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21 78%
연중 제33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63
작성일 | 22.11.11
전례력으로 한 해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한 해가 다음다음 주 대림절로 다가온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 기다림인 종말의 현실을 묵상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마치시려는 시점, 곧 수난과 죽음을 앞둔 시점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 쪽에 계시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마태오나 마르코 등 공관 복음사가들은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을 공동으로 전한다. ‘성전파괴의 예고’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이고, ‘재난의 시작’과 ‘예루살렘의 멸망’(20-24절) 역시 예루살렘을 두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된다. 종말에 관한 예고는 한편에서 하느님의 심판이요,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양날 칼이다.

복음의 오늘 장면으로부터 대략 50년쯤 전에 헤로데에 의해 이미 재건축을 시작하였던 예루살렘 성전은 호화로운 건축물이 되었고, 예루살렘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예루살렘은 수도로서 이 성전과 함께 여느 도시와 달리 “대왕님의 도성”(시편 48,3),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마태 5,35)이 되었으며, 주님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다인의 목적지이자 바빌로니아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목적지였으며, 유다인의 거점이었고, 그 안의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셰키나Shekinah(거처居處)였다. 누구나 ‘예루살렘의 찬란함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그 거룩함을 보지 못한 자는 장엄 그 자체를 보지 못한 자다.’하고 말하던 것처럼 성전은 그 자체로 빛나는 표징이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분향을 하는 것으로 복음을 시작한다. 루카복음에서 “성전”은 중요한 곳으로서 예수님께서 봉헌되신 곳이고(2,22-24),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한 곳(2,25-39)이며, 소년 예수를 사흘 만에 다시 찾은 곳일 뿐 아니라(2,41-52), 성전이 있는 그 도성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곳이고(19,41-44),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곳이며(19,45-48), 오늘 복음의 대목에 이르러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가 이루어진 곳이다.

1. “성전…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루카 21,5-19)

예수님의 제자들도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요한 18,1) “올리브 산”(마태 21,1;24,3;26,3 등) 쪽에서 성전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제자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엄중한 신성모독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훗날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에 의해서 최고 의회(산헤드린)에 예수님을 고발하는 구실이 된다.(참조. 마르 14,58 마태 26,61)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성전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려 하셨다거나 파괴를 바라셨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함이었다. 성전이 하느님의 집이며 위풍당당한 집이라 할지라도 그 성전 자체로 믿음의 대상이나 담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그 자체로 많은 유다인들에게 이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유다인들이 성전에 간 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는 집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너희는…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너희 길과 행실을 고쳐라” 하고 이미 수 세기 전 성전에서 외치던 예레미야의 심정으로(참조. 예레 7,1-15)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고 합당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통교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우상 숭배의 장소나 구원의 거짓 보증으로 변형하여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시면서 이미 오래전 예언자들이 수도 없이 외친 바를 시종일관 강조하신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성전 자체가 파괴되어 허물어질 것을 미리 내다보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표징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신다.

