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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62
작성일 | 22.08.05
늘의 주제는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은 하느님께서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준비하시고 실현시키시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서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1독서 지혜 18,6-9
하느님의 약속을 분명히 깨달았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의 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수백 년 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해, 역사를 통해 완성돼 나가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직 도래하여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다.

루가 복음 12,32-48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 역시 지난 주일복음과 같이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고 이 세상의 재물에다 자신의 보증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다(32-34절). 이렇게 재물과 재화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내용은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는 ‘집주인’을 깨어 기다린다는 내용(36절)과 연결되고 있다. 즉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현실적으로든 미래에 있어서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상의 재물로부터의 자유보다도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에”(40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순간에 나타나게 될지 모르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자유롭고’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35-36절).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여행이나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즉 움직이기에 편하도록 하는 것이다. ‘등불을 켜놓는 것’은 한 밤중에 갑자기 주인이 돌아올 때 필요하다. 종들의 이러한 태도는 겁이 난다든지, 염려스러워서 취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그 종들의 시중을 들어주리라는 사실이 입증하듯이 기쁨에 차서 취하는 태도이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예수님은 특히 수난사에서 ‘야훼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40절)는 이 권고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 빛에 기쁘게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어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다.

충실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1-48절).

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관리인처럼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진정한 ‘주인’에 대한 기다림이 이미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으로 항상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내용이 그들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 자체가 지배와 권세의 도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제2독서 : 히브리서 11,1-2.8-19:
아브라함의 신앙

제2독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선조들의 믿음은 그 ‘약속 받은 땅’이 장차 얻게 될 천상 고향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림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 그분을 우리가 항상 알아 모실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항구한 신앙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과 같이 우리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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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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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계속 오르시는 여정을 배경으로 한다. 예루살렘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 예수님의 출애굽, 예수님의 죽음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종교계 지도자들의 적개심은 높아만 갔고, 자기들이 기대한 방식의 메시아로서 행적을 보이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일반 군중의 호감도 날이 갈수록 점점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감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잘 아신다. 군중은 점점 실망을 더 해가고, 예수님의 삶과 사명은 실패의 윤곽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1.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루카 12,32-48)

이러한 맥락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향후 2천 년을 두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 거듭거듭 감동하며, 항구한 믿음으로 묵상해온 몇 마디를 말씀하신다. 먼저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거창하고도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마치 판잣집 같은 스무 명 남짓한 당신의 공동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몇몇 여성들,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안해하고 간혹 예수님의 눈치만 보는 것 같은 이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어조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사명에는 가당치도 않고, 더구나 온 인류를 위한 사명에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조그만 공동체를 향해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겉으로 보기에 약하기 그지없는 소수,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지원이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영향력은 고사하고 중요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무력하기 짝이 없이 보이는 이들, 거듭 꾸중을 받아야만 하고 교정을 받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사랑으로 이 작은 공동체에 “나라”를 “기꺼이 주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 구원의 생명, 그 누구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작은 양 떼”라는 이미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걸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이미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결코 버리지 못할 고유한 특성임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종교계라는 거대함과 세상이라는 현실에 비겨 상대적으로 진정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제 갓 태어나 걸음마를 하는 것 같은 당신의 작은 공동체를 보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기꺼이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 그 나라에 우리가 참여하고야 말 것임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뻐하려면 우리는 참으로 그분께서 실패하시는 듯이 보이고 죽으실 때까지도 그분을 따르는 그분의 “작은 양 떼”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 회개를 바라는 죄인들, 자신을 믿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어 다가올 예수님의 나라 안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말씀이 당연히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루카 3,8 참조. 마태 3,9)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저 인간적인 관점에서 소속감을 표현하는 빈말일 때가 많다. :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 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라오.(파울로 코엘료)』

2.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2-4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루카 12,33-34) 하신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가진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것을 다른 이와 공유하고 나누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작은 양 떼”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자신을 벗고 나누는 것이다. “가진 것”, 곧 돈과 부동산과 재화 등을 그저 경멸하고 초탈하며 도외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와 단순하게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다. 물질적인 부富뿐만 아니고 인간 모두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가진 것”이 있다. 힘이나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을 비롯하여 개인이 받은 남다른 소양이나 재능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을 형제자매와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두 주인”(루카 16,13 마태 6,24)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있고, “가진 것”에 사로잡히는 유혹과 “가진 것”에 매달리는 믿음과 희망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다.

이는 비록 단순하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생을 통해 결정적인 “회개”가 동반되어야만 하며, 한번 회개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내 인생 안에서, 새롭게 해야만 하는 회개의 과정이다. 돈과 재화를 비롯한 우리가 “가진 것”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동반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자로서의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가진 것을 공유하며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목상의 필요라는 이유로, 또 예측할 수 있는 공동체의 삶을 슬기롭게 영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우리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우리가 가진 재화가 점점 축적되어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굴레들의 포로로 전락하여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작은 양 떼”인지를 스스로 묻고, 과감하게 회개해야만 하는 순간을 또 맞는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하시면서 “주인”을 섬기기 위해 기다리는 “종”의 준비된 복장과 태도로 깨어 있으라 하신다. 그런 이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하신 대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주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에서 유일한 보물로 알아모실 수만 있다면 그런 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이들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ㄴ-38)

예수님께서는 다른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영적인 몽유병이나 졸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눈을 뜨고 있기란 참 어렵다. 하루의 일과에서 오는 피로와 고된 봉사에서 오는 졸음, 그리고 어제와 같은 또 다른 하루에 불과하다는 따분함으로 맞는 날들의 일상에서 오는 단조로움, 이 모든 것들이 ‘깨어 있음’에 대한 유혹이며 공격으로서 이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책임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뇌의 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세 제자에게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마태 26,41) 하고 말씀하신 바 있다.

모든 제자와 종들이 이렇게 깨어 있어야 마땅하지만, 유달리 다른 제자나 종들보다 더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할 책임이 있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의 “작은 양 떼”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로서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할 숙제를 받았지만,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진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베드로에게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하고 거듭하여 물으셨으며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제자들로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동등함과 형제애를 더욱 실현하기 위해 더욱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이를 구분하신다.

