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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72
작성일 | 22.08.12
오늘 복음 말씀은 몇 가지 부분에서 상당히 엄하다고 할 수 있는 표현을 담고 있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또한 말씀을 해설하는 이들이 이 말씀을 자기 본위의 그리스도교적인 이념에 근거하여 인위적으로 그릇되게 활용하기까지 한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담고 있는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원칙에 의하여 예수님의 다른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남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르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르시는 예루살렘을 두고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루카 13,33-34) 하신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 참조. 요한 13,1)이 이루어지는 곳,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탈출이요 출애굽이다. 루카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 높은 목소리로 강조하신 예수님의 몇 가지 고백이자 예언을 증언해 준다.

1.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루카 12,49-53)

그중 한 가지인 오늘 복음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불을 지르기” 위함이라 하신다. 이 표현이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삼켜버리는 두려움의 불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번져 사람들 안에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힘에 관한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행하심은 모든 것을 비추시며 타오르시고 따뜻하게 하는 “불”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징적인 표현과 내용을 자주 기억하셨고 사용하셨을 것이다.

외경인 토마스 복음에서도 『내가 세상에 불을 놓았고, 이제 나는 그 불이 타오를 때까지 지킨다.(10)』 하면서 복음의 말씀을 거의 똑같이 수록한다. 다른 예로서 정경의 기록으로 남지는 않지만, 오리게네스의 기억(예레미야 20,3에 관한 강론)과 토마스 복음(82) 역시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남긴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불에 삼켜지신 분, 타오르신 분, 열정으로 타오르시는 분, 하느님의 현존이 세상에 효과적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신 분’,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아가 8,6) 하는 말씀 그대로 사랑으로 활활 불타오르시는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카복음에 따를 때 “불”은 표징, 무엇보다도 성령의 표징이다. 루카는 일찍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그분의 신적神的인 현존 앞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루카 3,16)이라 증언했다고 기록하였으며,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탄생 장면을 기록하면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불꽃 모양의 혀들”이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 온 집 안을 가득 채웠으며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기록한다.(참조. 사도 2,1-11)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도 모세가 보았던 불타는 떨기 안의 하느님 현존의 “불”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지키신(참조. 탈출 13,21.22;14,24 민수 14,14 느헤 9,12.19 지혜 18,3) 그 불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게 하는”(루카 24,32) 말씀의 불이 되시고, 마침내 제자들 머리 위에 불꽃으로 내렸던 성령(참조. 사도 2장) 이시다. 그 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기도의 불이고, 영혼 안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며, 내 영혼 안에 불 질러 주시기를 간청하는 불이고, 신망애 삼덕의 세 횃불이고, 불꽃 같은 삶의 불이며, 제대 위에 타오르는 촛불이고, 조용히 감실을 지키는 성체불이다.

예수님은 한없고 깊은 갈망으로 북받쳐 오르는 당신의 열정을 토로하신다.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가져오신 그 성령의 불, 사랑의 불이 마땅히 이 세상에 타올라야만 하고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타올라야만 한다. 이것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공생활 동안 이 땅에서 그것만을 원하셨고, 오늘 이 순간에도 오직 그것만을 원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피시어 활활 타올라야 할 이 불이 오늘날 어떤 의미에서 교회라는 재(재 회灰)에 덮여 불꽃이 보이지 않는 일도 있어서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이따금 재로 덮인 불을 휘젓는 사람들이 있어서 복음의 불꽃이 개인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나 여기저기서 맹렬하게 타오르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그 불은 다시 죽은 듯이 재로 덮여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그 불은 살아 있고 뜨거운 “불”인 것은 사실이지만 확실히 타오르지는 않는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하였던 것처럼, 또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할 때 맹렬하게 성령의 불꽃이 일었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에서, 또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에도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신다.

2.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루카 12,49-53)

“불이 타올랐으면…”이라는 말씀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또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하신다. 예수님의 또 다른 고통의 갈망이요 바람이다. 장차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으실 때의 시련을 염두에 두신 수난과 죽음의 예고이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에, 세례 때 물에 잠기는 것처럼 극도의 고통이라는 물에 잠겨야 할 세례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고통 그 자체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가 아니다. 사랑에, 오직 사랑만을 아시는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고 순명하기 위해서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사람들과 정치·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 또 백성들 자체의 거부와 배척은 십자가 밑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23,47)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의인”은 못된 이들이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며 덫을 놀 것이고,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되고 유별나서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덤벼들어, 끝내 죽음을 내리자 할 것이다.(참조. 지혜 2,10-20)