2. “그런 일이 언제…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5-19)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면서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제자들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언제”라고 하면서 ‘주님의 날’(히브리말-욤 아도나이, יום יהוה, jom ’Adonaj, 라틴어-DIES DOMINI, 참조-199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관한 질문을 하는 셈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시간으로 예언하지 않으시면서 다가오는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하시듯이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하고 경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늘 누군가가 지정하려고 시도하면서 거짓 예언자 흉내를 내고 신앙인들 사이에 물의를 일으키곤 했던 날짜나 표징이 되는 구체적 내용을 밝히시지 않는다. 깨어있으면서 시대와 역사의 표징을 깊이 숙고하여 읽어내야 하고, 주님의 약속을 거듭 기억하면서 그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날을 기다리라는 듯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항상 이 세상의 역사와 시간의 끝이 있기나 할 것인가, 있다면 그때가 언제일 것인가, 설마 나의 일생에야 그때가 올 것인가 하는 숨겨진 내심의 의문들, 혹은 애써 피하고 싶은 의문들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의 끝에 대한 궁금증을 물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생의 끝은 분명히 있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 담긴 분명한 사실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현대인들은 ‘현재’만을 고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현재는 ‘이미 오신(과거) 주님과 앞으로 오실(미래) 주님을 모시고 사는’ 현재의 삶이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종말의 “때”에 관하여 알기를 원하지만, 결국 이는 불확실하다. 종말이 온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만, 언제인지는 모른다. 종말을 분명히 믿지만, 종말의 날짜와 시간은 믿지 않는다. 종말이 ‘인간들의 날’이 되려 할 때 이는 참으로 재앙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경고는 그리스도의 이름 사칭詐稱, 곧 ‘에고 에이미(Εγώ εἰμι, Egó eimi)’, 하느님의 이름 사칭으로서 오직 주님께만 속한 권위와 우선권의 거짓 행세이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참조. 요한 1,20-21)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는 행여 ‘나다!’ 하는 말을 할세라 삼가면서 ‘나는 아니요!’를 거듭 외치고,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표시가 되어야 한다.(참조. 요한 1,23-36) 불행스럽게도 인간은 늘 믿음을 두기 위한 우상, 뭔가를 보장해 줄 것만 같은 일종의 성전을 찾는다. 역사는 슬프게도 주님을 찾는다면서 주님께 와서 주님의 일꾼으로 열성을 다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게 되는 사람들, 인간적인 어떤 제도나 전례, 신학적, 법적, 정치적 장치 같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서 이를 원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에 함몰되면서 참된 신앙을 거스르는 추문과 모순, 자가당착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내 뒤를 따라…”(마태 4,19;16,24;19,21 등) 하신다. 기억해야 할 영어의 back, behind, after 등에 해당하는 ‘오피소(ὀπίσω, opisó)’라는 중요한 말이다. 예수님 몸소 가리키시고 복음이 증언한 ‘예수님 뒤’만 따라가야 한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 복음을 기록했을 기원후 80년경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거짓 예언자와 사기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참조. 사도 5,36-37;21,38)

예수님께서는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0-13)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늘 있었던 전쟁, 혁명, 지진, 기근, 예루살렘과 같은 도시들의 함락과 침공…과 이 세상이 끝나게 될 최종적인 재림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시대부터 이미 교회 초기부터 교회가 가혹한 박해를 살아왔다는 사실도 고려해야만 한다.(참고. 사도 4,1-31)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의 처형을 당하시기까지 박해를 받으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으니, 이는 소위 종교적인 지도자들이나 권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 율법의 최종적인 지향점, 유다 자손들이 져야 하는 숙명, 성전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정치적 권력 체계가 예수님께서 살아내시고 설파하신 정의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오늘의 현실에서도 성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손을 대어 박해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내놓고 종교적 탄압과 박해를 하지는 않지만, 조직적으로 교회를 부서뜨리려는 은밀한 세력이 존재하고, 반反그리스도교적인 문화의 박해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가 중요하다면서, 우리의 삶은 현실도피일 뿐이라면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미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박해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를 “증언(증거)”할 기회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참조. 마태 5,11)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루카 22,25)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상을 넘어 못된 종교적인 권위 앞에 체포되고 재판받으며, 세속의 권세 앞에 끌려가는 때와 장소가 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히고 모욕을 받는 때가 있을 것이다.

2세기의 성 테르툴리아노는 『순교자의 피는 씨앗(The blood of the martyrs is seed.)』이라 하였고, 3세기의 주교인 성 치프리아노는 『박해가 닥쳐올 때 하느님의 군사들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에게는 하늘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저 평화만을 생각하거나 싸움에 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군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 싸움의 맨 선봉에 서십니다.』라고 하였으며,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교자들은 압제당하고, 포박당하며, 벌을 받고, 매달리며, 불에 태워지고, 잘려지며, 학살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갑니다.』라고 하였다. 증언자이고 증거자이신 순교자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인 그들을 사랑하였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복음의 진리, 곧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참고. 요한 3,16)을 증언하였다. 오늘 우리들이 피에 젖은(wet) 순교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상생활 안에서 건조한(dry) 순교를 할 수는 있다. 이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는 일, 미움과 적대감을 인내하는 일, 내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 희망도 도움의 손길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평안과 공감을 주는 일 등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증언•증거”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3.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5-19)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투옥, 심지어 죽음까지도…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참조. 로마 8,35)라는 사실을 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하셨으니 우리 시련의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임을 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6-18) 하셨으니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하신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의 약속이니 우리는 계속 주님을 믿어 견딘다. ‘견딤’은 그리스도인의 덕 중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우포모네(ὑπομονή, hupomoné, 영어로는 remaining, to bear up under)’이고, 참아내는 것이며, 항구함이고, 머무름이며, 인내이다.(참조. 루카 8,15;21,19 로마 2,7;5,3 2코린 1,6 2코린 6,4 2티모 3,10 티토 2,2 야고 1,4 2베드 1,6 묵시 1,9;13,10;14,12) “인내”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주님의 모범을 따라 실망하지 않고, 환난과 어려움 속에 흔들리지 않으며, 세월이 흘러가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고, 함께 있는 이를 붙들어 주며, “끝까지 견뎌내는”(마태 10,22;24,13) 능력이다.

