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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 45.2%
[의정부/수원/원주] 질병과 죄
조회수 | 526
작성일 | 23.03.21
[의정부] 질병과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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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구절은 예수께서 베짜타 연못가에서 38년이나 앓던 병자를 고쳐주신 후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육체적인 병과 죄를 연결시켜 설명하시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육체적인 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병을 낫게 하셨으니 죄를 용서받은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크기에 상응하는 벌이 생깁니다. 이 벌은 저질러진 죄를 보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벌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죄를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벌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집니다.
주어진 병 또한 우리의 무분별한 삶의 방식이나
그리고 인간이 저지른 자연훼손, 공해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병고를 인내롭게 견디는 노력을 통해 십자가상의 육체적 고통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 보상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 불편함과
질병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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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신부
528 45.2%
[수원] 너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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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은 베짜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를 치유한 기적의 사화를 전해주고 있다.

환자들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가는 환자는 어떤 병도 치유될 수 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말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물이 움직이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여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거기에 38년이나 병을 앓은 환자, 아무도 그의 도움이 되어주지 않았던 그에게 말을 건네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러한 일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설명하시지 않고 그를 치유시켜 주신다.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를 알아볼 수 있다.

우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하신다.

환자는 38년이나 병으로 고생을 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되어 자신이 점점 버림받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래서 주위에는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간절히 낫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연못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도 물이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소망 때문에 은혜가 베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만일에 우리가 지금 이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리고 현재 상태에 안주하고 만다면, 우리에게는 변화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사순 시기를 살고 있다.
이 사순 시기가 참으로 은총의 때가 되도록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그 변화란 바로 내가 받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간절히 바래야 한다.

또 예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하신다.

이것은 마치 우리에게 “네 자신의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모두가 당신의 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뒤에 쳐져서 팔짱끼고 있는 무관심한 자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참된 기적이란 우리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서로 일치할 때,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아무 노력 없이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감나무 밑에 입을 벌리고 드러누워 있는 게으른 사람과 같다. 감을 따기 위해서는 도구를 사용하건 어떻건 간에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낫기를 원하느냐?”
우리는 그분에게 어떤 답을 드릴 수 있는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사순 시기가 나에게 진정으로 큰 기적을 이루는 때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바뀔 수 있는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변화라는 기적은 우리가 지내는 부활이 진정 은총의 시간이 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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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3.21
528 45.2%
[수원] 바라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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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햇볕이 너무도 따가운데다가 쉽게 오아시스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과 식량도 다 떨어져 두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들은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격려하면서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쓰러질 만큼 지쳐 있었지만, 아들이 실망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앞에 무덤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 무덤을 보자, 아들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보세요, 아버지. 사람들이 이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해 결국은 저렇게 죽고 말았잖아요. 우리도 아마 곧 저렇게 될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침착하게 아들을 달랬습니다.

“얘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사막을 거의 다 건넌 것이야.”

두 사람은 용기를 내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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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바라던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희망마저 버린다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 포기해야만 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희망은 끝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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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떤 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다가 잘못하여 냉동 창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이 냉동 창고를 열어보았을 때 자신들의 동료가 꽁꽁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기했던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고장 나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몸이 얼어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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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은 38년이나 자신의 병이 고쳐지기를 기원하며 매일 베짜타 연못에 나와 있는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38년이란 숫자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감안하면 평생 기다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가 하루 전에 희망을 잃고 그 곳에 나오기를 그쳤다면 그는 그렇게 죽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희망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치유 받은 병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나 한 번 보십시오.

베짜타 연못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모르고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주위에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가파르나움에서 고쳐진 중풍 병자처럼 그를 들어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을 사람들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이름도 몰라 태생소경처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해주셨지만 심지어는 누가 자신을 치유해 준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는 그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알려서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박해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삶을 바꾸기를 절실히 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손수 그를 찾아가 구원해 주신다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종교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삶이 바뀌기를 원합니까?
그러나 잘 안 됩니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찾아가 청하지도 않은 기적을 주시는 분인데 하물며 당신을 믿는 우리들에게야 얼마나 빠르게 응답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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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03.21
528 45.2%
[수원] 낫기를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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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대단하다.
38년이나 병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곳에 누워 기다렸다.
그는 인내심이 없었다면 자포자기 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힘에 눌리고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복음 5장 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복음 5장 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복음 5장 8절)

“일어나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져주면서,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라고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 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 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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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7년 3월 28일
  | 03.21
528 45.2%
[원주] "일어나 걸어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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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는 원래 다윗 왕가의 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 차독 가문의 ‘부지’사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빌론으로 여호야킨 왕이 잡혀 갈 때 함께 유배를 갔는데 바빌론 크발 강가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습니다.

에제키엘 서는 총 48장의 긴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천사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려갑니다.

그는 환시이지만 성전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그리고 다시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것을 봅니다.

물은 흘러 갈수록 양이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그 물이 지나가는 이쪽저쪽에는 수많은 나무가 있었고 그 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그 물이 되살아나고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나무에는 온갖 과일이 열리고 잎도 시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물이 성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제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곳 ‘양 문’ 곁에는 벳자타라는 못이 있는데 서른여덟 해 동안 잘 움직이지 못하고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복음 5장 6절) 하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그 병자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복음 5장 7절)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곧 건강하게 되어 들것을 들고 걸어 갑니다.

그러나 그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닌다고 주의를 줍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신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복음 5장 14절)

그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를 고쳐주셨다고해서 주님을 더 박해합니다.

