많아졌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입니다. 재산이 늘어 난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이 부자는 많은 소출을 얻은 다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참으로 행복한 걱정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많은 수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여야 할 지 고민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배부른 걱정을 한 번이라도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내가 수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 은연 중에 자기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부자에게 넓은 농지가 있었고, 풍성하게 수확했습니다. 농사만큼 정직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부정적인 방법이나 사기 행각으로 소출을 풍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자는 열심히 일했고 그에 대한 결과로 풍성하게 거둔 것입니다.이 부자는 그의 밭에서 풍성한 소출을 이루어 그의 창고는 이제 더 이상 곡식을 쌓을 틈이 없을 만큼 가득 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는 곳간을 증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기에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쌓아 둘 작정이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인생을 예측하고 계산하고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는 자기 곡식을 모을 자기 곳간을 새로 짓고, 여기에 자신이 수확한 곡식을 쌓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재산이 많아져 새 창고를 짓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고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많은 소출을 거두기 이전에도 이미 부자였습니다.

자신이 농사짓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다 하느님의 능력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루카 12,16)라고 기록하였는데, 문장을 직역하면 ‘땅이 많이 생산했다.’가 됩니다. 땅의 생산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성서적 사유로는 땅은 하느님의 것이며 땅의 소출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서는 그 무엇 즉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결실입니다. 부자가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이라고 생각한 한 해의 소출은 비와 햇볕을 주시는 하느님 덕분으로 이루어진 결실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의 안중에 하느님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전부이고 모든 것이 자신의 공로입니다.

자신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땅의 소출을 이 부자는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라고 말하면서 소출을 “내가 수확한 것”(17절)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강조합니다. 부자의 이 독백 속에서 그의 관심과 생각 그리고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나”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복음을 희랍어 원문으로 보면 ‘나’ 라는 단어가 자그마치 10번이나 반복 강화되면서 나옵니다. “내가, 내 곡식, 내가 이렇게 해야지, 내 곡간, 내 모든 곡식, 내 재물, 내가 지어, 내가 쌓아 두었으니,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내 영혼” 등입니다. 부자는 창조주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주인인양 자신의 모든 소유와 생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열거한 것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원래 그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다 내것이 아니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다 내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신명기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 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 8,18)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원래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어느 하나도 순수하게 나의 것은이 없읍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물질이나 재화뿐만 아니라 재능, 건강, 생명 등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시고 내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내 재산이나 내 지식이나 내 시간이나 심지어 나의 자녀들까지도 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손에 무엇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맨주먹 빈손, 알몸 알발 혹은 알손으로 나옵니다. 욥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시련으로 불시에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잃었으나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미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기 1:21)

다 하느님의 것이고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관리자이며 청지기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1코린 4장 7절에서 자랑하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이 모든 말씀은, 비단 이 부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인이시고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관리자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만족해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이 부자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생일대의 가장 심각한 일이 발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이 사람의 삶에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개입하십니다. 바로 시간이 다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생살여탈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주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 ἄφρων(아프론)의 원 뜻은 “생각이 없는 자,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 생각이 모자라는 자”입니다. 우리말로는 골 빈 멍청한 바보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어리석다는 것은 매우 큰 모욕입니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인 부자가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은 자로 전락하였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이 부자를 이 부자를 골 빈 멍청한 바보라고 보십니까?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이 부자는 여러 해 동안 아무 걱정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재산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오늘날 말하는 ‘성공한 삶’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며 성공의 모델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이 없거나 모라라는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소출이 늘자 창고를 지으려는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생각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쓰면서 여생을 즐길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자가 모르고 있었던 또 한 가지는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이 부자는 재산만 많이 있으면 십 년이고 아니 백 년이고 잘 살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그 배경으로 앞에서 재산의 분배자가 되어 달라는 동생에게 재물이 우리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고 자락을 깔며 밝히신 바 있습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늘 밤에라도 숨을 거두어 가시면 당장이라도 허무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불과 한 시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바로 내일 이 시간에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계획과는 달리 그는 오늘밤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부자는 이것을 잊은 채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마치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여생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땅에 쌓은 재물은 그의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재물을 많이 모았다고 해도 뜻밖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날 수 있습니다. 땅에 쌓은 재물과 위에서 주는 생명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생명이 물질적 재산으로 보장될 수 없습니다.