실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한순간의 경험이나 인생의 한 계절로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끝까지 받아들여 사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금, 오늘 여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 5,10-11) 한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힘든 고난의 연속이어도 구원을 얻으려는 항구함으로 “행복”한 이들의 날들이다. 아멘!

-------------------------

작성자 : 벤지
2022년 11월 13일
521 78%
계절이 한 해의 끝자락으로 접어드는 만추의 늦가을입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 제법 추운 날이 시작하였습니다. 절로 우리의 인생을 사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례력으로 오늘은 연중 제33주일로 연중 끝 시기에 와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고 연중 마지막 주일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전례말씀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묵시문학의 형태를 빌어 종말이 오기 직전의 여러 가지 전조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혹은 사람들이 성전이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고하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제자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 성전의 파괴는 세상의 종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세상 종말이 언제 오는지 궁금해서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언하자, 사람들은 ‘그때와 표징’ 을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질문 중에 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징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표징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표징은 거짓 그리스도 혹은 가(假)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자, 거짓 가짜 메시아의 출현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루카 공동체가 겪은 체험일 것입니다.(사도 5, 37; 21, 38) 초대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에게 속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둘째 표징은 전쟁과 반란입니다.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루머나 유언비어에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셋째 표징은 우주적인 징표 혹은 천재지변입니다.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1)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6-1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루가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관해 들려 줍니다. 종말의 표징은 다양하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 더 정확히 따져 보면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입니다. 그것은 전쟁과 싸움, 지진과 기근, 전염병과 죽음, 거짓소문, 가짜뉴스 등입니다. 신문과 방송에 언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다 언급하지 않아도 종말의 표징으로 제시된 모습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지금 현재 여기 저기’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생성(生成)유전(流轉)소멸(消滅)하는 역사의 현상에는 늘 이러한 일들이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을 세상의 끝이라는 연대기적인 사건을 그것으로만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시간적 흐름의 순서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로만 해석하기 보다는 매순간 찰나마다, 우리 인생살이의 현상에는 이미 종말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담겨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현재의 종말론적 인식은 이미 지금 주어졌지만 아직 아니 완결된 실재(實在)에 대한 인식이고, 동시에 아직 아니 완성되어 있지만, 지금 여기 이미 주어져 있는 실재(實在, la réalité)에 대한 인식입니다. 종말론적 표징들의 출현은 통시적(通時的)으로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이미 선취되어 와 있는 일이고 일상의 현상들입니다. 요컨대 종말은 시간적으로 마지막이라는 의미와 함께 ‘지금 여기’ 우리의 생활세계(Lebenswelt)에서 조우(遭遇, Rencontre)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매순간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며 최후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교훈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뜹니다. 마지막일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을 최후로 알고 성의를 다하는 삶을 살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종말론적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시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어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인내’ 는 고난이나 난국을 견뎌내는 인간학적인 내적자세라기보다는 성령이 불어넣어 주시는 종말에 대한 희망의 덕목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인내는 제자들이 시련 중에서도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인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시든지 외적인 표징이나 사건에 매달리거나 현혹되지 않고, 일상을 충실히 해나가야 합니다.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심판이며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실제적인 교회 현실을 직시하고 일종의 사목지침을 내립니다.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2테살 3, 11). 초대교회를 가꾸고자 동분서주 바쁘게 뛰었던 성 바오로 사도도 공동체 내에서 끊임없이 신자들을 분열시키는 무리들의 책동에 시달렸습니다. 반대자들은 늘 자신들의 일상적인 책무는 성실히 하지 않고, 불평불만 속에 신자들을 이간시켜 분열시키려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시대나 오늘날에나 본당 일에 협조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사사건건 본당신부를 괴롭히며 교우들 간의 분열을 일으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 10)고 하면서 이런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합니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전례력으로 종말이 현재 지금 여기로 침투해오고 있습니다. 다음 주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면 교회 달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달려오고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일상적인 일을 지금 여기 열심히 하면서 밥값을 하도록 노력하고, 또 혹시라도 어려움이나 고난을 만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인내롭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11월 13일
  | 11.14
521 78%
그것이 끝은 아니다.

