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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수원/원주] 근면하신 아버지
조회수 | 367
작성일 | 23.03.22
[의정부] 근면하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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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인간세계의 모든 일에 초연한 채로 홀로 계시는 분도 아니고, 엄한 심판관으로 군림하며 인간의 일에 거리를 둔 채 냉정한 눈으로 인간사의 잘잘못만을 살피고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부지런히 인간세계에 드나들며 인간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양심을 일깨우는 끊임없는 영감으로 인간의 마음에 드나드시며, 당신의 사랑이 세상 속에 퍼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고 가르치고 파견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오늘날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같은 하느님의 성실하고 부지런하신 모습을 생각해보면 자녀된 우리는 태만해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이토록 열심히 일하고 계신데 나만 혼자 놀고 즐기며 하느님의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긴장이 풀어질 때, 신심행위와 선행에 게을러지고 싶을 때,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실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 때문에 또 열심히 일하고 계실 예수님을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미안해서라도 나 혼자 쉬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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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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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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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똑같은 하느님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신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인데, 세상의 모든 능력과 통치가 `사람의 아들`에게로 돌아가게 되고, 그분은 장차 온유와 사랑과 평화의 새 시대를 세우실 분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되어 축성된 메시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쓰시면서 이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이는 계속적으로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 때문에도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데, 이제는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여 죽이려 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주게된다.
소위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 나름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 속에서 함께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도 하느님만이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고(신명기 32장 39절 / 사무엘 상권 2장 6절 / 열왕기 하권 5장 7절 참조),
하느님만이 인간을 심판하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신명기 1장 17절 참조).

이렇게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이야말로 신성모독이고 사형을 당해 마땅한 일이었다.
십계명에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아 하느님의 이름도 잊어 버렸을 만큼 하느님께 대해 절대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사고방식으로는 알아듣기 힘든 말씀이었다.

예수께 대한 편견과 오해로 가득 차있는 유대인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살아가는,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 그들과 나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 자신의 편견과 아집 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척하며 급기야는 없애고 마는 삶을 살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야 한다.

그분은 언제나 나의 이웃을 통해 나에게 오시며,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못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대할 때, 미리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런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우리의 급한 성격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사순절의 기간도 반이 지나가고 있다.
이 사순절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죽은 것이 필요하다.
그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태어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면서 언제나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분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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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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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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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복음 5장 17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실상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 했다.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라고 하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으며, 그래서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복음 5장 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나약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힘이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육은 나약하다.
그래서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오 복음 24장 41절)고 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복음 5장 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고 한다. 즉 아버지께서 심판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공경을 받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5장 26절)라고 하신다. 또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한 복음 5장 30절)고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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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7년 3월 29일
  | 03.22
528 45.2%
[원주]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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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하느님의 성전, 그리고 성도 예루살렘도 적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으니까요.

그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에 그들은 하느님도 그들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하느님 변함없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 예언서 49장 14절-15절)

이보다 성실하신 하느님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계약에 충실하신 분임을 깨닫게 하며 갇힌 이들에게 ‘나오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어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을 푸른 풀밭, 샘터로 인도하시며 그들을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하신 하느님 사랑을 잊지 않고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 145장 17절-18절)라고 목청을 돋우어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하신 아버지와 동행하심을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복음 5장 17절)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점점 주님을 미워하며 죽이려듭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5장 18절)라고 요한복음은 당시 예수님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죽이려들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일치하는 당신 자신을 증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요한 복음 5장 19절-20절)

유대인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을 심판하며 그들을 일으키실 권한까지 가지고 계심을 알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복음 5장 25절)

주님께서는 즉흥적이고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실 뿐이라는 입장을 밝히십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 앞에 두 가지의,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기류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변덕스럽고 곧잘 아집에 빠지는 인간의 손에 인간 심판의 권한이 주어졌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불행하게도 없을 것입니다.

조석으로 자기의 판단기준을 바꾸는 이들에게 진정한 성실함이 있겠습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인간 정치판을 보아도 감춘 잇속이 그들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정의와 진실을 바탕으로 하시기 때문에 변함이 없으시지요.

사람의 욕심, 특히 명예욕이 얼마나 사람눈을 가리는지를 예수님을 둘러싼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배우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군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예수님에 의해서 군중의 눈과 귀를 빼앗기고 만다는 자신들 존재의 위협을 받습니다.
이제까지는 대대로 그들은 민중의 존경이었고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권위를 흔들어 놓습니다.

종교가 가르침으로 크게 내세우는 것은 더 없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에서 이탈하면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권위라는 망상에 집착하고 옹졸이라는 벽일 쳐서 누구도 넘나들 수 없게 하며 상대에 대한 독한 보복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듣기에 좋은 것이며 말하기에 좋은 것은 사실 아닙니다.
우리도 입으로 하는 정의니 사랑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복음의 하나라도 실천하며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순절에는 그분의 성실하신 수난의 길을 묵상하며 삶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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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2017년 3월 29일
  | 03.22
528 45.2%
[수원] 하느님 나라에서 많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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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아버지와 대등해진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성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대등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다섯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다스릴 권한을 착한 종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고을은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서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곧 구원에 따른 ‘심판’이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원죄로 심판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로 구원받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이란 이렇듯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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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6주 만에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70년 뒤에 알게 된 여인이 있습니다. 1940년 스물두 살의 페기는 공군 조종사 빌리를 만났습니다. 둘은 단숨에 사랑에 빠지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공군 중위였던 빌리는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로 발령이 나서 부부는 쓰라린 이별을 합니다.

페기와 빌리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고 전쟁 내내 편지 한 통도 받지 못하며 긴 전쟁이 끝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페기는 재혼도 하지 않으며 7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폐기 역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국회의원 톤 베리에게 보낸 편지가 답장이 옵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는데, 빌리는 기록에 따르면 임무 수행 중 실종 상태라고 하고 생사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페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빌리와 관련된 모든 곳을 수소문하며 진실을 밝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페기의 삼촌이 직접 군에 찾아가 군사기록을 밝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 뒤 페기와 친척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한 프랑스 여성이 얼마 전 이미 복사본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페기와 친척들은 당장 그 여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군의 도움으로 그 여성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빌리는 프랑스 마을의 영웅이었습니다. 1944년 빌리는 적의 폭격을 맞아 방트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있었고 전투기는 화염에 싸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빌리는 그냥 추락한 게 아닙니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종간을 마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며 인적이 드문 장소에 추락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빌리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까지 치러주었고 70년 동안 매년 빌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방트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에 빌리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빌리의 유골은 노르망디 국립묘지로 옮겨졌고, 방트 마을 빌리의 무덤은 영웅을 추모하는 의미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페기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70년 만에 남편을 만난 페기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결혼 6주 만에 사라진 남편’,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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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보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빌리의 희생으로 방트 마을 수백 명의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심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교회라는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십니다. 교회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다스림을 ‘왕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교회라는 마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교회를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그대로 행하여 하늘 나라에서 여러 고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작은 마을이 생기듯, 우리도 사랑하면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마을이 있고,
마더 데레사가 만든 마을이 있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만든 마을이 있습니다.

모든 마을은 그리스도를 따른 피의 희생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결과물은 이렇게 나의 피로 세워진 사랑의 공동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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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1년 3월 17일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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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부산/대구/안동/전주/청주] 성전은 분명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  [6] 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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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   [수원/춘천/대전/원주] 소경 바르티매오  [3] 1467
1608   [인천/서울]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3] 1448
1607   (녹)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 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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