3. “불충실한 자들…많이 주신 사람…많이 맡기신 사람” (루카 12,32-48)

공동체 안에는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 oikonomos(=the manager of a household)’라는 분명한 직무, 곧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하고 하느님의 지혜와 말씀의 양식을 제공하도록 하는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있다. 이탈리아 말로 minestra(수프)를 제공하는 이가 ministro(부서 관리 책임자)인 것처럼 오이코노모스는 형제들이 살게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형제를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보살피는 직무로서 종의 봉사를 수행하기에 믿을만하고(πιστός, pistós=faithful, reliable 참조. 마태 24,45), 아주 영리하고(참조. 루카 16,8) 슬기로워야(φρόνιμος, phrónimos=practically wise, sensible 참조. 마태 7,24) 한다.

그러나 이 종이 다른 종인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그러한 종은 자신을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두는 사람이고, 즉 자기 위주로 살고 다른 이의 성장을 도모하지 않은 이이며, 형제자매들과 “가진 것”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만 사는 이, 마음에 독재나 전제주의적인 요소를 품어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만으로 주변을 결성하는 이, 다른 형제나 자매가 자기 권위나 권력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 공동체의 상호 관계를 인간적이고도 자비스러운 관계로 형성하지 못하는 이, 그저 자기 멋에 겨워 살려고만 하는 이, 자기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없이 다른 이의 결점만 들춰내면서 주어진 권위로 형제나 자매에게 낯을 붉히며 괜스레 목에 핏대나 세우는 사람… 이다.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시는 주님께서는 그 종을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의해야 한다. 더 많은 은총을 받은 이, 더욱 영리한 이, 더욱 재능을 많이 받은 이는 주님의 공동체에서 져야 하는 책임도 더 클 것이며 더욱 많은 요구를 받게 될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ㄴ) 우리의 죽음 이후에 장차 그분 앞에 서게 될 때 하느님의 심판은 그저 우리가 행한 내용뿐만 아니라 양심과 책임의 정도, 그리고 각자에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던 은총의 사용에 관한 내용에 달려있다. 모든 그리스도인, 특별히 그들의 인도자요 지도자라는 이들은 종말론적인 지평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기어이 오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깨어 기다려야만 한다. 아멘!

***

…우리 모두 두려움으로 우리 인생을 시작했고 평생 그렇게 매일 매일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두려움의 힘과 세력이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될 때가 많다. 내 안의 두려움이 있고, 내 주변의 두려움이 있다. 어떤 두려움은 이미 피부에 와 닿아 있고, 어떤 두려움은 아직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두려움은 빤히 내 눈앞에 와 드러나 있고, 어떤 두려움은 은밀하여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다. 어떤 두려움은 나 자신 안에 있고, 어떤 두려움은 타인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이 어쩌면 온통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일정 부분 두려움과 이런저런 연관을 맺고 있다. 어떨 때는 날 지배하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인 것 같다. 두려움은 나를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며, 거친 행동으로 내몰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과 실망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급기야는 죽음으로까지 나를 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려움에 찬 아이들, 학생들, 환자들, 공무원들, 노동자들, 부모들… 이렇게 두려움에 가득 차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려움의 포로요 노예이다. 참으로 두려움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상인 것만 같다. 만일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만일 이것이 이렇게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걱정스러운 의문과 두려움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결국 “만일”과 “어떻게”의 포로들이고 노예인 셈이다.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온통 두려움의 논리와 두려움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대부분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전제와 가설 아래 기득권, 영향력, 힘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려는 술책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걱정이 앞서고, 신경질을 부리고, 급기야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책이라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서로 죽음과 파멸로 치닫게도 된다.