태중 소경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을 때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서라고 박해했는데, 이번에는 서른여덟 해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이를 고쳐주셨는데 또 안식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벳자타 못가에서 치유를 받은 환자가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께서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듯이 주님을 더욱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겪이지요. 이 치유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미래를 향한 단막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도 표현했듯이 성전의 물이 흘러 사막에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해주듯, 죽은 물에 그 물이 흘러 생수를 만들어 생명이 살 수 있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내어 주시고 친히 성전이 되시어 소경도 앉은뱅이도, 문드러진 나병환자도 생기 있는 몸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거룩한 사순절을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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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17년 3월 28일
  | 03.21
528 45.2%
“건강해지고 싶으냐?” (요한 복음 5장 1절-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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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복음 5장 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복음 5장 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복음 5장 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요한 복음 5장 10절)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 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요한 복음 5장 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복음 5장 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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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1년 3월 16일
  | 03.21
528 45.2%
신의 장벽을 넘는 법: 장벽 앞까지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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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징 중 세 번째, 벳자타 병자의 치유입니다.
요한복음은 신학적으로 매우 치밀한 전개를 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표징부터 다시 살펴보면 이번 표징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 마리아의 믿음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믿음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해주시는 두 번째 표징이 나옵니다.
왕실 관리는 갈릴래아 사람들과는 달리 ‘용기와 끈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표징이 이뤄지는 곳은 ‘양 문’ 곁이고, ‘벳자타’는 ‘자비(올리브)의 집’, 혹은 ‘베데스다’로 ‘은총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양 무리가 있는 문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교회’가 됩니다.
곧, 벳자타 병자는 교회에 들어오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그리스도를 알지는 못했지만,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컸습니다.
38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병이 치유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번째 표징은 ‘용기와 끈기’가 숫자로 치면 ‘3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구원의 숫자인 ‘40’을 채우려면 ‘은총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롯이 소돔 땅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두’ 천사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과 같습니다.
죄를 이기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병보다도 ‘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하시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종교적으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용기와 끈기’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 친히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면서도 죄에서 벗어나기를 용기 있게 바라지도 않았고 끈기 있게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표징도 주어질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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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한 사람이 말한
‘천재를 이기는 방법’(체인지 그라운드 채널)에
관한 짧은 내용이 있습니다. 소개해 봅니다.

“살다 보면 꼭 한번 재수가 좋든지 나쁘든지 천재를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 사람은 이 천재와 경쟁하다가 상처투성이가 되든지, 아니면 자신의 길을 포기해버린다.
즉, 평생 주눅 들어 살면서 자신의 재능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평생 못 가본 길을 동경하며 살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추월할 수 없는 천재를 만난다는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다.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은 나를 그림 신동이라 불렀다.
학교에서도 그 재능을 인정받아 만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내 실력은 동료들과 다를 바 없는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두 명의 천재는 꼭 있었다.
천재들은 한 달 내내 술만 마시고 있다가도 며칠 휘갈겨서 가져오는 원고로 내 원고를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타고난 재능에 대해 원망을 하며 이를 악물고 그 친구와 경쟁도 해 봤지만, 내게 남는 건 깊은 상처뿐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길이 점차 멀게만 느껴질수록 현실 또한 서서히 타협을 강요했지만 나는 오히려 만화에 미쳐버리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재들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천재들은 항상 앞서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앞서가는 도중에 세상살이가 시시하다고 느낄 즈음, 인간이 넘지 못할 ‘신의 장벽’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은 좌절과 방황을 겪으며 인생의 시계추를 멈춰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다.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앞으로 몇 년이 걸리든 반드시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꾸준히 걸어 나가 어느 날 멈춰버린 그 천재를 추월하는 것이다.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상처 입을 필요가 없다.
작가의 길은 장거리 마라톤이지 단거리 승부가 아니니까.
나는 만화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매일 스케치북을 들고 10장의 크로키를 그려라.
1년이면 3,500장, 10년이면 3만 5,000장의 그림이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그려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좋은 글도 쓰고 싶다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하면 된다.
가장 정직하게 내면세계를 파고 들어가는 설득력과 온갖 상상의 아이디어와 줄거리를 갖게 된다.
자신만이 경험한 가장 진솔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만화가 이두호 선생은 항상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이 말은 언제나 내게 감동을 준다.
평생을 작가로서 생활하려면 지치지 않는 집중력과 지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잠들기 전에 한 장의 그림만 더 그리면 된다. 해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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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현세 씨의 말입니다.
그의 말 중에 ‘신의 장벽’이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천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신의 장벽’입니다.
오늘 벳자타 연못의 병자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신만이 그의 자비로 그 문을 열어주셔서 당신 양 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찾아와서 그 장벽을 넘겨줍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이 ‘38’이고,
그러면 신이 ‘2’를 줍니다.
자기를 스스로 돕는 것이 ‘38’이고, 그 사람에게 신이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시는 것이 ‘2’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와 그 죄를 이기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그 장벽을 넘겨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전에 누워있던 자리를 이젠 들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내가 의지하여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당신 목숨을 거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심지어 사업가들도 그렇게 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 최고 재벌 자리에 오른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나는 일할 때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죄를 이기기 위해 ‘38’을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기 위해 우리 목숨을 거는 숫자입니다.
그때 ‘2’를 그분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는 죄를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런 사람을 위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당신 목숨입니다.
이렇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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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1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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