가수 민해경과 김현준‘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 내 인생~은 나의 것 / 그냥 나에게 / 맡겨 주세요 / 내 인생~은 나의 것 / 내 인생~은 나의 것 / 나는 모든 것 / 책임질 수 있어요”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으로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 인생의 진짜 주인은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소유도 하느님이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여 소유한 것이라도,
하느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임을 알아야만 ‘탐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탐욕은 단지 더 가지려는 욕심만이 아닙니다.
탐욕은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고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이야기를 마치시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의 허무한 말로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느님께 대해 부유하지 못한 자는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는 재물을 쌓아놓은 채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어리석은 부자로 살지 말고 하느님께 부유하라고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탐욕에 눈이 먼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고 또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부자이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삶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는 자신의 재산을 지상의 곳간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곳간에 쌓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확장해서 보면 예수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말씀하신 루카복음 12장 33절에 하느님께 부유한 자가 어떤 자인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즉 여기서 예수님은 하늘에 해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마태 복음에도 병행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오 6:19-20)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은 저축을 하늘에 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성당에다 헌금을 많이 하라는 그런 뜻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재물을 사용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내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한 어리석은 부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이 부자의 모든 사고 방식은 ‘나’ 중심으로,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적 존재였습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만 위하고 타자와 약자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그때부터 탐욕의 늪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심지어 자신의 영혼까지도 자기 것인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에게 재물은 많았지만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할 때마다 “내”자(字)를 붙입니다. “내 곡간” “내 곡식” “내 물건” “내 영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나’중심으로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자는 철저한 자기만의 세계, 상대방이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소득을 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가 성공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의 도움과 참여가 있었겠습니까? 그가 많은 소출을 얻기까지는 소작인과 이웃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씨앗과 농기구와 가축들을 보급해준 이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내 이웃은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탐욕은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악입니다.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신명기는 궁핍한 사람을 도우라는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 땅에서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땅에 있는 궁핍하고 가난한 동족에게 너희 손을 활짝 펴 주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기 15,11)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최후 심판에 관해 말씀하시면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밝히십니다.(마태오 25,40) 그리고 루카 복음 16장 19절 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도 주님께서는 부자의 무관심을 질책하는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간에 누워있는 라자로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시원한 물 한 그릇 주지 않다가 지옥 불에서 라자로의 손가락에 묻은 한 방울의 물을 구걸하였으나 얻지 못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신자의 믿음은 이웃의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위하여 구제하고 나누고 이들을 섬기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천명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 14-17).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난다 - 쇼펜하우어

이렇게 볼 때 오늘 복음의 알갱이 키워드는 “탐욕을 경계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탐욕’으로 번역된 희랍어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 Pleonexia)는 ‘플레이온’(πλείων)과 ‘엑코’(ἔχω)의 합성어입니다. 플레이온은 “양이 더 많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한,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란 뜻이고, 엑코는 “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 잡다, 고수하다, 매달리다, 간직하다, 보관하다”란 의미입니다. ‘탐욕  πλεονεξία’을 어원대로 분석하면 ‘좀 더 갖고 싶어 하는 마음’‘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을 의미하고 ‘탐욕스런 사람 ’은 ‘더 많이 가진 사람 πλεονέκτης’을 뜻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지녀야 할 것보다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상태, 자신의 필요나 다른 사람들의 상황에 관계없이 더 많이 얻고 싶어하는 마음, 이것이 탐욕인 것입니다. 영어로 Have more인데, 여기에서 문제는 more, more, more, more... 의 크레센도(crescendo, 점점세게)입니다. 재물을 계속 좀더 갖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탐욕은 더 많이 갖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수중에 더 많이 넣으며, 자신의 구체적인 필요나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한테 참으로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을 가지기 원한다면 그것이 탐욕이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 또한 탐욕입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전 그리스 문화권에서 탐욕의 문제를 신화의 영역에서 사유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사람은 플라톤입니다. 그는 이미 2천년전 탐욕을 신화와 주술의 영역에서 실용주의적 윤리학의 영역으로 옮겼습니다. 플라톤은 ‘플레오넥시아’를 ‘더럽고 오만하고 사악한 욕심’으로 간주하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에게 이것은 ‘자신의 분수에 넘치도록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없이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절제하지 못하는 소유욕’‘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혹은 자신에게 적법하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 하려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 타자의 권리를 빼앗고 희생시키기 위해 폭력까지도 행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사적인 무한한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기꺼이 남을 희생시킬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플라톤은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이데아 세계에서 멀어지고 짝퉁의 세계로 가게 된다고 봅니다. ‘플레오넥시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데아의 세계를 상기(anamnesis, 想起)해야 합니다. 레테강을 다시 건너고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가야 합니다.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탐욕을 단순히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윤리적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탐욕이 정의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정의란 모든 행위에 플레오넥시아를 경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람마다 이 플레오넥시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회적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다른 동물과 달리 탐욕을 갖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만악의 뿌리이며 근원입니다. 플레오넥시아는 저주받은 소유욕으로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악행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짓밟고자 하는 플레오넥시아가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기에, 도둑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남의 순결도 짓밟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부정부패도 저지르고, 역사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느냐?”는 말을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 “플레오넥시아”가 있기에, 인간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권리와 인간 전체에 대한 배려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한 토대인 공교육의 가장 큰 목표를 탐욕의 절제에 두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분쟁과 갈등 전쟁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상국가는 전사와 군주는 사유재산을 갖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게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플레오넥시아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교육과 윤리적인 수양이 필요한데, 특별히 과유불급의 평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서도 탐욕은 ‘더 많은 물질적인 부, 소유물,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많이 가진 것’의 문제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끝없이 더 많이 가지고 그 소유를 자신만을 위해 비축하려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성경은 부유함 그 자체를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유함을 축복하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가진 것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선용하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더 가지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맛있는 음식, 더 고급 차, 더 똘똘한 집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을려고 하는 일입니다.