------------------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

여기서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라는 말은,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는 뜻입니다(마르 13,1).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본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사람들을 꾸짖으셨습니다(루카 19,46).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강도들이 살고 있는 ‘강도들의 소굴’이었습니다.

<귀하고 비싸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 상자라도
속에 쓰레기만 들어 있다면, 그것은 그냥 쓰레기통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게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위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은 전부 다 먼지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라는 말씀은,
‘완전한 파괴’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성전들, 건축물들,
또는 예술 작품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영원히 남아 있게 될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언젠가는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인간들이지 건물들이 아닙니다.
건물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것은
강도들 탓이지 성전 탓이 아닙니다.

(사제들, 그리고 사제들과 한통속이 된 장사꾼들이 바로 그 강도들입니다.)

만일에 강도들을 그대로 둔 채 성전만 파괴한다면,
성전 입장에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인간들에게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이라는 예고 말씀입니다.

(넓게 생각하면, 모든 위선자들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때가 곧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는 말은
“종말은 언제 옵니까?”라는 뜻이고,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는 말은, “종말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표징은 무엇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종말이 언제인지를 미리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날이 닥치기 전에 표징이 먼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도
사실은 종말이 언제인지를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대로 미리 알게 되면 정말로 대비를 잘할 수 있을까?
심판과 처벌을(멸망을) 피할 수 있을까?
완벽한 피난처를 구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완벽한 피난처’는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는 있는가?
있습니다. 주님이 바로 그 피난처입니다(예레 16,19).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은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땅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장수들과
부자들과 권력가들, 또 종과 자유인도 모두 동굴과 산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로 무너져,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다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묵시 6,14-17)”

여기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심판관이신 하느님과 예수님을 피해서
숨을 수만 있다면 생매장을 당해도 좋다.”라는 뜻입니다.

(“차라리 그냥 죽고 싶다.”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심판이 무섭다는 것인데, 무섭지만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피할 방법도 없고, 숨을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날이 언제인지 미리 알려 주시지 않으니까,
미리 나타나는 표징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미리 알려 주신다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무서워서 억지로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런 억지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날이 언제인지, 또 무슨 표징이 나타나는지 알아내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8절-19절의 예수님 말씀 가운데에서, 종말과 관련해서 중요한 말씀은,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9절).”라는 말씀입니다.
가짜 그리스도와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등장,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어떤 천문학적 현상들, 종교박해......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겠지만,
그런 일들이 종말의 표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회개하라는 경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재앙을 의식하고, 종말의 무서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회개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회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종말의 날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이 닥치는 날이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 종말의 날과 시간을 정하시면,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 말고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1월 13일
  | 11.14
521 78%
복음을 증언할 때

--------------------

■ 제1독서(말라기 예언서 3,19-20ㄴ)

바빌론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다인 공동체는 평화와 행복의 시간들을 기대했으나, 아직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신앙 또한 식어가 형식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예언자 말라키는 소리를 높여 이스라엘은 굳건한 믿음과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의 날은 오고야 말 것이며, 이날 악인은 멸망하고 의인은 구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제2독서(테살로니카 2서 3,7-12)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는 기대 속에 상당수의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나약한 신앙 자세,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은 자세를 질타하면서,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은 게으름 없이 매일 매일의 삶에 충실한 삶, 매사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삶이어야 한다고 애써 가르친다.