두려움의 끈을 끊어야 한다. 누군가가 두려움의 끈을 ‘먼저’ 끊기 시작해야 한다. 끊으려고 해야만 끊어지는 것이 두려움의 끈이다. 두려움의 끈을 끊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내 옆과 주변에 있는 타인을 위해서 사랑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발견한 나와 너를 넘어서, 조물주가 이 지구라는 별 위에 나와 너를 살게 한 의미들을 새기면서 영원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의미는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발견된다. 인생의 의미들은 순간의 각박함이 아닌 온 생애로, 온 삶으로만 답해지는 기나긴 숙제이다. 마음의 문, 사랑의 문, 그리고 영원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게을러서이든지, 이웃을 똑바로 보기 싫어서이든지, 각박한 세상살이에 너무 지치고 찌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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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벤지
2022년 8월 7일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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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유별나게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점점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지엄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전제 군주들과 같이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인권이 소중하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높고 무서운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언어는 과거 봉건시대나 전제 군주시대에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오늘도 하느님은 높고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언어가 복음적 체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지극히 높고 심판하실, 무서운 분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그런 분이면 오늘 복음의 말씀,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신앙 진리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생각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 삽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을 이어받았지만 독자적으로 사는 생명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반대되는, 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당신 자녀로 키우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어야 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자상한 생명을 살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다음 만나는 환상적인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무서운 분으로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입니다. 높고 무서운 사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무섭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군 지휘관이나 재판장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가르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나라 혹은 그분의 ‘함께 계심’을 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받들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자녀답게 변하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 ‘함께 계심’을 철저히 사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롭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풀어서 은혜로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해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으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재물이나 지위를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살기도 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재물과 지위는 자기 한 사람이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재물을 사용하고 지위가 요구하는 봉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아버지 앞에서 가지는 자세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바쳐야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심청전의 용왕과 같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여 이루어드리는 것이 자녀 된 사람의 기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도 부모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여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기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베푸심은 은혜로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무서워서 빌고 바치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베푸시기에 우리도 베풀고, 그분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고치고 살리기 위해 힘씁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실현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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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8.06
513 12.8%
꿈은 믿음 (πιστις 피스티스)으로
깨어(γρηγορευω, 그레고류오)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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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연중 제 19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과 연결이 잘 되어 있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부분은 지난 주일 재물에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과 잘 이어집니다. 탐욕과 탐리를 경계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인 자선을 강조합니다. 지난주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3-21)의 말씀에 이어 ‘자선을 베풀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이 말씀의 뜻은 명료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베푸는 자선이 참된 자선이고 이 자선은 탐욕을 경계하는 해탐의 추동력입니다. 지난 주일의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는 말씀도 기억합니다. 재물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자선은 단순히 자연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초자연적인 공로가 되는 덕입니다. 자선은 나의 재물이 다른 사람에게 나뉘어져서 나의 소유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로 하늘에 쌓여 보물이 됩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것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며 원래의 주인이신 분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웃에 대한 자선은 하느님께 공로를 맡기는 것과 같으며, 이것은 결코 없어지거나 떼이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과 공유하는 재물은 나의 것을 더욱 가치있게 해주고, 하느님께서는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몇 배의 이자를 붙여 되돌려주십니다. 나의 소유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자선 행위는 나의 소유를 하느님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것이 하느님의 것이 되고 하느님의 것이 내 것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솔숲 마을에 후원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솔숲 마을에 마음이 갑니다. 성당 지을 때 십자가를 봉헌한 사람은 기도할 때 십자가를 더 자주 보게 됩니다. 전에 신학생 때 정하권 몽시뇰은 ‘성당에 돈 많이 낸 사람이 성당에 더 관심을 가지고, 본당신부에게 밥 많이 사준 사람은 냉담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재물이 가 있는 그 곳에 더 관심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뜻이고 그 재물을 자선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 놓으면 우리 마음은 좀 더 자주 그리고 좀더 강하게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재물을 나의 소유로 그냥 두고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내 마음은 이웃에게도 가지 않고, 하느님께도 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라’고 권면하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도둑의 비유”, 그리고 “관리인의 비유”입니다. 모두 메시아의 재림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공통된 주제 중의 하나는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그때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첫째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밤과 새벽 사이에 언제나 올 수 있고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둘째 도둑의 비유에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집주인은 도둑이 몇 시에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셋째 관리인의 비유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라고 험악하게 표현합니다. 주인이 오는 시간을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고 미지의 시간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된 상태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영원이 언제 시간에 침투할지 모르기에 항상 준비하면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로 보통 이해합니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종말은 결국 각자의 죽음입니다. 공심판과 사심판이 있지만 결국 자신의 죽음이 바로 나의 종말이며 세상의 종말입니다. 암환자 등과 같이 시한부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는 한 보통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언제일지 알 수 없습니다. 암환자라 하더라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도둑의 비유에서 도둑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간단한 논리이고,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잊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며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이들의 일이고 자신에게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도둑이 언제 잠입해 들어올 것인지 모르듯이 하느님이 우리를 언제 불러 가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요컨대 오늘 본문은 개인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인 즉 죽음을 잘 준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난주 복음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연관해서 읽으면 말씀이 연결되어 이해가 더 잘 됩니다. 지난주 복음에 의하면 우리의 생명은 재물에 달려있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 있으며 하느님께서 불러가시는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은 도둑과 같이 아무도 모르기에 잊고 살거나 항상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항상 준비하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세 가지 비유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항상 준비하며 살으라”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 35~36)라고 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표현은 고대 근동 사람들의 패션을 반영하는 오래된 역사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두루마기와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움직여야 할 때는 한복을 입은 우리 아낙네들처럼 옷을 걷어 올려 허리춤에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1열왕 18,46; 2열왕 4,29; 9,1; 욥기 38,3;40,7 참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할 때 그렇게 허리띠를 동여매고 서둘러 이집트를 떠났다고 나옵니다.(탈출 12,11). 이때 들이 등불을 켜들고 떠났다는 말은 없지만 예수님 시대 종들은 주인이 밤중에 올 경우 등불을 켜 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다렸습니다. 성경에 이와 비슷하게 지혜로운 처녀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명의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밝히며 신랑이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합니다(마태25,1).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전 구약성경에도 예언자들은 야훼의 날인 세상 종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였습니다(이사13,6; 에제30,3; 요엘1,15; 2,1;아모 5,18; 오바15; 스바 1,14-18).

깨어있다(watch)로 번역된 희랍어 γρηγορευω [gregoreuo ; 그레고류오]는 ‘잠에서 깨어나다’, ‘시신처럼 있다가 일어서다’, ‘병에서 회복되다’‘각성하여 주의깊게 살피다’‘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나다(γρηγορευω, gregoreuo ; 그레고류오)라는 단어는 병이나 졸림을 의지의 힘으로 노력해서 능동적으로 이겨내며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동물의 본능적인 작용과 반응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파토스와 로고스의 협업에서 발출됩니다. 사람만이 가지는 지적이며 의지적인 인간행위입니다. 성경에서 ‘깨어있음’ 은 인간의 자발성, 능동성 그리고 주체성에 의해 분출되는 역동적인 액션 (L’action)입니다.

그런데, ‘깨어있으라’라는 이 성경구절이 나오면, 우리가 달달 외우고 있는 성경말씀이 생각납니다. 공동번역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성무일도 화요일 끝기도 성경소구의 말씀입니다. 우리 입에 익숙하고 귀에 친숙합니다. 새 번역 성경의 말씀은 그 긴장감의 맛과 멋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을 인용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공동번역 I베드5, 8-9)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악마의 먹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마는 삼구(三仇, 세속, 마귀, 육신) 중의 하나인 마귀라기보다 삼구를 종합적으로 포괄하고 상징합니다.

삼구 중 세속(世俗)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일반적인 세계가 아니라,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타락한 시류나 악한 풍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기적으로 자신의 성공과 돈만을 추구하는 황금 만능주의적이고 유물론적 사조입니다. 그 바탕에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깨어 있으려면 이러한 탁류(濁流)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의 유혹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돈과 권력과 쾌락의 유혹입니다. 유혹은 의지로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난 주 복음 말씀대로 탐욕과 탐리(貪利)를 경계하고 해체해야 합니다. 권력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과 불공정으로 줄을 잘 서서 완장차고 갑질하는 이들을 부러워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삼구에서 말하는 육신은 유배살이하는 영혼의 감옥으로서의 플라톤적 의미의 육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활하리라 믿는 육신 혹은 몸이 아니고, 영혼과 이원론적으로 반대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육(肉)을 의미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육신이 가지는 사욕편정((έπιθυμία, concupiscentia, concupiscence, 邪慾偏情)을 말합니다. 사욕편정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몸의 욕망이지만 먹이를 주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요컨대 우리는 세속과 마귀와 육신의 복합체인 악마를 잘 대적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사자처럼 먹이을 찾아다니는 악마의 먹이가 됩니다.