성서의 이 부자는 이미 재산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려고 곳간을 헐어내고 더 큰 곳간을 짓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할 것입니다(루카 12,18-19). 탐욕은 끝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탐욕은 끝을 모릅니다. 욕망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재물을 점차 늘려가는 일이 삶의 모든 것이 돼 버렸습니다. 탐욕은 재물을 계속 좀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끝을 모릅니다.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명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늘 더(more)를 바라는 것일까?

르네 지라르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 안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모방적 욕망이라는 이론을 중심으로 풀어나갑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탐욕은 필요에 기인하기보다 욕망에서 비롯합니다. 그는 필요(besoin)와 결핍(manque)을 구별합니다. 필요는 최소한의 수요를 다 채우지 못하는 부족함에서 나옵니다. 모방적 욕망은 필요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픈 데 먹을 것이 부족하면서 생기는 욕망입니다. 먹을 것이 남을 정도로 생기면 거기에서 멈추어야 하겠지만 욕망은 더 확대됩니다. 그런데 탐욕은 정량적으로 부족 하지 않는 데도 생겨나는 심리적, 사회적, 형이상학적 욕구(demande)에서 발생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경우 탐욕은 타자와의 비교와 경쟁에서 발생합니다. 과거에는 욕망(Desir)의 주체는 일대일 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내가 좋은 가방을 갖고 싶으면 그것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 이상을 욕망합니다. 사용가치를 뛰어넘는 비싼 명풍 가방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나의 필요와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욕망과 시선을 감안합니다. 여기에서 속물주의가 발생합니다. 속물주의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를 갖지 못하고,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비판의식 없이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환원하여 갈망하고 표출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방적 욕망에서 경쟁과 비교가 생기고,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자리가 탐욕의 출발점이 됩니다. 타자와의 비교는 비애를 낳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딴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기 때문에 음식, 쾌락, 재물이 충분히 주어져도 즐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해탐(解貪) 즉 탐욕을 풀기 위해서는 내 안에 모방적 탐욕이 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탐욕에 맞서 싸우기보다 내가 무엇에 필요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는가를 사유해야 합니다. 사유하지 않고 탐하면 나중에는 탐하는 대로 사유하게 됩니다. 탐욕은 일을 완성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욕구는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그 방향성과 그 정도에 따라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기도하고 추한 삶으로 전락하게 하기도 합니다.