■ 복음(루카 21,5-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계시다. 그분은 자신들의 종교적 제도로 말미암아 폐쇄적 집단이 되어버린 유다교도들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계시며, 이 버림은 결국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신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낡은 옛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나, 새 세상을 맞아들이기 위해 제자들은 또한 갖은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고 이를 감수해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새김]

■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은 선(善)으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뜻대로 구원되어 평화와 행복의 질서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한다. 그러기에 그분의 말씀이 때로 거침없는 질타와 가혹한 응벌을 내용으로 할 때에도, 구원을 위한 회개를 이끌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음을 직시하며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원의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있다. 상당수의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일상사를 소홀히 하거나 포기한 상태에서 문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 오늘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 ‘아니다!’이다. 주님의 날은 꼭 오리라는 믿음 속에(제1독서) 좌절과 포기의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흐름을 바탕으로 매사에 더욱 충실한 삶(제2독서), 갖은 반대와 박해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삶의 자세로(복음) 그날을 준비해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헛되이 내세우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주님은 분명 생명을 약속하셨다. 매사에 충실한 가운데 복음을 증언하려는 신앙 자세로 이 한 해를 살아왔는지 반성하며, 새로운 신앙의 한 해를 조심스럽게 준비하기로 하자.

교우 여러분, 주님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참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

수원교구 김건태 신부
2022년 11월 13일
  | 11.14
521 78%
제1독서(말라 3,19-20ㄴ)는
악한 이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를 대조시킵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기원전 538년) 뒤에도 일부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라면서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또한 거만한 자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오히려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면서(말라 3,13-15)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 혹독한 심판 날을 예고하십니다. 인간이 행동하던 시대가 닫힐 때 모두 불에 타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시대가 열리게 되면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이에게는 태양이 떠오르지만, 악을 저지르는 이에게는 불붙는 화덕이 다가갈 것이고, 선한 이는 펄쩍 뛰는 송아지처럼 기뻐할 것이지만 악한 이는 바싹 마른 검불처럼 될 것입니다. 또한 거만하고 악을 저지르는 이는 재로 변화되겠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는 하느님의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잠깐 숨어있으면”(이사 26,20) 정의의 직무를 수행하는 의로움의 태양 빛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때가 되면, 악한 이들과 하느님을 경외하는(의로운) 이들의 운명이 뒤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루카 21,5-19)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재난을 예언하는 종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마감합니다. 유다인들이 독립전쟁(66-70년)을 일으켰으나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불태워버림으로써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 뒤 황제(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의 남아 있던 벽마저 허물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이 사건을 바로 “하느님께서 찾아오신”(19,44) “최후의 날”이며(21,2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21,24)이 실현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실제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요한 2,19)인데,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하신 것처럼 떠들어댔습니다(마르 14,58).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마르 15,29).

바빌론 유배 이후에 재건한(기원전 515년: 하까 1,4-15) 예루살렘 성전을 대 헤로데 임금이 두 배로 확장하는 공사(기원전 19년부터)를 할 때(46년 동안),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요한 2,20). “예루살렘 성전을 보지 않고서는 화려한 건축물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성전에 돌을 쌓은 형태가 마치 파도가 들고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돌들 위에 돌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전을 지은 인간의 업적은 찬양하면서 하느님과 만남의 장소라는 거룩함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이며, 그때 드러날 표징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루살렘의 폐허에 대한 예언(미카 3,12; 예레 26,6)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유다인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언제인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들은 예수님께 구세주가 언제 나타나실 것인지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11,16) 아름다운 성전 파괴에 대한 표징(1코린 1,22)을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의 다가옴처럼(17,20-21),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요한 8,24; 마르 14,62), 또는 “때가 가까웠다.” 할 터인데,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사회-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세상 종말의 현상으로 이해했습니다(이사 19,2; 예레 4,20). 사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테살로니카(70-75년경)에 그리스도로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나 종말이 닥쳐 그리스도께서 재림했다면서 신자들을 현혹시켰습니다(2테살 2,2-3).