다른 한편, ‘깨어 있음’에 관해 묵상하면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교황님께서는 ‘제6차 아시아 청소년 대회 폐막 미사’에서 우리에게 ‘깨어 있어라’고 당부(當付)하셨습니다. 그분은 ‘젊은이들이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자면서 기뻐할 수 없고, 잠자면서 춤출 수 없으며, 잠자면서 환호성을 울리 수는 없습니다’라고 일갈(一喝)하셨습니다. 축 널브러져 있으면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좌뒹굴 우뒹굴하면서 축제를 할 수 없습니다. 쿨쿨 잠자면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깨어 있는 것이 육신이 잠을 안자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줄을 놓지 마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해서 시종일관 숨이 턱에 차도록 뛰고 달리라는 말은 아니다. 아무튼 깨어 있어야 기뻐할 수도 있고 춤을 출수도 있고 환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깨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오늘 제2독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합치면 강조되는 것은 ‘깨어있는 믿음’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pistis, πίστις)의 정의를 밝힌 유명한 성경 구절로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없습니다. 그러나 맥락에 따라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제1독서는 기초신학의 신앙론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대목을 교체할 수 있는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보완재나 대체재가 거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지혜서의 말씀과 루카서의 복음은 성경 안에서 비슷한 대목을 찾아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지만 히브리서의 이 대목은 대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명제적 서술로는 유일무이한 독보적 구절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이 히브리서 말씀은 기초신학에서 매우 촘촘하게 다루어집니다.

오늘 발췌해서 듣고 읽은 히브리서 11장은 계시신앙론의 근간을 이룹니다. 특별히 제가 유학시절 프랑스 리옹 신학교에서 이 성서구절에 대해 ‘신앙론’라는 제목으로 영성강화를 들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주당 2시간 씩 매우 치밀하게 진행되는 강도 높은‘영성특강’입니다. 이것은 신부가 되겠다는 모든 신학생이 수강해야 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한국에서 이 대목은 개신교에서는 성경주석과 설교의 수준에서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대목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신학자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해 놓은 논문이나 해설서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경륜, 향주대신덕(向主對信德), 신앙의 정의(定意)와 능력, 신앙과 희망의 연관성, 본받아야 할 신앙 선조들의 삶. 특별히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특히 신앙의 힘 혹은 믿음의 힘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해 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번역은 희랍어 원본을과 비교해 볼 때 다소 애매합니다.

히브리서 11, 1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은 믿음의 위대한 힘과 큰 능력을 설명합니다. 좀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이 애매해서 제가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미리 소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실재들을 알게 해주는 수단입니다.>> 여하간 프랑스어 성경(TOB)의 번역이 ‘믿음’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번역합니다. 프랑스어 성경을 또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신앙은 희망하는 것을 이미(déjà) 소유하는 하나의 방법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실재들을 아는 수단입니다.”참고로 희랍어 원본을 나름대로 졸역(拙譯)해보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휘포스타시스)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게 해줍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문장이 합성되어 의미를 발생하고 있습니다. 나누어 보면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휘포스타시스)입니다.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게 해줍니다.

첫째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휘포스타시스) 혹은 보증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미리 소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로 번역된 ἐλπιζομένων (elpizomenōn, 엘피조메논)은 ‘희망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ἐλπίζω(엘피조)의 피동태 현재 분사형으로 “소망되어지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그 단어 자체로 볼 때는 어떤 약속이나 희망이 수동적으로 전제되지만, 믿음의 주체의 입장에서는 현재 이루어져 있지 않지만 실현되기를 바라는 희망 혹은 비전을 말합니다. 요즘 표현으로 풀어서 달리말하면 꿈, 꿈꾸는 것 혹은 꾸는 꿈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실상 혹은 보증으로 번역된 명사 ὑπόστασις(hupostasis, 휘포스타시스)는 ‘휘포’(아래, sub)와 히스테미(ἵστημι, histemi, 서게 하다, 확립하다)의 합성어로 “~아래 두다, ~아래 서다, 아래로부터 받쳐주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실체, 보증, 실상, 본체, 기초, 근거’ 등으로 번역됩니다. 한글 번역 성경에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을 간파하기쉽지 않습니다. 프랑스 리옹 가톨릭 대학교의 성서학자 장 삐에르 러모농 신부는 이 대목을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고 꿈꾸는 것을 이루게 하는 힘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꿈(les rêves, Dreams)’은 성공신화의 키워드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명언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우리 주제와 근접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꿈은 이루어진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었다면 애초에 자연이 우리를 꿈꾸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Dreams come true. Without that possibility, nature would not incite us to have them.)” 이것은 존 업다이크 John Updike의 명언입니다. 둘째 ‘What the mind of man can conceive and believe, it can achieve(꿈을 꾸고 믿는다면 이룰 수도 있다)’입니다. 이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자문이었던 나폴레옹 힐의 명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꿈은 이루는 것보다 꾸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까? 현재 꿈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고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이루었는가? 내가 아직 풀어보지도 못한 꿈의 보따리가 있지 않는가? 내가 지금 정말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나의 간절한 욕망이 있는가?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는가? 나중에 노년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 서면 대답이 궁해지고 ‘지금 이 나이에 무슨 꿈?’하는 생각이 듭니다.