영성신학적인 입장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보면 탐욕은 경계(儆戒)의 대상이지 경시(輕視)의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재물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닌 것처럼 재물에 대한 욕망 자체도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탐욕은 피조물 안에 있는 결핍(缺乏, Manque)을 채우려는 영혼의 전략이며 역동적인 힘입니다. 영혼은 자기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고 완성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자기 안에 더 많이 집어넣고자 합니다. 탐욕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 결국 지기 마련입니다. 모방적 애착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욕망의 에너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옳은 방향으로 향하는 욕망은 삶의 약동(l’élan vitale)에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땅의 것이 아니라 저 위에 있는 것을 향해 욕망의 에너지를 돌리는 것이 새 인간을 입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회개입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소우주이고 물질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에 물들어 있고 피조물의 한계를 갖고 있기에, 인간의 욕망은 자칫 빗나갈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결코 다 채워질 수 없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인간은 물질보다 더 크기 때문에 물질로는 인간의 결핍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유한한 물질이 무한한 인간 영혼의 욕구를 다 채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하느님 안에 푹 잠길 때 채워집니다. 깨진 장독에 물을 부어서 채울 수 없습니다. 장독이 연못의 물속에 푹 잠길 때 물로 가득 채워집니다. 따라서, 인간의 결핍과 공허감을 채우는 데는 물질적인 것 외의 다른 전략이 필요하고, 그것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만이 인간 영혼의 끝없는 갈증과 갈망을 해갈할 수 있습니다. 소유보다 영원한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해탐하여 빗나가고 일그러진 탐욕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교회 전통은 탐욕의 문제를 어떻게 대응하라고 가르칩니까?

중세기에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대죄의 악습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과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토마스 성인은 하나의 악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악행과 반대 되는 덕행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교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겸손의 덕을 닦아야 하고 나태의 죄에서 벗어나려면 부지런함의 덕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탐욕과는 반대의 축에 있는 자선을 평소에 많이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Diego de Pantoja, 1571~1618, 龐迪我)신부는 수양서 ‘칠극(七克)’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마태오 리치 신부와 함께 베이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칠극은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접촉하던 시기인 1614년 북경에서 출판된 책으로서 한문으로 쓰여진 400면의 수양서(修養書)입니다. 칠극은 칠죄종을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을 주제로 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유교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판토하 신부는 칠극에서 탐욕과 관련하여 해탐(解貪)을 주장합니다. 즉 탐욕의 반대편에 있는 자비와 자선의 덕을 키워 나갈 때 인간의 욕심을 점진적으로 해체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한꺼번에 해탐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수양으로 자선의 덕을 닦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탐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자꾸 자선을 베풀다 보면 어느 순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지난 7월 13일 안동교구 우곡 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성지 이름을 칠극 성지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3)

오늘 독서의 말씀을 묵상해 볼 때,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땅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땅의 시각으로 보면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눈은 이 땅에 초점이 맞아 있었고, 땅이든 하늘이든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관리자입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곳간, 내 곡식, 내 재산, 내 영혼의 주인은 나 자신 에고가 아니라 나를 만들어 주신 창조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고, 이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사실 우리의 생명이 자기의 통제권 밖인 저 위에 있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권고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탐욕의 사람이며 표의 문자인 한자의 ‘貪’(탐)이 의미하듯 지금 여기[今] 갖출 재화[貝]에 사로잡혀 그것만 영원히 갖겠다고 욕망하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나이가 들어 낡은 인간이 될수록 재테크와 노후 준비에 관심이 많아집니다. 저장 본능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습니다. 들의 꽃과 공중의 새들은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지만 인간은 저장 DNA를 갖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하면 인간은 탐욕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우정도 사랑도 돈으로써 실현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돈의 축적에만 몰두하다가 진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우리의 우매함을 질책합니다. 재물과 돈을 축적하여 통장을 채워둔 후 먹고 마시고 즐기려는 순간 불현듯 찾아와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드는 것은 결국 죽음입니다. 죽음은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과 모아둔 돈을 다 제로로 돌려놓습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참으로 죽을 때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지상의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땅의 것을 쫓는 행위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요 위의 있는 것을 추구하는 행위는 소실대탐(小失大貪)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워지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답게 살라고 합니다. 새 인간으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욕망의 충족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칠죄종에 정주(settlement, 定住)하지 않고 그중 특별히 탐욕의 우상숭배를 해체(解體, Déconstruction)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탐욕에 사로잡힌 옛 인간을 버리고 창조주의 모상에 따라 자선과 나눔의 대지로 끊임없이 탈주하여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자본의 탐욕을 죽이고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탈영토화하는 사람입니다. 바보 같은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탐욕과 그 행실을 함께 벗어 버리고 해탐(解貪, 탐욕을 풀다)의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해탐이란 수덕자(修德者)이며 실학자인 농은(隴隱) 홍유한이 실천하고 선교사 판토하가 강조한 7극(克)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빗나간 탐욕에서 해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탐욕을 해체하는 수덕행위입니다. 탐욕의 옛 인간에서 벗어나 해탐의 새 인간을 입어 나가는 과정 전체가 참된 해방 일지의 알갱이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만약 오늘 밤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 이 세상을 떠나 저승으로 가게 된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요? 내 통장에 돈이 얼마 더 있고 덜 있고 하는 그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자녀에게 혹은 손자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많이 없다고 해서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일까요?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각자 나름대로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의 목록 즉 버킷 리스트를 다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한 번 만들어 보는 것도 삶의 의미와 재미를 위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버킷 리스트 당장 떠오르는 것들,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이것의 숫자도 탐욕 때문에 자꾸 늘어나지만 ‘천천히(Doucement)’가 트렌드입니다. 술처럼 묵힐수록 그리고 케이크처럼 식힐수록 더 맛있겠지요!