우리는 지금 아직도 주님의 상징적인 언어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성사聖事와 전례에서 말하는 세례가 아니라 실제적인 피와 죽음의 세례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례를 목전에 내다보시면서 괴로워하시지만, 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당신 편에서 이 죽음과 고통을 즐기고자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면서 하느님의 뜻이기도 한 이 뜻이 어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면서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하신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50년)은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세례성사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세례의 절정이라면서 ‘여덟 번째의 세례’를 설파한다. 『첫 번째 세례는 죄에서 갈라져 나오게 하는 홍수에 의한 세례였습니다. 두 번째 세례는 구름과 바닷속에서 이루어졌는데(1코린 10,2 참조), 구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바다는 물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세례는 율법의 세례로서, 모든 부정한 사람은 물로 자기 몸과 옷을 깨끗이 씻은 다음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레위 14,8 참조) 네 번째 세례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준비시키는 요한의 세례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성령을 맞을 수 있도록 물로 그들을 정화했습니다. 다섯 번째 세례는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입니다.…죄와 옛 아담의 모든 것을 물속에 묻어버리고, 세례 주는 이를 성화하며, 율법을 완성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고, 세례받는 본보기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그리스도께서 불꽃 모양의 혀로 사도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부어주셨기에 그분의 세례를 불세례라고 합니다.…주님께서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는 것은 장차 징벌하는 불의 세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섯 번째 세례는 회개와 눈물의 세례로서, 참으로 아픈 세례입니다. 일곱 번째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세례야말로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기에 지극히 숭고하고 복된 세례입니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세례는 구원의 세례가 아닙니다. 죄와 악을 완전히 박멸하는 이 세례는 그것들이 더는 힘을 쓰지 못 하게 하고 영원히 징벌하는 세례입니다.(교부들의 성경주해-루카복음서, 분도, 2011년, 330쪽)』

3. “평화를 주러 왔다고…분열을 일으키러”(루카 12,49-53)

“불이 타오르기를”, 그리고 “당신께서 받아야 할 세례”가 어서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두 가지 바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바람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31) 하신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공동체의 분열을 바라셔서 하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서 안에 이러한 “분열”이 꼭 필요한 사실이라는 점을 잘 알고 계셨다. “의로운 분”이 나타나셨고, 모든 이가 해방되며 진정한 평화의 가능성이 주어지자마자 그 의로우신 분의 탄생 시점부터 한편에서는 즉시 무장한 사람들의 폭력이 등장하며 아예 그 싹을 없애버리려는 시도 속에 크나큰 분열이 생긴다.

베들레헴에서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화가 난” 폭군 헤로데는 베들레헴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학살하였다).”(마태 2,16-18)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하며”(예레 6,14), “거짓을 이야기하고 속임수 환시를 보며”(에제 13,8), “먹을 것이 있으면 평화를 외치지만 저희 입에 아무것도 넣어 주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쟁을 선포”(미카 3,5) 하는 이러한 이들의 작태요 행태는 모두 거짓 예언이다. 제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더욱더 복음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2-53) 하신 대로 더욱더 거센 분열과 반발이 일어난다.