꿈을 이룬다는 일이 왜 어려울까요?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꿈을 생산하고 꿈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깨어있는 믿음으로 새우잠을 자도 고랙꿈을 꾼다는 것이 언감생심이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꿈을 세우고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모든 가능성의 조건인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꿈도 드물니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를수록 나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이 되지 않는데 꿈이 이루어질리 없습니다. 이룰 꿈이 없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에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는 꿈도 없습니다. 제가 노래방 가면 부르는 18번 중에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인 ‘어떤이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거미라는 가수도 부릅니다. 그 뒷부분에 다음과 가사로 결론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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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거라 하네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혹 아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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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은 꿈을 세우고 만들고 믿는 것입니다. 꿈을 실현하기나 꿈을 이루기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추동하는 나의 날것으로서의 욕망을 바탕으로 꿈을 세우고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꿈은 나이가 든다고 내려놓아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더 움켜잡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리모델링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내려놓는 것이 꿈과 그에 관한 믿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꿈을 꿔서 실현하면 이제 꿈이 스스로 진화합니다. 꿈이 생성될 때는 점(點)이지만 인생이 성숙할수록 선(線)이 되고 면적(面積)이 되며 점점 입체(立體)가 됩니다. 꿈이 진화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때 꿈이 새로워집니다. 믿음 안에서는 의미없는 점이나 선이 없듯이 간직하기만 잘 한다면 성장하지 않는 꿈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내가 원하는 것 가장 나다운 것을 실현할 때 꿈은 건강하게 진화합니다. 가장 나다운 것이 꿈꿈의 방향입니다. 내 꿈의 주체는 오직 나이고 내 꿈의 모든 주식은 100% 나의 것이고 내가 내 꿈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딴 사람의 꿈을 꾸지 말고 나의 꿈을 꾸어야합니다. 내 친구의 꿈을 모방하지 말고 나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의 꿈, 남편의 꿈, 아내의 꿈을 꾸지 말고 내 자신의 고유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나다움’을 찾고 그것을 실현하는 진짜 나의 찐꿈을 그려 나갈 때 그 꿈이 나만의 유니크한 꿈으로 진화합니다. 나의 주체성과 나의 존엄을 살리는 나다운 꿈이 아니면 평생 짝퉁 인생을 살 뿐입니다. 나다움과 나의 존재성을 잡고 내공을 쌓다 보면 나의 고유한 꿈과 욕망도 점차 진화합니다. 이제 사제 생활 30년을 지낸 지금 나의 유일무이성을 살리는 꿈은 아무 꿈이 없는 사람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꿈이 개꿈이 되지 않고 잘 이루어지도록 그 사람을 추앙하고 응원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다른 한편, 세상에 처음부터 가슴뛰게 하는 꿈은 없습니다. 가슴 뛰기 전에 어떤 일을 만나서 하다가 보면 가슴이 뛸 때까지 일하는 것이고 꿈이 생성되고 무르익습니다. 지금 가슴이 뛰는 저의 꿈은 ‘융복합 K-강론’ 파워 블로거가 되는 것입니다. 책상에서 꿈처럼 글쓰기를 하면서 꿈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일을 꿈처럼해야지 꿈을 이루지 일을 일처럼 하면 일꾼이 될 뿐입니다. 일을 일로는 사람은 나중에 ‘속았다’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꿈처럼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희생이 억울하지 않습니다.

오늘 꿈처럼 살고 꿈을 성찰하고 꿈을 이루는 삶을 살 때 내일의 꿈도 이루어지고 성장합니다. 오늘을 꿈처럼 살지 않으면 내일 역시 오늘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어제랑 똑 같이 살면 내일도 오늘과 똑 같습니다. 꿈만 꾸며 꿈을 성공이나 완성이라고 생각하면 현재는 언제나 미래의 희생양입니다. 꿈이라 말해놓고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계속 그냥 꿈입니다. 꿈을 꾸기만해서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꾸기만 하는 꿈은 몽상(夢想)입니다. 우리는 꿈이라 쓰고 현실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꿈이라고 말하거나 써자 마자 실행하면 그것이 현실이 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는 꿈은 자기 기만용 환상이며 마약일 뿐입니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나다운 꿈을 진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은 믿음을 기초로하여 성장하고 현실화(l’actualisation)됩니다. 믿음이 없는 꿈은 이내 소모되고 맙니다. 꿈이 이내 소진되지 않고 실현되기 위해서는 거칠게 약동하는 믿음이 심장의 박동 안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바라지도 않고 꿈도 없습니다.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 같은 것들은 바래지지도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원해지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안 믿어지니까 신뢰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바라고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희망하는 행위의 실체가 믿음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대통령을 꿈꾸거나 영부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해도 그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일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기도하고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믿음과 꿈에 관한 담론은 한국 교회에 순기능적인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교회도 자기계발서의 달콤한 구호에 속아 꿈을 소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넘쳐나는 꿈에 관한 담론들 사이에서 왜 지독한 피로감을 느낄까요? ‘꿈!’ 그것은 가슴 설레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듣기만 해도 질리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다시 한번 반추해야 합니다. 꿈과 관련된 몇 가지 잘못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라는 이 구절을 두고 개신교의 일각에서는 우리가 믿기만 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설교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라고 기우제식 기도를 다그치고 강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신부들도 가끔 있습니다. ‘따뜻한 아이스 커피’는 아무리 꿈꿔도 마실 수 없습니다. 그것에서 깨몽해야 다른 가능성이 열립니다.

정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믿기만 하면 다 이루어집니까? 그렇다는 주장은 다 거짓말입니다. 정말 믿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면 대박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확증 편향적 주장은 개신교의 성장지상주의 신학 및 자본 중심의 성공주의 사회경제학과 작위적으로 합치되어 괴물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면 다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긍정의 사고로 바라고 끌어당기면 다 이루어진다’는 명제로 상호 환치되었습니다. 그 광풍은 대단하여 올림픽과 월드컵 성공신화를 쓰는데 도움이 되었고 소위 ‘삽질 정권’도 창출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꿈을 다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면 속은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도 개신교 출신이면서 소위 일류대를 나온 사람들에 의해 아류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 성공의 처세술, 행복의 행동 심리학,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긍정의 리더십 혹은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과잉 소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볍고 가벼운 풍조가 교회 안에서는‘믿음으로 바라는 기도는 다 이루어진다’라는 기복적인 주장에 날개를 달게 하였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혹세무민의 엉터리 신학입니다. 꿈이 이루지려면 꿈에서 깨야합니다. 잠꼬대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감성적이고 강박적인 믿음 마케팅에서 이탈하여야 합니다. 믿고 바란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라고 해서 곧이 그대로 하느님께서 부응해서 다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만의 성공을 바라고 끌어당기고 기도한다고 이루어지겠습니까? 한두 명의 성공신화가 탄생하게 되면 나머지 인생들은 모두 들러리나 병풍이 됩니다. 다함께 성공하고 다함께 위너가 되고 다함께 행복해지는 꿈을 꾸어야 이루어집니다. 다함께 잘되기를 바라는 경우 우리는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어야 합니다. 서로의 꿈을 성장시키는 꿈이 큰 고래꿈입니다. 씨알이 작은 사람은 작은 꿈을 꾸고 씨알이 큰 사람은 큰 꿈을 꿉니다.