두 번째 표징으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고, 종말에 있을 심판이 끝이므로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와 맞서 싸우다가 처참한 운명을 맞았기 때문에 독립전쟁은 유다인들에게는 비극이었습니다(21,20-24). 어쨌든 이런 전쟁과 반란의 소문이 퍼지면 무서워하는 것은 물론 온갖 소문이 떠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루카는 이 두 가지 사건을 예수님의 예언(17,20-21; 21,6)이 적중한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세 번째 표징으로,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셨는데, 종말의 전조이며,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라고 유다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이사 13,6-15; 하까 2,6-7). 네 번째 표징은 앞의 세 가지 표징이 일어나기 전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듯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박해가 있을 터인데 하느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며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 회당에 끌려가 박해를 받았으며(1테살 2,14), 로마 총독들과 헤로데 대왕의 박해를 받았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네로 황제에게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64-68년). 예수님께서 박해의 기회가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 하셨듯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자들과 가까운 친척들의(12,52-53) 박해 가운데서도 성령의 도움으로(마르 13,11) 지혜롭고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말씀처럼 예수님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정파탄의 참상(미카 7,6)을 겪었으며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끝까지 박해를 견뎌냈습니다.

제2독서(2테살 3,7-12)는
종말을 대비해서 복음을 전해준 이들을 본받으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날이 왔다고 떠드는 이들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자기들로부터 받은 전통(복음)을 따르지 않는 형제를 멀리하라고 권고했습니다(2장). 그런데도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살면서 일하기는 싫어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경고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물론 신앙적으로도 모범을 보여주었던 바오로와 동료들은 지난날에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돌이켜보라면서 그들과 함께했던 삶을 회고합니다. 바오로는 복음을 전해준 수고의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음에도 거저 얻어먹는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급자족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테살로니카 사람들이 자기들을 본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모범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루카는 70년에 있었던 유다와 로마의 전쟁으로 인한 처참함을 보면서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21,10)이 적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듯이,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말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에 맡겨드리고 우리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죽어서 하느님을 빨리 뵙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이 온다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죽을 것이고, 모두 하느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종말이 코앞에 다가왔을지라도 정의를 실천하고 선한 일을 한 이들은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뵐 수 있어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충실하게 섬기는 이들은 의로움과 자비의 태양 빛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뵙는 최고의 행복(至福直觀)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종말은 “아직” 나에게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걸어가는 순례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삶을 완성해야 하고, 그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지상 생애의 삶에 대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무질서하게 살지 말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혼란과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지라도(루카 21,11)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을 뵙는 일이 끝입니다. 주변에서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감언이설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속이려고 감언이설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복음적 바탕이 없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며, 무조건 열정만 앞세우도록 조장합니다. 열정과 열심이 있다면 분별력을 항상 동반자로 삼아야 하며, 복음이 늘 분별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속의 잣대로만 세상을 판단하려고 할 때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서 깨달아야 하는 하느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을지라도 악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굳건한 믿음과 성실함, 그리고 인내로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

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11월 13일
  | 11.14
521 78%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를 알아듣게 이끌어주시고 제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끝 날에 대한 이야기다. 끝 날이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그날에 일어날 표징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 이야기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도 끝 날에 대해 이야기한다.(마태 24장; 마르 13장 참조) 복음서에서 말하는 끝 날은 물리적 시간 개념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여러 사건과 상황이 끝 날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되었다, 끝 날이 왔다고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일 뿐이다.(8절 참조)

그 사건과 상황은 하나의 현상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벌어질 수 있는 이 세상의 현상이다. 먼저 대두되는 현상은 잘못된 가르침에 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8절에 사용된 동사 ‘플라나오(πλανάω, 속다)’는 길을 잃어버려 헤매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이단을 가리킬 때 사용한 동사다.(2요한 7절; 묵시 2,20 참조) 예수는 그 뒤를 따라가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8절) 잘못된 길에는 그리스도로 자처하는 이와 세상 끝 날이 왔다고 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명확하다. 누가 그리스도인지, 언제가 끝 날인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끝 날의 표지는 끝 날임을 확증하는 이들의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끝 날이 언제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오늘 복음은 답하지 않고 있다. 답답할 정도로 끝 날에 벌어질 표징적 사건과 상황만 나열한다. 전쟁과 반란 그리고 자연적 재앙, 더 나아가 박해와 대립이 나타난다. 모두가 예수 시대에 팽배했던 묵시주의적 사상에 기반한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이사 13,10; 에제 14,21;32,7-8; 아모 8,9) 이러한 상황들은 어찌 보면 피하고 싶은 불편한 일들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무서움을 안겨줄 일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오히려 당당히 맞서 증언의 기회로 삼을 것을 권고하신다.(13절)