제주에서 객주리회와 지리탕 먹기, 우크라이나 전후 봉사활동, 라스팔마스에서 문어 튀김과 빠에아 먹고 해수욕하기, 서울 서래 마을 레스토랑에서 샤또 브리앙 스테이크 먹기, 주일 강론 블로그 완성하기, 기초신학 책 쓰기,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순례, 프랑스 파리 살이, 루르드 성지순례, 몽또방 순례, 파리 외방 전교회 한 달 살이, 프랑스 리옹의 중국 식당 ‘뻬깽(북경의 불어식 발음)’에서 리 깡또네와 북경오리 먹기, 평양에서 북카페 하기, 한라산 오름 오르기, 전 모 선생님 등 보고 싶은 사람들과 옛날 지인 만나 저녁 먹기, 동해에서 상어회 먹기, 요리 배우기, 채소 가꾸기, 우리나라 성지 순례 도장 깨기, 안동 우곡성지 순례, 나이애가라 폭포 가서 인생 사진 찍기, 몽블랑에서 케이블카 타기, 겨울철 오세아니아로 도망가기 ...... 등

결국 이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겠지요.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돈은 천국 외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행권이며 행복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무덤에 세우는 묘비에 돈을 새겨 넣게 유언하는 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이루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돈에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행복한 한 주일 되시고, 어리석은 부자들이 걷는 죽음의 대중 행렬(行列)에서 탈주하는 해방의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인색한 한 주간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소실대탐(小失大貪)하는 부유한 한 주간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유한한 인생에서 무엇을 축적하고 무엇을 소비하고 나누어야 할지는 각자의 마음입니다. 재물을 내 창고에 쌓는 일은 부(副)라고 하지만 타인의 마음에 쌓으면 덕(德)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덕이 쌓이면 복(福)이 됩니다. 바로 이런 개념으로 사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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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7월 31일
  | 07.27
513 12.8%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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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복음에 나오는 부유한 사람은 유례없는 풍년으로 곡식창고를 더 늘리고 부를 축적합니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남은 여생 골프나 치고, 낚시나 하면서 편하게 보내야겠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누구 차지가 될까요? 어쩌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쪽에서 가족들이 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빈손이 돼 땅 속에 묻히게 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게 되는데요. 우리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언젠가 빈손으로 떠나게 될 텐데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움켜쥐고 욕심을 내고 분주하게 살다 보면,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일은 미루고 또 미루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신학교 다닐 때 없는 게 조금 있었습니다. 악기를 배웠는데 악기가 없어서 학교에서 대여해 주는 악기를 2~3명이 함께 썼었습니다. 같이 쓰다 보니 연습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연습할 수 없고 악기를 찾으러 다니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악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또 컴퓨터가 없어서 리포트나 논문을 써야 할 때 다른 건물에 있는 컴퓨터방까지 가서 숙제를 해야 했는데요.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느껴질 때마다 ‘타자를 칠 수 있는 컴퓨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디지털 카메라를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는 ‘나도 사진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부가 돼서 월급을 받다 보니 예전에 ‘하나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악기도 하나 있고, 카메라도 하나 있고, 컴퓨터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 갖춘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하나 있었으면’이 아니라, ‘더 좋은 게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악기도 더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고, 사진을 찍다 보면 ‘더 좋은 렌즈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컴퓨터도 ‘더 빠르고 조용했으면’ 하는 욕심들이 자꾸 생깁니다.