적자생존의 정글 속에서 한두 명의 성공신화가 탄생하게 되면 나머지 인생들은 모두 들러리나 병풍이 됩니다. 잘하는 리더 한명을 위해 나머지 구성원은 투명인간이나 쩌리가 됩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은 불행합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잘 당긴 한 사람의 승자가 나머지를 다 루저로 만듭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1등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리더십보다 팔로워십(followership)을 먼저 실천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루저가 되기를 바라지 않기에 자기의 꿈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함께 위너가 되기를 꿈꾸어야지 그것이 실현됩니다. 약자의 꿈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습니다. 강자의 꿈을 부러워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꿈을 만들고 키워나갑니다. 아무튼 이제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며, 성장이 아니라 숙성입니다. 생존경쟁에서 일등을 향해 올라가는 등산신화가 아니라 함께 순례의 길을 가는 광야의 노마드 영성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꿈이 빼앗겨서 어두운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타자와 약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제 선교 200주년이 지났고 파티는 끝났습니다. 한국 천주교 개발 주식 회사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어있는(γρηγορευω, gregoreuo ; 그레고류오) 것입니다. 꿈의 담론이 단물빠진 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다른 한편,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휘포스타시스)>>일 뿐만 아니라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게 해줍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의 근거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대조될 수 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의 오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과 청각입니다. 청각보다 시각이 더욱 직접적입니다. 시신경은 뇌신경이 툭 튀어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은 안심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위해 인간은 현미경을 발명하고 망원경을 발명합니다. 인간의 보는 행위로 인해 학문이나 과학이 발전되어 갑니다. 눈으로 보기 위해 각종 실험을 시도합니다. 유전자 공학은 RNA DNA같은 유전자를 발견하고 그 구조를 밝혀 드러나게 합니다. 전자 및 전산 공학은 각종 정보들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부호로써 한 눈에 드러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서 훨씬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어린왕자’에서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고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잘못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해, 달, 별, 산천초목 등 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게 해줍니다.>>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Phenomena)와 이데아계로 나누는데 전자는 보이는 세계이고 후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현상계는 수시로 변화하고 생성되는 불완전한 세계로 보고 이데아계를 참된 세계이고 예지계(Noumena)로 보았습니다. 이데아계가 영구 불변의 실재인 반면 현상계는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세계입니다. 경험적이고 감성적이며 생성 소멸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만, 변화하지 않는 참된 세계인 이데아계는 감성에 의해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며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피지카 즉 과학은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와 관련된 질문과 답을 찾으려 하는 반면, 메타피지카 즉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짝통이고 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는 지식은 참다운 지식이 아니고 그것을 능가하는 초월적 예지계 즉 신의 영역에 대해 아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신적 영역에 속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인간의 능력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감옥에 갇힌 영혼은 참된 진리를 감각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직관합니다. 변화무쌍한 이 세상의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닙니다. 있다가 없어지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참된 존재나 진리가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영원 불변하는 객관적 실재가 본질이며 존재자체이고 참된 진리입니다.

해석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눈으로 모든 세계를 보고자 하지만 그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굴절해서 보는 경우도 있고 인간이 두 눈이 전혀 보지 못하는 세계도 있으며 희미하게만 볼 수 있는 세계도 있습니다. 물컵 속에 있는 젓가락을 보면 곧은 젓가락도 굽어져 보이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 속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시각은 세 가지 한계를 지닙니다. 먼저 공간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에서 밖에 보지 못합니다. 여기 저기 같은 장소에서 한꺼번에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각은 시간의 한계를 지닙니다. 지금 보거나 나중에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나중 저기에서 동시에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각은 범위의 한계를 지닙니다. 인간이 무엇을 볼 때는 시야를 가질 수 밖에 없고 하나의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에 관해서는 볼 수 없습니다.

필립보 사도는 예수님과의 최후 만찬에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한 제자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중에서 제1위이신 성부는 우리 인간의 시야를 벗어나 계신 분입니다. 인간이 성부를 볼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가진 시야의 한계때문이기도 하고 그분의 너무나 크신 위대함 때문입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인간은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인간의 눈은 볼 수 있는 것만 봅니다. 하지만 성부는 시간과 공간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알고 바라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플라톤의 전통에 따라 독사(δόξα, doxa)와 에피스테메(επιστήμη, episteme)를 구별하였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현상계(Phenomena)에 관한 지식을 독사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계 혹은 예지계에 관한 지혜를 에피스테메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사가 현상계에 관한 불확실한 지식에 불과한 속견, 억견, 억설, 억측 등을 의미하는 반면, 에피스테메는 비가시적인 예지계를 직관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절대 확실한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비가시적인 예지계(Noumena)를 믿고 상기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 인간에게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믿음의 영역은 인간의 자연적인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절대 영역입니다.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영혼도 하늘나라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고 꿈을 꾸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도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합니다. 신앙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의 특징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특징은 영원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후서 4장 18절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믿음의 능력을 통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잠재계를 보고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시각이 명증성과 확실성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비해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확인하고 검증해서 얻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지식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확인하거나 검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알게 해줍니다. 신앙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씀과 증언을 듣고 알고 이해하고 믿는 행위입니다. 믿음은 이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신앙은 합리적 의심을 동반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성적으로 문득 문득 회의가 오거나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회개이고 우리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일도 없는 확실한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목표와 비전에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게 해주는 힘이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미래지향적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으며 믿음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바라고 끌어당기고 실현하는 능동적인 힘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딴 데 정신을 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물이 고이지 않고 흐르듯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유목하고 새로워집니다. 무관심, 나태, 무지, 안일,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기도하고, 주님의 일에 힘씁니다.

그런데 현재 내가 바라는 것들은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 소망하고 희망하는 것, 꿈과 비전은 지금 여기 현실(l’actuel)에는 없고 하느님의 세계에 약속의 형태로 잠재(le virtuel)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 때 믿음의 순도(純度)와 욕망의 강도(强度)에 따라 어느 순간 약속의 실현이 꿈의 선물처럼 실현됩니다. 믿음의 힘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체를 이루게 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실현합니다. 자지 않고 믿음으로 깨어 있을 때 우리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곳간에 있는 보물들을 이 지상으로 가져오게 합니다. 깨어있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형식으로 우리게게 가져옵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고 꿈을 꾸는 것들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질 들뢰즈는 꿈의 저장소를 초월적 잠재계(le Virtuel transcendantal)라고 부릅니다. 이 저장소에는 내가 바라고 희망하고 꿈꾸고 욕망하고 기도하는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이 맞춤형으로 가득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바라는 모든 실체가 다 있습니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되게 하는 힘이 믿음입니다. 즉 초월적 잠재계에 있는 바라는 것을 현실의 세계로 이끌어 내서 실재가 되게 하는 힘이 다름아닌 깨어 춤추는 믿음입니다. 초월적 잠재계에 있는 약속의 축복을 끌어 당겨오는 힘이 바로 깨어있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나의 희망을 믿을 때 미래가 열립니다. 깨어 믿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욕망과 희망을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을 약속과 희망으로 바라고 이루는 힘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현재에 요구되지만 미래지향적입니다. 믿음은 아직 현실화되어 있지 않고 잠재되어 있으면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기에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 혹은 실상으로 만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고 잠복되어 있던 희망과 꿈을 현실이 되게 합니다. 초월적 세계를 현실에 당겨오는 믿음의 힘은 그걸로 충분조건이 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조건이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우리가 꾸는 축복의 꿈이 현실이 되게 하는 힘이 바로 깨어 있는 믿음입니다.