이 말씀 역시 당시의 제자들과 함께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나타나게 된 “사람의 아들의 표징”(마태 24,30),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표징이 인생 안에서, 세상 안에서, 또 다른 공현公顯으로 계속 드러나는 과정에서는 “평화”보다 “분열”이라는 불협화음이 늘 발생한다. 교회의 삶 안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평화”의 모습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바로 이 부분에 부정적인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속임수가 있다. 교회 안에도 “세상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아가는”(에페 2,2) 사람들이 있고, 그런 이들이 지도자와 권위권자로 있는 상황을 살아야만 하는 시대가 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하는 말씀대로 교회 안에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분열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불꽃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어 교회의 아름다운 생명을 유지해 간다. 교회의 기나긴 역사 안에서 감히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가 개혁을 위해 나아갈 때 개혁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교회 안에는 크나큰 반대와 반발이라는 거센 “분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 십수 년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맞이한 오늘날의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좋은 실례를 목격하기도 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아보려 애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복음의 음성에 귀를 닫은 그리스도인이 있고, 복음에 최우선권을 두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그런 이들을 속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들이며 겁쟁이라고 멸시하면서 본질이 아닌 인간적이거나 종교적인 전통 따위를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복음이 아닌 교회의 높은 종탑 위에 고고하게 올라앉아 있기만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논리만을 살아가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칫하면 정신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 현대인들의 논리는 성과주의, 업적주의, 실적주의, 끝없는 경쟁으로 무한경쟁을 위해 사람들을 내몰고 치닫게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그런 세속주의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평화는 “열매”를 추구한다. 세상이 구하는 평화는 ‘척도’와 ‘평가’ 그리고 ‘새로움’을 기준으로 하고, 예수님의 평화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죽어 누군가를 열매 맺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참조. 요한 12,24) 예수님은 “평화의 군왕”이시며 그분의 승리는 영원하시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 하는 말씀대로 시련, 시험, 분열과 같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다.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가 그분께 충실하고, 타오르는 복음의 불꽃이요 성령의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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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8월 14일
513 12.8%
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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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는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언하신 참사랑은 갈등과 분열로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찾는 원동력이 됩니다. 연중 제20주일의 복음 말씀은 힘들더라도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들립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치드키야 임금 때(기원 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점령당하고, 지도자들은 유배지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시기에 산 증인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우러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바빌론군은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것(예레 37,5)을 본 대신들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예레 37,9)을 선포합니다. 대신들은 그의 말이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재앙을 바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선동합니다.(예레 38,4) 유약한 임금은 그를 저수동굴에 가두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고 대립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에게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음에 충실한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과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우리의 수호자이니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촉구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 속에 ‘영원한 도성’(히브 13,14)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믿음의 영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십니다. 아람어 문화권에서 ‘세상’은 진흙으로 만든 ‘화덕’으로도 풀이됩니다. 화덕의 연료는 동글납작하게 만든 낙타분에 소금을 뿌려 말린 것입니다. 소금은 연료를 태우는 촉매제(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불쏘시개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맙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평화를 누리라는 가르침으로 새깁니다.(마태 5,13; 마르 9,50; 루카 10,34)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현존이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힘을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그가 기도하자 주님의 불길이 번제물을 태웠습니다.(1열왕 18,38)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루카 3,16)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내면을 정화시켜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사랑의 불이 타오르려면 주님께서 받아야할 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는 순교의 은유적 표현(루카 12,50)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로 세례의 원천(마르 10,38; 요한 19,34)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삶을 시작하는 거룩한 성사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아우성치던 군중 심리를 예견하신 것일까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주님(요한 14,27)의 말씀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세상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힘의 균형 상태나 심리적인 안정을 두고 말합니다. 군비경쟁이 지속되는 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권이 무시되고, 불의와 불신, 교만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shalom, irene)는 하느님의 본성, 강복, 안심, 안녕, 풍요, 번영, 조화, 화해, 기쁨, 완성 등 적어도 열 가지의 의미(사회교리 488-495)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내려지는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가 분열의 기준입니다. 믿음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요한 5,24) 믿음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자랄수록 성령의 불은 타오르기 마련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응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때 성령의 선물인 평화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신앙공동체의 참 가족이 됩니다.(마태 12,50; 마르 3,35; 루카 8,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도주의에 이바지하는 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는 길입니다. 애덕의 실천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보장과 의료서비스 같은 문제에 우선적인 배려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삶의 최고의 규범입니다. 참사랑은 진리 안에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완덕의 최고봉입니다. 성체성사와 생명의 말씀이 일치의 원동력이 되고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순례의 여정에서 이기와 위선과 교만을 태워버리고 주님과 함께 사랑의 불쏘시개가 될 때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의 평화는 믿음에서 오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평화’(요한 15,1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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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세레자 요한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18일
  | 08.12
513 12.8%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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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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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복음,
회개를 통한 정화(깨끗해짐) 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주려고 왔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 ‘바람’이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라고 청할 때마다 청하는 대로 그것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런데 ‘회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회개시키신다는 말은,
강제로 회개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인도하고 권고하신다는 뜻입니다.
(강제로 시키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는 일과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회개는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는 일에 관심도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안타까움’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여기서 ‘예루살렘’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안타까워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라는 말씀에서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좁은 뜻으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완성될 때까지”이고,
넓은 뜻으로는 “지상에서의 사명 수행이 완료될 때까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는 말씀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슬픔, 괴로움 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승천하신 뒤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을 보시면서,
슬퍼하고 계실 것이고,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아서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만 문제일까?
믿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는 말씀의
바로 앞에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믿는 사람들’이 먼저 ‘회개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속상해하고, 더 안타까워하고,
더 슬퍼하고, 더 고통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다른가? 같은가?
선거철 때 보면, 별로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권력 앞에서, 돈 앞에서,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러니까 ‘회개’는 ‘믿는 사람들’부터 해야 합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부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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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 10,34).”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14,27).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참 평화’도 거부합니다.
‘참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들과 ‘세속의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생기고, 그래서 마치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또는 칼을 주려고 오신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안 믿는 자들이, “이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때문이다.” 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실제로 많습니다.)