이렇게 더 가지고 싶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은데요. 가지고 싶은 욕심뿐만 아니라, 위를 향한 욕구도 계속됩니다.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다는 느낌이 들거나 신자분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신학생일 때는 ‘신부가 되면 사람들이 내 결정을 존중해 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라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또 보좌일 때는 ‘주임이 되면 내 결정을 존중해 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하는 마음들이 생길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욕심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미끼를 던집니다. ‘더 가지면 편안할 거야. 더 높아지면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로 저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목소리는 다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하느님은 “욕심에 따라 사는 삶은 부질없다. 다 차지하고 높아진다고 해도 결국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을 것이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라. 그것이 영원히 남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형제이고, 친척이고, 같은 왕이고, 같은 제자였지만 구체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아벨과 카인은 둘 다 아담의 아들이었지만, 아벨은 하느님을 택하고, 카인은 살인을 택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은 둘 다 가나안의 순례자였는데, 그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선택하지만, 롯은 소돔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다윗과 사울 왕. 그들 모두 왕이었지만, 다윗은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울은 권력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유다, 둘 다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배반한 이후에 베드로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유다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는데요. 그 부분을 예수님께서 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태오복음에 보면 다음의 선택들이 주어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넓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재물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양에 속할 수도 있고, 염소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마태오복음 25장 4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하느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과 결과가 누구에게 달려 있다는 겁니까?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거죠. 그동안의 삶은 불공평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불평을 잠재울 수 있는 선물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영원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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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2022년 7월 31일 가톨릭신문에서
  | 07.30
513 12.8%
제1독서(코헬 1,2; 2,21-23)는
믿음 안에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코헬렛은 온통 허무라는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기로 작정한 사람인지 처음과 마지막에 “모든 것이 허무로다!”(1,2; 12,8)라고 합니다. 자기 실력과 재산과 노동을 많이 투자했지만 때로는 정작 투자하고 노력한 사람은 아무런 결실이 없고, 오히려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이익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정말 허무하고, 우울합니다. 그러나 경험과 지혜가 많았던 코헬렛이 말하는 허무는 비어있고 구멍이 나있음, 그리고 금방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 좋은 것이 없고(3,12), 자기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으며(3,22ㄱ), “태양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8,15)고 하는 이들을 향해 “죽은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도록 누가 그를 이끌어 줄 수 있겠느냐?”(3,22)고 하면서 이들에게 구원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쩌면 코헬렛도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은 나머지 인간적인 모든 것이 환상이니 거기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듯합니다. 아니,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깨달은 바가 컸기 때문에, 그리고 세속적이며 인간적인 것은 허무하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12,13-14)고 합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덧없음을 받아들이면서 모두 허무인 듯한 현실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복음(루카 12,13-21)은
하느님 앞에서의 부유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수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뵙자마자 상속재산의 분배를 위한 중개를 요청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맏아들은 다른 아들들이 받을 몫의 두 배를 상속받았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율법학자들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 요청하자 즉시 “사람아” 하시면서 당신은 재산분할을 도와주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상속해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융통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면 형제들은 갈라지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서로 대화를 통해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여 있는 사람들(제자들)에게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분쟁의 밑바닥에는 탐욕이 깔려있기 때문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분열에 개입하지 않으실 것입니다(12,51-5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돈벌이에는 성공하고 참된 인생에서는 실패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들려주시면서 인생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으며”(시편 90,5), “저울판 위에 올려놓아도 숨결보다 가볍다.”(시편 62,11)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옥한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사람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12,33-34)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라자로 같은 가난한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16,19-31) 같습니다. 그렇게 넉넉하다면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풍요롭게 잘 살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삶의 질은 반드시 물질적 풍요로움에 달려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나날들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부유함이 삶의 시간을 늘려준다 할지라도 생명력이 없을 것입니다. 재화가 죽을 운명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음의 시간에 이르면 부자인지 가난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탐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때로는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고, 재물도 많이 쌓을 수 있을 것이며, 화려한 고급 저택에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게 허무함을 느낄 것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부유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재화와 재능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집회 29,8-13). 그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9,25)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제2독서(콜로 3,1-5.9-11)는
열 가지 악습과 덕목에서 첫째와 둘째, 넷째를 말합니다.