나를 믿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믿고 또 그분의 약속이 내 꿈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믿는 한 꿈은 이루어집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해줍니다. 믿고 바라는 그 만큼 꿈이 실현됩니다. 꿈틀거리는 믿음이 없으면 어떤 것이 바래지지도 꿈이 꾸어지지도 않습니다. 내가 되어있기를 바라고 희망하는 나의 모습을 꿈꾸고 믿을 때 그것은 이루어집니다. ‘되고 싶은 나’ ‘되어있기를 꿈꾸는 나’를 상상하고 욕망하고 또 그것의 실현을 믿을 때 그것은 선물로 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일터가 꿈터이고 꿈터가 일터가 됩니다. 꿈꾼 것을 믿는 만큼 미래가 열립니다. 꿈에 대한 믿음은 지금이 아니라 한 단계 미래에서 나를 볼 수 있는 힘입니다. 꿈은 성취가 아니라 성장의 방향성입니다. 약속을 믿고 바라는 그 만큼 축복이 실현됩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며 약속입니다. 내가 내 꿈을 믿어야 꿈도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살아있는 믿음의 전형적 인물로서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희망이다. 그런데 그때 그는 그 땅에 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므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깨닫지 못하고 나갔다. 무모하리 만큼 담대한 아브라함의 행동,그것이 믿음입니다.

로마서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로마 4,18-22)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힘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의심치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는 휘포스타시스 즉 “바라는 것에 대한 실체” 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 보증과 실체는 하느님의 명령과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지방 우르에 살고 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모르는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고 하시며 ‘땅과 자손과 복의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약속과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은 길을 떠납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3)

그때 아브라함은 땅과 자손과 복에 관하여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에 관한 믿음으로 길을 떠납니다.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믿음의 실상이며 본색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하여 순종으로 나아가면 꿈 속에서나 이루어질 것 같은 소망이나 욕망도 다 이루어리라 믿었습니다. 그 실현의 조건은 하느님의 명령과 약속이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과 약속,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부합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리라 믿음은 믿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꿈과 하느님의 뜻이 끊임없이 서로 상응해나가도록 하는 힘이 바로 믿음의 실체입니다.

아브라함은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약속의 실재를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약속을 바라봅니다. 그 주님의 약속이 현실화하여 실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여기에 없고 볼 수 없는 것 즉 먼 미래의 잠재계에만 있던 실재를 이미 보았습니다. 당장 눈 앞에는 땅도 자손도 복이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끌어당겼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기 때문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게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 ,8)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일러주시는 미지의 땅으로 떠났습니다. 어떤 것은 막연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약속만 믿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어떤 약속은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의 실재가 당대에 드러난 것도 많습니다. 이 믿음으로 아브라함 함은 100세가 되어 이사악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은 선순환되어 하느님께서 이사악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던 것이 실재가 되기까지 사실 아브라함은 항상 깨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어떤 약속은 오래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땅을 약속하셨는데 600여 년이 훨씬 지난 다음에서야 그 후손들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느님 깨어 있는 믿음을 보시고 하늘의 별들보다 많고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자손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믿음과 성취의 선순환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입니다. 믿음의 실재가 실현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실재는면 후손들에게서라도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깨어있는 신앙이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다 실재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깨어있을 때 내 내면에서 절실히 바라고 욕망하는 것이 떠올려질 때 자신의 존재의 심연에서 그 실현하는 힘이 솟아오르는 창조의 은혜와 변화의 은총이 깨어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깨어있을 때 변화하고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다시 태어납니다.

깨어있는 신앙의 감성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욕망과 기대를 바로 알 수 있고 또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나 자신을 알고 내가 참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꾸는 꿈을 현실에서 이루게 하고 희망하고 바라게 합니다. 깨어 있는 믿음은 초월적 잠재계에 있는 축복을 현실의 세계로 이끌어 내서 나의 것이 되게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은 구세주의 오심을 믿음으로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고 바라는 삶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지게 하고 또한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들도 알게 해줍니다. 우리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더 큰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꿈꾸고 그분의 도우심을 끌어당기고 그분의 사랑을 스케치하고 그립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다른 필요한 것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 (πιστις 피스티스)으로 깨어(γρηγορευω, gregoreuo ; 그레고류오)’기다립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미리 소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올챙이에게서 개구리를 보는 능력이 믿음이고 , 애벌레에게서 나비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행복한 주님의 종들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깨어 기다리는 행복한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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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8월 7일
  | 08.06
513 12.8%
마라나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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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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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 돌아올지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는 그 시간을 종에게 미리 알려줄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그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과 신앙인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벗’이고(요한 15,15), ‘형제’입니다(요한 20,17).>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면 좋지 않은가? 왜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코 13,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이 말씀에서 ‘모른다.’는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이고(루카 3,17),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마음은,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보기 싫은 주인을 기다리는 것과 보고 싶은 연인을 기다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 심정을

바오로 사도는 “마라나 타!”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 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니까 빨리 오시라고 청하는 말입니다.)

