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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원주] 종말론적인 삶이란?
조회수 | 93
작성일 | 22.11.24
[수원] 종말론적인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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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29-31절)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 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서가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 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벌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새로운 세계를 완성하시는 과정으로서의 죄 많은 인간들과 세상이 겪어야 하는 진통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모습은 마태 25장에서 말씀하시 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신경을 써서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도적과 같이 오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오히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내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여 끝맺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그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것이다. 그 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 있는 삶이며, 예수님께서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 때 그 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이 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 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흥청대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든지, 쓸데없는 세상 일로 마음을 빼앗기는 등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나 분명히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면서 항상 깨어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이 깨어 있는 삶이 우리를 항상 그분 안에 있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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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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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돋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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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침엽수 세 그루와 이름 모를 활엽수 한 그루만이 덩그렇게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뒷마당의 잔디는 관리를 하지 않아서 가을 잔디처럼 누런 빛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바라보던 남편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저 옆집 잔디 좀 봐. 정말 파랗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더니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기 시작했다. 비료를 사다 뿌리고 잔디가 패어 나간 곳에는 씨를 심었다. 1주일쯤 지났을까? 잔디들이 파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젠 앞마당의 활엽수도 제법 그늘을 드리워서 화분 분갈이를 하거나 꽃모종을 할 때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하면 꽃이 없는 나무지만 꽃이 가려져 있을 뿐이지 사실 인류가 재배해 온 가장 오래된 과일나무 중 하나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난 후에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 무화과나무 잎이었다(창세 3,7). 나무에 잎이 돋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와 봉사의 잎으로 무성해지면 우리의 믿음도 여름처럼 뜨거워질까?

이곳 캘거리는 유난히 겨울이 길다. 기나긴 겨울을 보낸 탓일까? 봄이 오면 집집마다 정원을 손질하는 손길이 무척 바쁘다. 동네마다 가장 예쁘게 꾸민 정원을 뽑아서 상을 주는 행사도 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그 집 주인이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사계절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상태를 보면서 신앙을 점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나무에 물을 주듯이 기도생활을 좀더 열심히 해야지.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많이 방문해야지’ 결심은 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어제는 작은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한국 친구들끼리 모여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날 딸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내 마음에 찍혀 눈물짓게 했다. 그 친구의 엄마는 한국에서 이민 올 때 근육암 수술을 받았는데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암이 재발했다. 앙상하게 마른 손과 발, 힘없이 웃으며 서 있던 모습! 야채전을 좋아하는 그 자매를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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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재 : 캐나다 캘거리 성 안나 한인 천주교회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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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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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은 주요 주제입니다. 지하의 열쇠와 사슬을 들고 있는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 천사는 악마이며 사탄인 그 옛날의 뱀을 붙잡아 천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그 사슬로 결박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심판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어좌들에 있는 모습과 예수님에 대한증언과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순교한 이들을 봅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어서 흰 어좌에 앉은 이들과 높고 낮은 사람 할 것 없는죽은 이들을 봅니다.