바오로는 열 가지 윤리적 도리(1-2, 5, 8, 9, 12, 13, 14, 15, 16, 17)를 말하면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자신의 삶이 어떤지 돌아보라고 합니다. 첫째는 세례를 통하여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날에 모두 드러날 것이므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살라고 합니다. “현세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1코린 2,14)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으므로 탐욕을 버리고 하늘에 재물을 쌓기 위해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탐욕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으므로 하느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니 신앙생활에 해로운 인간적 욕망을 죽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거짓말은 이웃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저지르는 악습이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생각과 행실에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참 지식에 다다르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참 지식에 이른 사람은 매일의 삶에서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저 위에 있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사는지 스스로 잘 따져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격자가 되는 것입니다(2코린 13,5).

오늘 말씀들은 세례를 받은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구원이라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하느님 안에서 깨달으라고 초대합니다. 세속적인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면서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온통 허무로 느껴지는 삶일지라도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영적이며 신앙적인 것을 먼저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실천하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 인간의 품격을 높여주는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허무함을 느낄 것이고, 결국은 자기 목숨을 쉽게 포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므로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탐욕에 빠져들 때 하느님은 물론 이웃도 잊어버리게 되며, 의로움과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과 이웃에게서 얻는 기쁨을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고 참된 기쁨의 원천이 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삶의 궁극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기적으로 재화만 추구하려는 것은 때로는 자신은 물론 이웃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같은 탐욕을 위해 애쓰는 만큼 그의 모든 노력은 자신에게 근심과 걱정만 남길 것이며, 낮이나 밤이나 그의 마음은 애가 탈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엄청난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한편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이사 22,13; 1코린 15,32)라는 방식의 삶도 역시 우리가 믿고 바라는 참된 행복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적 재화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삶의 궁극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며, 삶의 여유가 있는 만큼 가난한 이웃도 살피라는 것입니다.

영적 탐욕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기도의 도구인 성물에 대한 탐욕은 물론 자신이 열심한 사람이라고 드러내고 싶은 영적 탐욕 때문에 하루에 같은 지향의 미사에서 성체를 여러 번 모시는 것도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화답송을 읽고 되새기는 것으로 저녁기도를 바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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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7월 31일
  | 07.31
513 12.8%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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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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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한 말만 보면, 그 사람의 형이 유산을 가로챈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어느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라,
양쪽 모두 유산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고서,
서로 다투는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는
말씀은, 중재를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형과 동생이 모두 잘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속 일을 해결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들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세속 일’이고,
‘죽은 자들의 죽은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하려고 하셨다면
아마도 “둘 다 회개하고, 화해하여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한쪽만 회개하고 욕심을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러면 회개한 쪽이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보겠지만, 영적으로는 크게 앞서게 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내가 ‘내 몫’을 차지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이기심’으로 살면서, 세속의 재물을 차지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옳지 않은 일이고, ‘헛된 일’입니다.

(세속의 기준으로 ‘정당한 것’과 하느님의 기준으로 ‘옳은 것’은 다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6ㄴ-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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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떤 부유한 사람’은,
원래 부자였는데, 농사가 잘 되어서 더 큰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큰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부자가 된 후에 드러나는 그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그의 고민은 자기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새 곳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바로 그런 사람들을 겨냥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오 6,19-20).”
그 부자는 자기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싫어하고,
빼앗기는 것은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어떻든 그는 ‘더 크고 안전한 곳간’을 새로 짓는 것으로 고민을 해결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아가는 일만 생각했고,
하느님께서 되찾아 가신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라는 그의 말은,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는 말은, 세 번째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쾌락’만 찾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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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되찾아 가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죽음’은 목숨을 잃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돌려드릴 때 ‘좋은 것’으로 돌려드릴 것인지,
나쁘게 망가진 것으로 돌려드릴 것인지, 그것은 각자에게 맡겨진 숙제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이 아니라 ‘오늘 밤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는 말씀은,
“아무도 그것을 차지하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에게만 소유권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웃에게 인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집회서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애를 쓰고 인색하게 굴어서 부유해지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돌아갈 몫은
이러하다. 그가 ‘나는 휴식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나의 재산으로 먹고
즐기리라.’ 하지만, 그는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죽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한다(집회서 11,18-19).”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14).”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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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7월 31일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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