우리는 분열을 감수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참 평화’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또 그것을 희망하고, 그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으로 좁혀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와 신앙 때문에 가족이 분열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정의 복음화와 가족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논쟁’이 아니라 올바르고 착한 행실로, 또 말 없는 처신으로
안 믿는 식구들을 감화시켜야 합니다(1베드 2,12 ; 1베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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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8월 14일
  | 08.13
513 12.8%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2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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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에 대해 스스로 말씀하신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꽤나 강력하고 도발적인 말씀입니다. 첫째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관해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하십니다. 이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로 보고 있습니다. 산불을 놓거나 어떤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테러범이나 무슨 원한 맺힌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성경에서 불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타는 것을 보았다. 또한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을 때에 하느님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십니다.(탈출 19:18) 그리고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엘리야가 바알 우상숭배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다 태웁니다.(열왕기 상 18:38)

구약 성경에서 심판을 묘사할 때 불을 사용하였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에 대해 맹렬한 불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사 2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불과 유황을 사용하셨습니다. 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 “쭉정이”를 불에 던져 넣으라고 하셨습니다(루카 3, 9 17).

예수님이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심판의 의미이고 어떤 경우에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7).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불은 뜨거움과 밝음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래서 불은 하느님의 힘과 능력의 현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지르러 오신 불은 당신 자신과 함께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불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와 있습니다. 작은 불이 서서히 타올라 큰 산을 태웁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빈도(頻度), 강도(强度) 그리고 밀도(密度)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하나 같이 작지만 밀도 있게 자랍니다. 성령의 불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뜨겁게 달아오르도록 합니다.

성령의 불은 홧김에 휘발유를 뿌리고 확 싸지르는 불이 아닙니다. 타오르는 하늘나라의 불은 세례, 혁신, 변화, 회개 등의 불입니다. 이 불은 하느님 나라의 열정으로 생각의 성분(性分)과 그 비율 그리고 욕망의 빛깔과 그 모방대상을 바꾸는 불입니다. 내 마음 속에 성령의 불이 아직 타고 있는지, 아니면 재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한 때는 뜨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한 번 그랬던 것을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따뜻 미지근하지는 않는지요? 하느님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것은 뱉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언뜻 읽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고 말씀을 하십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평화를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아하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은 가정의 평화와 식구들의 일치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문명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최고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교회제도를 만들기 이전에 가정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기기 전에 가정은 이미 있었습니다. 인간이 짐승을 면하여 나올 때부터 가정은 오늘날 구조와 비슷하게 있었습니다. 구세주도 한 가정 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정 안에 분열을 일으키고 집안 식구들이 맞서 갈라져 반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반대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참말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가정은 콩가루 집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분쟁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될 분쟁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사람들은 둘로 나뉘게 됩니다. 심지어 한 가족도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분리됩니다. 주님은 우리 각 가정 안에서도 이와 같은 분쟁이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쫓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반대되는 사람이 대적할 것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가르침은 중간지대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른다면 이러한 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하고 사유하면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분은 메시아다”“저분은 예언자다”“저분은 술꾼이고 먹보이다.”“저분은 죄인이다”“저분은...,”등등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죄하는 사람들이 서로 맞섭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실존적인 선택은 서로가 다른 입장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예’아니면‘아니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내 분열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묶어 통합하여 창조적인 융복합을 이루어내는 불꽃같은 지혜가 없다는 현실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승은 루카 복음사가가 속해있던 초기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복음서를 쓰고 있던 시기에 복음화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정 내부의 분열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교나 이슬람교 혹은 다른 전통 신앙이나 미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가정 안에서 누군가 가족의 일원이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한다고 할 때 가족의 나머지 구성원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개종의 과정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분열의 상황입니다.

이런 가족 안의 분란은 우리나라의 복음화 과정에서도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무속을 믿는 집안에 천주교 신자 며느리가 들어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네가 성당 나가면 네 신랑이 일찍 죽는다 카다라.’ ‘집안에 흉한 일이 생긴다 카더라’ 등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반대에 부딪쳐 괴로워하고 있겠습니까? 그 반대 또한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왜 예수를 믿는데 분쟁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으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분쟁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속으로만 믿고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면 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제자들이 예수를 증거하므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와 형제와 자녀들 간에도 분열과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마저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홀로 입교하여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영세시킨 예는 우리 주변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비록 마찰과 분열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며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길입니다. 이런 분열은 창조적 파괴의 분열입니다. 아직 집안에 비신자 가족이 있다면 서서히 성령의 불이 타오르도록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삶 안에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굴레이며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결국 은총을 위한 준비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번 곰곰이 묵상해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평화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참된 평화란 무엇인가?