끝 날은 새로운 시작의 때다. 떳떳이 나서서 미움과 박해를 꿋꿋이 이겨내는 증언의 시작이다. 언변과 지혜는 예수께서 주시니(15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의 시간’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19절) 끝 날은 인내를 살아가는 시간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는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세상의 논리에도 굴하지 않으며, 그로 인한 폭력과 저항 그리고 미움에 당당히 맞서는 시간이 끝 날의 시간이다. 어찌 보면 끝 날은 저 미래에 펼쳐질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네 일상 안에 비일비재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현상이리라. 거짓에 굴하여 끌려가지 않는 시간, 그래서 내 자리를 어쨌든 지켜내는 노력, 그 때문에 끝 날의 시간은 묵시주의적 현상들보다 더 어려운 시간일 수 있다.

묵상(Meditatio)

경쟁하고 노력해야 살아남는 세상에서 ‘인내하라’는 메시지는 패배자의 자위적 명제가 되고 만다. 어떻게든 개척해서 자기 삶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제일인 양 떠드는 세상에서 인내라는 덕목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의 답답한 소리 정도로 치부되고 만다. 세상의 주류가 외치는 소리의 대부분이 이렇다. ‘이렇게 살아야 잘된다’, ‘저렇게 살아야 맞는 삶이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삶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 등. 이는 소위,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말들이다. 제 삶을 개척하기보다는 남이 제시한 삶에 순응하고 살아가라는 말들이다. 어찌 보면 엄청나게 현실적인 말들 같아도 되돌아보면 제대로 된 현실에 눈을 감게 만드는 아둔한 말들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고, 저기에 세상 끝 날이 있으니, 너는 나를 따라라’ 하는 식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수동적 삶은 세상의 논리에 거슬러 꿋꿋이 증언하는, 그래서 그 증언 때문에 주어지는 숱한 박해를 인내할 수 있는 삶과는 참으로 동떨어진 듯하다. 이 나라에 불법과 부정이 흔히 발생하는 것은 세상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세상에 대적할 만한 ‘끝 날의 인내로운 증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Oratio)

그분께서 오신다.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께서 오신다. 그분께서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성실하게 다스리시리라. (시편 96,13)

----------------------------------------

성 바오로회 박병규 신부
  | 11.14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42   그리스도와 대축일 성경 말씀 해설  [5] 311
841   [수도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  [14] 4057
840   [인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입니다.  [5] 3874
839   [수원] "천국 왕의 고난과 죽음"  [6] 3404
838   [서울] 진정한 왕직은 봉사직  [9] 3395
837   [안동] 봉사의 삶  [5] 3250
836   [대구] 왕이신 예수님과 부활  [3] 3234
835   [마산] 왕이신 그리스도  [5] 3443
834   [부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의 의미는?  [6] 3929
833   [전주] 예수님은 왕이신가?  [1] 511
832   [광주/제주] 예수, 왕중의 왕  [2] 3511
831   [청주] 감사의 생활  [3] 594
830   [대전] 우리의 왕은 이렇다.  [4] 3468
829   [군종] 왕 - 섬기는 사람  [2] 654
828   [의정부] 감동을 주시는 왕  [2] 473
827   [원주]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4] 3282
826   [춘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4] 3483
825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성서주간) 독서와 복음  [5] 3132
  연중 제33주일 성경 말씀 해설  [5] 163
823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과 한국주교단 담화문  [1] 839
822   [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10] 3483
821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566
820   [광주/제주] 가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그들’이 아닌 ‘우리’!  [1] 44
819   [대구] “희망의 징조"  [3] 2461
818   [수원] 정해진 시간과 일들 안에서  [4] 2928
817   [인천] 예수님은 스포일러(spoiler)  [4] 2968
816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  [4] 2751
815   [마산] ‘차라리’와 ‘그래도’  [1] 2896
814   [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산다  [5] 3235
813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2] 584
812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2] 3107
811   [군종]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133
810   [의정부] “예수님 한 분만 이상하다”  [4] 1115
809   [원주] 재난의 시작  474
808   [춘천] 신념  [4] 2772
807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6] 2651
806   연중 제32주일 성경 말씀 해설  [4] 137
805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9] 1962
804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4] 2723
803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5] 3224
1 [2][3][4][5][6][7][8][9][10]..[22]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3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