그리고 책들이 펼쳐지고 또 한 권의 생명의 책이 펼쳐지는데 그 안에 적혀 있는 저마다의 행동에 따라 죽은 이들이 심판을 받는데 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심판이 마감되며 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시를 봅니다. 이미 있는 하늘과 땅, 바다는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새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무화과 나무 비유를 들어 종말의 ‘때’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29-31)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 도래에 대해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절의 변화처럼 하느님 나라는 틀림없이 온다는 사실을“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라는 말씀으로 재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한계로는 어쩔 수 없이 시공 안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세상, 하늘과 땅, 바다까지도 사라지고 새 세계, 새 천상 예루살렘이 하느님으로 내려온다는 묵시록 저자의 표현은 더더군다나 도식적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하기야 인간이 과학이 발달하고 우주를 연구한다 해도 아직까지 그 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한 줄의 글이나 한 마디의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한 우주’는 더더군다나 우리를 아주 작은 존재로 만듭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이 제시하려는 ‘어떤 근거’를 넘어 상상으로도 그 광할한 우주, 행성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지구를 그 하나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시공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광활한 우주의 시공간에서 찾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시작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십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 있다.’,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희랍어 원문 ‘너희 가운데’라는 뜻인 ‘엔토스 휘몬 ἐντὸς ὑμῶν’을 200주년 신약성서에는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이미.’, 또는 ‘바로’라는 부사를 첨부해서 그 뜻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를 ‘너희 마음에’로 고쳐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에는 반박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 나라가 인간의 주관으로 내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해석은 ‘너희가 마음 먹기에 달렸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은근히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분명히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묵시록의 주 주제 중에 하나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왕국 위에 놓은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이사 9,6)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던 주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9,36)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따르며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에서 이론적인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바로 묵시록의 저자도 표현하듯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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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22년 11월 25일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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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례를 어떻게 미리 준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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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설명하신 이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다 일어나게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변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넘으면 가을, 겨울로 간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조금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2-33)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한 세대 안에서 다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는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종말의 내용이 각자의 죽음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으로 밖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가 부임한 본당은 연령대가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장례도 많이 납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여름에 부임하고 나서 스무 분 정도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많이 돌아가셨는데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 분은 한 분 밖에 안 계셨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코로나가 있어도 성당에서 장례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편의상 부모의 장례미사를 빈소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전 아무리 그래도 평생 다니던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하고 신자들에게 기도를 받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인들도 그러한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모습이 있을까요?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리고 코로나의 영향도 크겠지만, 어쩌면 한 번도 자녀들에게 당신의 장례미사는 꼭 성당에서 하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장례미사가 번거롭기는 해도 부모가 남긴 유언을 자녀들은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하는 자녀들도 성당에 나와 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그 한마디 말씀을 안 하고 가신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무언가를 할 때 잘 되는 일이 있을까요? 시험공부를 안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요? 연습을 전혀 안 하고 운동하면 잘 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죽음이 쓸쓸하게 되는 이유는 준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오듯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순서대로 좋은 장례가 되게 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본 가장 위대한 장례미사는 이태리 마체라타 교구의 톨렌티노 본당에서 한 장례미사입니다. 3개월 암 선고를 받고 3년을 사시며 돌아가신 한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성당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례미사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3년 동안 자신의 장례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장례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지표가 됩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웃고 모든 이가 울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장례미사는 자녀들이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없다면 자녀와 같은 사람들을 만들면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힘만으로는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가 준 명령, 곧 생존의 명령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편영화 ‘아바리야’(Avarya)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로봇과 함께 우주를 배회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지구가 멸망하자 이 노인은 자신의 로봇에게 자신이 살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노인은 지쳐 있습니다. 이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는 일을 멈추고 그만 죽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리고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 까지도 계획해 놓았습니다. 주인이 죽으면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주인을 사이보그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로봇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해야 해서 주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죽어도 계속 살려냅니다. 그렇게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자녀가 우리에게 받는 명령은 그저 생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그 본성상 누군가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로봇을 자녀로 보았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에게는 지옥이 됩니다. 같은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의 네 번째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인데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지 않으면 사랑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신앙을 잃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부모에게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장례에 충실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엔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가 신앙을 잃어갈수록 노인들은 대접을 못 받습니다. 자녀가 마치 모기처럼 돈만 알고 자기 편안함만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최저이고 노인 빈곤율이 최고입니다. 그만큼 신앙교육이 안 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내가 효도를 받고 싶다면 자녀가 신앙인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머물던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효도를 받게 될까요? 자녀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효도를 받게 됩니다. 모세가 그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자신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저는 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매우 이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는 부모님께 해야 할 의무를 최대한 다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비난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물론이요, 부모님과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아버지 장례미사에 그렇게 많은 신자가 와서 기도해 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장례를 치르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저를 사제가 되게 허락하신 때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자녀에게 효도를 받고 싶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십시오. 이웃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첫 번째 이웃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가졌다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무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왜 이러한 상황에서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보다 학원에 보낼까요? 부모의 마지막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마지막 때 부모의 영광은 자녀들의 신앙의 수준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 명령 시스템을 신앙으로 바꿔주십시오. 아니면 육체적 자녀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새로운 자녀들을 탄생시키십시오. 이것이 미래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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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2년 11월 25일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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