한 공동체 안에서의 참된 평화는 그 구성원들이 진선미를 서로 나누고 교환할 때 이루어집니다. 악을 서로 나누고 교환함으로써 구현되는 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선의 교환에서 발생합니다. 불의와 악을 서로 나누면서 단지 말썽 없이 지내고자 하는 것은 임시변통(臨時變通)의 조작된 거짓평화입니다. 힘센 깡패에게 굴복해서 구걸하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갑에 의한 을의 지배로 확보된 평화도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평판과 체면 그리고 가오를 위해서 그저 부딪히지 않고 악에게 굴종함으로써 얻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것은 악의 묵인 혹은 악에의 가담이며 결국 죄악 행위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타협과 봉합이 능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고 옳은 것을 주장하녀 분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궁극적인 평화는 정의와 공정에서 옵니다. 언제나 바르고 공정한한 것을 상식적이고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의가 적당한 타협으로 가려져서는 안 됩니다. 불공정과 꼼수와 타협하는 것이 쉽게 사는 길이지만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은 어디를 들어가든지 거짓 평화의 가면을 벗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조용한 게 좋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사람의 믿음은 미지근하게 식은 믿음이거나 차가운 냉담의 믿음이거나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기회주의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익명의 냉담자이며 어쩌면 비명시적인 배교자입니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 소리가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이 타오를 때 활활 타는 소리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조용한 곳은 공동묘지 밖에 없습니다. 어디든 입이 달려 있는 사람이 모이면 찔커덕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참된 평화는 거짓 평화와는 서로 다릅니다. 거짓 평화가 위선과 악을 전제로 한 평화라면, 참된 평화는 진리와 선을 전제로 한 평화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장된 거짓 평화는 복음 앞에서 그 본 모습이 벗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절대적인 진리이며 절대적인 선이기 때문에 그 앞에 거짓은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진리와 거짓 혹은 선과 악은 서로 양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과 악과 불의가 있는 곳에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분열과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완전한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이며 복음화의 절정 혹은 회개의 절정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분열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자세히 보면 모든 거짓 평화는 참된 평화로 이행되어야 하지만 분열과 갈등이라는 십자가의 세례를 겪어야만 합니다. 분열은 참된 평화에서 거짓 평화로 가는 데에 꼭 겪어야할 과정이며 통과의례입니다. 전투에서 복음이 지는 경우 거짓평화가 여전히 위세를 부리게 됩니다. 그러나 마침내 복음이 승리하게 될 때 참된 평화가 강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말씀의 선포자로서 많은 역경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습니다. 유다의 입장으로서는 바른말을 하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밉기만 하였습니다. 백성의 원로들과 권세가들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붙잡아 진흙 구덩이의 저수동굴에 넣어버립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박해을 받을 때 자기 심정을 "아, 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예레 15,10)라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끌려가 타향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평화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거짓 평화의 도구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썩은 것을 묻어버리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썩은 것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힘에 의한 굴욕적 평화, 위장된 물질적인 평화, 손쉬운 거짓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진실을 서로 나눌 때 주어집니다. 예수님 앞에서 양다리 걸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평화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거짓 평화의 도구는 아닙니다. 우리는 썩은 것을 묻어버리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썩은 것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힘에 의한 굴욕적 평화, 위장된 물질적인 평화, 손쉬운 거짓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진실을 서로 나눌 때 주어집니다. 예수님 앞에서 양다리 걸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참된 평화와 거짓평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 혹은 증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는 이런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이 본문은 11장 '믿음의 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 많은 증인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들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탁월한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한 구약의 인물들이 신앙의 위대한 모범이며 증인으로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제2독서가 신앙인의 자세에 관해 권고하기 이전의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수 많은 신앙 인물들에 대하여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12장은 고 있습니다. 응원을 하는 군중처럼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서 응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제2독서에서 이제 그 믿음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여 격려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의 선조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선조들이 믿음을 지켜가면서 상황들을 버텨내고 인내하고 인고(忍苦)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 중 특별히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 12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신약성경에서 ‘인내 혹은 인고(ὑπομονής, 휘포모네스, hupomones)’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번역본에 우리 한글 성경 번역본에는 인내라고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인내 혹은 인고를 뜻하는 ‘휘포모네스(ὑπομονής, hupomones)’라는 말이 여러 형태를 변주를 이루면 3번이나 나옵니다.

1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1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여기에 휘포노네'라는 말이 ‘꾸준히’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그 다음에 2절 중간에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에서 ‘견디어 내시고’ 라는 말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3절에 가서는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에서 ‘견디어 내신’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렇게 ‘꾸준히’ ‘견디다’로 각각 다르게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을 보면 똑같이 ‘휘포모네스’에서 변형된 말입니다. 희랍어 휘포모네ὑπομονή는 휘포모네는 “아래”를 뜻하는 휘포(hupo)와 “남다”를 뜻하는 메노(meno-)의 합성어로 "아래에 머물러 있다."라는 뜻으로 어려움을 참으며 주어진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인내, 인고, 참음, 견딤 등으로 번역됩니다.