3) 오시는 주님을 깨어서 기다리는 일은 ‘사랑’입니다.
(억지로 수행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기다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다립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여기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주님을 사랑해서 ‘깨어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은
‘깨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랑 없이 의무감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사제와 레위인은
누가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께서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사제와 레위인도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위선’입니다.>

4)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경우에,
기다림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은 ‘고역’이 될 뿐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정성’을 다 쏟아서 합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 일들을 대충 형식적으로 하거나 안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자기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한다면,
신앙생활에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정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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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세 가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 주님의 재림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2. 그 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
3. 대비는 ‘지금’ 해야 한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갑자기’ 오신다는 뜻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거나 훔치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준비를 잘한 사람은 그 은총을 풍성하게 받을 것이고,
반대로, 준비를 안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날과 그 시간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가 되지 않도록
너희는 평소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더라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림이 너무 이르다고 항의하거나, 아니면 너무 늦다고 항의합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라는 말은,
회개와 신앙생활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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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8월 7일
  | 08.07
513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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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지혜서 18,6-9)는
이집트로부터 탈출과 해방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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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할 것이며(창세 15,13-14), 때가 되면 그곳에서 한밤중에 탈출할 것이라고 하셨던 약속을(탈출 11,4-7) 떠올립니다. 한밤중에 탈출할 때 모세의 기적을 통하여 파라오의 군대를 물리치셨고(탈출 14,28-29),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광의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탈출한(파스카) 거룩한 백성은 행복에 젖어, 감사를 드리기 위해 항상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고, 율법을 잘 지킬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 행복에 겨워 하느님께 찬미가(탈출 15장; 시편 112-118장)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을 안고 믿음의 생활을 충실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서의 저자는 조상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하느님의 말씀들이, 비록 믿었던 조상들은 보지 못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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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루카 12,35-40)은
성실함으로 깨어 있을 때 행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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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깨어있어라”와 “준비하고 있어라”가 대칭을 이룹니다. 깨어있어야 할 이유는 주인이 도착하면 즉시 문을 열어주기 위함이고,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과 항상 준비되어 있는 종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한 종은 주인이 집에 없을 때 오히려 깨어있으면서 집을 잘 지키고, 준비된 종은 주인이 마치 도둑이 들어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은 돌발적인 상황을 대비하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면 주인은 이런 종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자기가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합니다. 깨어있고, 준비되어 있는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섬김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실 일(요한 13,4-5)을 말씀하시려고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한밤중에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긴 옷을 잘 여미고 달릴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매라고 했던(탈출 12,11) 기억을 되살려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단단히 준비하라는(허리에 띠를 띠는) 뜻으로 혼인잔치와 예복(요한 2,1-12; 마태 22,11-12)은 물론 구원의 문을 두드림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마태 7,7-8). 하느님을 섬기는(믿는) 사람은 항상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의 주인께서 문을 두드릴 때(묵시 3,20) 얼른 열어드릴 수 있어서 주인의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런 종들이 고마워서 그들을 얼른 식탁에 앉히고 주인이 오히려 섬긴다는 것은 성실하고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모두 구원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늘 깨어있고 준비되어 있는 이들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묵시 19,9)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의 식탁에 앉게 해주시고 섬기실 것입니다. 주인의 시중을 받는 종의 행복은 최상의 것으로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식탁에 봉사하는 이보다 식탁에 앉아 있는 이가 더 높은 사람이 되기(22,27) 때문입니다.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는 도둑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를 해치는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의 식탁에서 봉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에 이런 장애물들이 우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8,14)처럼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의 식탁에서 섬김을 받을 수 있기 위해 항상 깨어있고, 준비하고 있는 마리아처럼(10,38-42) 살라고 합니다. 한편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집을 뚫고 들어오는 도둑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에페 6,14)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테살로니카 1서 5,1-11 ; 베드로 1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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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히브리서 11,1-2.8-12)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면서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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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주관적인 것(보증)이지만 객관적(확증)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믿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믿음의 내용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내용에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이들의 역사(구약성경)를 보니 하느님의 말씀이 믿을 만한 것임을 증명해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에 믿었던 이들의 눈에는 그 믿음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루어주셨습니다. 믿음이 주는 보증에 대해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내용을 확증해주신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믿음으로 하란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의 내용에 희망을 걸고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주관적)은 아브라함에게는 희망을 주었고, 실현된 그 희망(객관적)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받은 땅에 와서 살면서도 이방인처럼 살았는데, 설계자이시며 건축가이신 창조주 하느님(코린토 1서 3,10 ; 히브리서 11,10)께서 아직 그들이 머물게 될 영원한 왕국을 만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믿음(현재)과 희망(미래)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후손이 하늘의 별 수만큼 많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우습게 여겼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늦은 나이에도 이사악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바로 약속해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믿고, 바라고, 또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존할 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희망)을 반드시 이루어주신다(확증)는 것을 아브라함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어주셨음을 그가 죽은 뒤에 하늘에서 반겼다고 합니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시험에도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이사악을 다시 돌려받은 것 역시 이스라엘 왕국을 갖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실현이며, 믿음으로 갖게 된 희망이 이루어질 때 얻는 행복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성실하기 때문에 늘 깨어 있는 종은 주인의 섬김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에게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듯이, 먼 길을 떠났다가 별안간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해야 하는 종처럼 예수님을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종말에 깨어 있으면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그리고 주님의 섬김을 받을 수 있도록 성실하게 준비하는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어두운 밤과도 같아서 때로는 모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비록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일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희망을 낳고, 이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그칩니다(코린토 2서 5,14). 믿음을 가진 이들은 끊임없이 믿음의 원천을 향해 움직입니다. 깨어 있고 준비된 신앙인이라면 믿음과 희망에서 솟구치는 친화력인 사랑 때문에 주님께로 다가 갈수 밖에 없습니다(로마서 8,31-39).

믿음으로 산다면 항상 깨어 있고, 늘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언제든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요한 묵시록 3,20)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즉시 맞아들이는 성실하고 준비 되어 있는 우리를 천상의 식탁에 앉히시고, 우리를 위해 봉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시편 33)처럼 주님을 섬기면서 깨어 있는 이들, 주님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준비 되어 있는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바라는 이들에게 허리에 띠를 두르고 말씀의 식탁에서 우리를 섬기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믿음의 내용에 희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로마서 10,14), 믿는 바를 바라고, 깨어있으면서 성실하게 준비한다면 우리 믿음의 내용이 실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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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8월 7일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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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연중 제24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13
799   [수도회]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  [4] 2715
798   [수원] “하느님의 기쁘신 용서와 자비”  [4] 2587
797   [인천] “아버지” 하느님  [6] 2536
796   [서울] 너무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7] 2505
795   [마산] 잃은 자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4] 2606
794   [부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8] 2685
793   [안동] 나약한 인간  [5] 2521
792   [대구] 아버지의 마음  [4] 2544
791   [의정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4] 2467
790   [군종] 죄인들 중의 가장 큰 죄인  [2]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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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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