사전은 인내심을 '고뇌, 고통, 수고, 재난, 도발 또는 다른 악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고결한 성질, 불평이나 의아해 없이 지탱함'이라고 정의합니다. 한자로 ‘인내(忍耐)’는 참을 ‘인(忍)’과 견딜 ‘내(耐)’합쳐진 단어입니다. ‘인(忍)’은 刃(칼날 인)과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글자로 심장에 칼날이 꽂히는 아픔을 참는 의미를 갖고 있고, ‘내(耐)’는 而(구레나룻 이)와 寸(꾸미다)가 합쳐진 글자로 옛날 수염깎는 벌을 받는 수치를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은 육체적인 고통을 참는 것이고 내는 인격적인 고통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고독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내의 특징을 살펴보면 인내는 달리면서 참는 인내입니다. 1절 끝에 “꾸준히 달려갑시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인내로써 달려갑시다’입니다. 이것은 그냥 꾸준히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되 인내하고 참으면서 경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면서 인내하고 인내하면서 끈기있게 달리라는 것입니다.

인내는 하룻밤 사이에 개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내심을 키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십자가 수난은 인내의 완벽한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는 인내는 2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고 인내하십니다. 견디어 낸다는 번역은 희랍어 ‘휘포모네스(ὑπομονής, hupomones)’를 번역한 표현입니다.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십자가의 수난을 인내하고 참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완수할 때 까지의 고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세례'는 십자가 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마르 10,38). 바오로 사도도 이 사실을 재차 확언하고 있다(로마 6,3-4).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상 세례 죽음은 이루어야 할 사명입니다. 그 일은 단순히 일시적인 생각이나 가벼운 노력으로 쉽게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는 표현은 골고타의 사건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시시각각 조여오는 인간적인 고뇌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의 수난과 그 세례를 인내로써 이겨내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3절을 보면 죄인들로부터 당하시는 예수님이 그것을 이겨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로부터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수많은 악한 사람들 때문에 밤낮없이 시달리면서 고통을 당했지만 주님은 그 모든 사람을 참으셨습니다. 인내하시고는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달리면서 인내하는 휘포모네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내라고 하면 수동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그런 종류의 ‘참고 견디는 것’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인내라고 번역된 희랍어 '휘포모네'(hupomone)는 그런 정적이고 수동적인 인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인내는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환경이 척박하고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더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리켜 ‘휘포모네’의 인내라고 선언합니다. 휘포모네는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의 인내입니다.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는 인내입니다. 차가운 견딤이 아니라 열정이 내장된 인내입니다.

이 '휘포모네'는 시련을 맞을 때 가만히 있는 인내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경주하는 인내를 말합니다. ‘휘포모네’의 인내는 불운을 만났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찾아 더욱 열심히 일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휘포모네의 인내는 뒤로 물러서는 자세가 아닙니다. 주저앉는 자세가 아닙니다. 앉아서 울고만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걱정만 하거나 자기를 비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과 자비하심만 바라보고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장벽이 있으면 뛰어넘고, 장애물이 가로막으면 손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두들겨 부숴 벽을 헐고 뛰어갈 때 별도 보고 딸 수 있습니다. 밤하늘이 밝으면 별이 보이지 않고 캄캄해야 별이 잘 보입니다. 고통이 몰려올 때 울고 불고 하는 인내가 아니라 눈물을 머금고 달려가는 인내입니다.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참음입니다. 어딘 가로 가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자기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찾아서 힘차게 일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휘포모네의 인내는 가만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열정을 다해 노력하는 움직임이 있는 인내입니다.

휘포모네의 참된 비결은 인내하는 동안에도 긍정적으로 다른 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고 수행하는을 동반하는 데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른 길을 찾고 문이 막혔으면 다른 문을 만들어 내는 노력까지 포함하는 인내입니다. 길이 보일 때까지 길을 찾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면서 달려가는 경주의 자세, 바로 이것이'휘포모네'입니다.

프랑스 중세 때의 보브나르그 후작
뤽 드 클라피에(Luc de Clapiers, marquis de Vauvenargues)는
인내는 희망의 기술(La patience est l'art d'espérer, Patience is the art of hoping)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인내는 희망을 품는 기술이고 예술입니다. 희망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덕목이라는 의미입니다. 인내는 미래의 축복을 당겨옵니다. 가장 잘 참고 견디는 자가 무엇이든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터키 속담에는 ‘인내는 천국의 열쇠’라고 했는데 우리가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 해방과 성취가 옵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하고자하는 일을 이룹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달합니다.’인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라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더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은
17세기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가 만든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입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정교하고 다양한 음색을 가져 감정 표현을 잘 해 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바이올린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은은한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소리와 그 희소성 때문에 남아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값은 20억 원을 넘습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도 이 바이올린을 사용합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비밀을 캐는 연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바이올린의 비밀은 잘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태양 흑점 활동의 변화로 생긴 지구의 기후 변화가 나무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여 나무를 단단하고 밀도가 높게 만들었고, 이러한 나무의 목재가 바이올린 제작에 쓰였다는 것입니다. 즉, 유럽에서 14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소 빙하기(Little Ice Age)에 나무가 더디게 성장하여 알프스의 가문비나무들이 단단하고 큰 밀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자란 좁은 좁은 나이테와 높은 밀도가 바이올린의 톤과 음색을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내는 자신이 원하고 갈망하는 결과를 얻게 해줍니다. 인간의 성장과 성숙은 역량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독일 속담에는 ‘인내는 악마도 먹어치운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모든 유혹과 고통을 극복하게 합니다. 인내로 유혹을 견디어낼 때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둠이 짙으면 동트는 아침이 가까이 오고, 시계의 추가 좌에 이르면 우를 향하게 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햇빛만을 보며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비도 오고 눈도 오며 어느 날은 먹구름이 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가 와야만 무지개를 볼 수 있으며, 구름이 끼어야만 축복의 소나기가 내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 상황을 만납니다. 그러나 위기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위기를 맞게 될 때 걱정부터 하지 마십시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입니다.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걱정은 습관이며, 그 92%는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걱정 대신 인생의 날씨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당신을 온전히 맡기시기 바랍니다. 시련과 위기 속에서 세상을 긍정과 희망으로 보아야 한다. 인생은 짧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휘포모네의 인내는 삶의 의미를 농축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고통과 어려움을 없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겨나는 것입니다. 바람을 인내하고 견뎌야 하늘에 연이 날고 독수리가 날개짓하며 바다의 배도 나갑니다. 아름다운 꽃도 바람을 인내하고 그것에 흔들리면서 자신을 피우고 향기를 풍깁니다. 세한(歲寒)의 소나무도 춘하추동 삼한사온에서 비맞고 바람불고 눈 맞으면서 북풍한설 풍상을 인내하면서 자라나고 푸르른 향기를 냅니다.

인내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듭니다. 걸림돌도 인내해서 잘 이용하면 디딤돌이 되지만 걸림돌 앞에서 좌절하면 아예 기회가 없습니다. 넘어져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힘들어도 참고 달려야 합니다. 살다보면, 아니 살아남으려면 넘어질 수 있고 흙이 묻을 수도 있고 무릎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남을 탓하기에 급급하기 보다 하늘을 보고 씩 웃으며 털고 일어나는 것이 신앙인의 아티튜드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참으면 안 됩니다. 넘어진 김에 쉬었다가 일어설 때는 뭔가 동전이라도 하나 주워서 일어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입니다. 집어서 일어나자, 고난을 마주해도 주저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달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화(禍)와 복(福)은 서로 대립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고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반복하고 순환합니다. 그래서 복(福)이 성할 때는 더욱 더 겸손함과 삼가함을 잊지 않아야 하지만 화(禍)가 성할 때는 인내로써 무장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인내 없이 받은 축복은 배탈나서 설사하거나 토하고 맙니다. 축복의 단계에서 호사다마(好事多魔)이며 이 단계에서 인내하지 못하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결실도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팬데믹과 엔데믹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고물가, 고금리 등으로 마치 오늘 세상이 끝나는 듯이 좌절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달리기는커녕 더 걷기도 싫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인생에서 빨간 신호등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참고 견디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앞으로 쭉쭉 진행하라는 초록불이 켜진다. 인내해서 기다리다 다음 신호에 건너도 인생의 레이스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은 가고 내일은 반드시 오며, 지금은 힘들더라도 인내하면서 달리면 좋은 내일이 옵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속에 몰아넣고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며,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또 불법이 성하여 많은 이의 사랑이 식어 갈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24,7-13)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제2독서는 사명수행의 노하우를 고대 그리스 올림픽 경기 중 마라톤 혹은 보병 완전군장 달리기 경주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달리기 경주자는 두 가지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첫째는 완전군장의 짐입니다. 완전군장은 갑옷, 투구, 정강이막이, 방패, 창, 칼 등입니다. 둘째는 죄입니다. 히브리서에 언급된 것은 두 가지이지만 영적으로는 결국 죄악 한 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죄는 완전군장처럼 우리가 달려 나가는데 무거운 짐입니다. 무거운 완전군장으로 비유되는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하고 충언합니다. 목표이며 우리는 예수님만을 보고 죄에서 벗어나서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여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평화의 불을 확 싸질러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인내로서 꾸준히 달리고,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새로운 길을 찾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영국 속담에 ‘하느님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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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8월 14일
  |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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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내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주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권에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의 문화를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먼저 ‘불을 지르러 왔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식으로는 예수가 방화범이 되려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에다 비유합니다. 예레미아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님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 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20,9). 이 말씀을 배경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불길같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 왔다는 뜻입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10,38)는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세례는 사람을 물속에 잠그면서 행하는 의례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과거의 삶에 죽어서 새로운 삶에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데는 타협하지 않으셨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자기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주저와 고뇌가 전제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불화를 좋아하신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가정의 분열과 사회적 붕괴가 나타나면,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워지면, 이 세상의 기존 모든 질서들이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세 개의 주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당신의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올라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전해야 하는 말씀을 위해 양보나 타협을 하지 않으셨고, 그것 때문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이 고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존도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많은 곳에서 분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 공동체가 찢어지며 가족끼리 반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돌아가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들도 그 가정이 분열되고 서로 반목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국의 교회사에도 분열과 반목은 많았습니다.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만 20,000명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인연이 인간의 혈연보다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3,35). 가장 중요한 인연은 형제, 자매, 혹은 아버지, 어머니 등의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에 발생하는 인연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올라서,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마음에 발생하는 인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분열과 반목을 거슬러 싸우고 이겨서 드디어 군림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가 그 충실함 때문에 발생한 분열과 반목을 참고 견딥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그리스도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분열과 반목을 자초하고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참고 견딜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선교한다는 사람들의 독선적 자세를 만납니다. 이웃을 존경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오르기를 원하셨고, 그것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으셨지만, 그분은 섬기는 모습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 섬김은 사랑이며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고유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섬김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서간들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아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히브리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라고 격려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배웁니다.

교회는 오랜 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그 사회가 준 수직적 권력 구조와 군림하는 인간관계에 익숙해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던 초기교회의 섬김은 사라지고, 봉건영주 행세를 하는 지도자들이 군림하며 명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서 섬기며 죽어 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지시하며 순종을 요구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럽 중세 세상이 아닙니다. 성전이 웅대하고 화려하다고 감동하여 하느님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중세 유럽의 영주나 왕과 같이 차려입은 고위 성직자들이 있다고 매혹되어 신앙을 받아들일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섬기는 사람이면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데살리니카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을 지키시오.”(1데살 5,21).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살펴보는’ 현명함을 잃고 아집에 살겠다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길 같이 타오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월감과 일신의 편안함 안에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려 하지 말고,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으로 하느님의 아들 됨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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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8.13
513 12.8%
신앙에 있어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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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일시적인 나쁜 경향 또는 거짓된 보증,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로 사람들과 상황을 새롭고 대담하게 판단하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이 되고 만다. 이 때의 심정을 예레미야는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옵니다”(예레 15,10)라고 한다.

루카 12,49-53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예언자의 운명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은 더 나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49-50절). 여기서의 ‘불’과 ‘세례’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깊은 물 속에 잠기는 행위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강렬한 원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크신 사랑과 숭고한 가르침 앞에 인간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짓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가족들 간에도 만남과 충돌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951-53절).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근본적인 선택에 있어서 대립되게 되면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필연적 소명 때문에 복음과 일치되지 않는 사상체계, 정치적 사회적 관습, 그리고 굳어진 현실을 거슬려 싸우는 ‘투쟁자’가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 동조하고 만다면, 그것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내버려져 짓밟히게 되는(마태 5,13) ‘맛을 잃은’ 소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그리고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내적인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내면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의무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결정적 가치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메시아의 때가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함을 비난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여러 기적사화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요란스러운 ‘표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일인지 스스로 판단할 줄을”(57절) 모른다면 이것은 그분도, 그분의 메시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마음이 거짓되어 진실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겉꾸미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예레미야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거추장스러운 예언자이시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원초적 의미로 볼 때, ‘투쟁적’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뜻을 안다는 것’(56절)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예언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두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의 세례를 통해 세례를 받고 또한 그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타오르게 하신 성령의 불로 자신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그분께 ‘충실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2독서 : 히브리서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기에 2독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이 ‘표지’에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 때문에 가치관의 변화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과 이미 대립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족들 사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내 자신 안에서 가치관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게 되어 있다. 이 갈등을 통해서 진정 우리에게 평화를 가질 수 있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에 일치시켜 평화를 이끌어 내느냐가 내 몫으로 남는 것이다. 이 몫을 잘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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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8.13
513 12.8%
[수원] 분열을 주시러 오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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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예레 38,4-6.8-10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할”(예레 1,18) 만한 용기를 가졌던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 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레미야는 불신과 저버림을 당하면서 느끼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49-50절) 여기서 ‘불’과 ‘세례’의 의미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물속에 잠기는 행위로써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 이제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리와 허위를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믿음과 믿음을 통해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를 통하여 내적인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체로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전쟁’ 즉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이 내적 전쟁을 통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 즉 구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전쟁은 전쟁이며 갈등이지만 범죄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다.

이 갈등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갈등을 계속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갈등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히브리서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립시다.

히브리 서간에서도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표징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4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언제나 부딪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삶을 결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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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9년 8월 18일
  |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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