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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조회수 | 206
작성일 | 22.12.21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돌파해
들어간 영혼은 거기서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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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쏜살같이 지나간 대림시기를 돌아보며, 오실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회한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뭘 좀 해보려고 해도 모든 것이 꽉 막힌 팬데믹 시대, 망연하실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나자렛의 마리아는 주님 성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1장 46~48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마리아는 주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 앞에 감사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찬미가가 터져나왔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는 그분의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겠지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마리아의 생애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감사하는 찬미가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림 시기, 오실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기보다는, 성탄의 은혜, 무한하신 하느님 사랑의 은혜에 대해 묵상하며 우리 역시 마리아처럼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겠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멀리서 천천히 그분께서 내 가까이 다가옵니다. 가슴이 뛰고 설렙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좋아 껑충껑충 뛰며 그분께로 달려갑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던지, 충만한 감사의 표현으로 마리아의 마음이,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기뻐 뛰었습니다. 우리 역시 가슴 벅차고 설레는 마음으로 주심 오심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주님 성탄을 맞이하는 마리아가 우리와는 달리 그렇게 감사의 찬가를 부르고, 가슴 셀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뻐 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소유하고 있었던 지극한 겸손의 덕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1장 48절) 겸손의 대가 마리아께서는 단 한번도 주님의 어머니가 된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우쭐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은총이 그저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에 도무지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까? 매년 성탄이 돌아오지만 아무런 감흥도, 특별한 느낌도 느낄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윗쪽이 아니라 저 아래로 좀 내려가보는 것입니다. 밝고 휘황찬란한 곳이 아니라 춥고 어두운 곳에 좀 서 있어 보는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도심 한 가운데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기 보다 칙칙하고 보잘 것 없는 변두리로 내려가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근저(根底)이자 하느님의 근저인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돌파해 들어간 영혼은 거기서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초탈과 돌파를 통해 모든 허상(虛想)과 결별하고 그 근저의 순수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느님 아들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마이스터 엑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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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0년 12월 22일
533 50%
사회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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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가 잘못되면 아름다운 집도 무너지고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세상도 빈부의 차이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 충돌로 전쟁이 일어나고 절망의 길로 떨어집니다. 이를 방지하는 길은 오늘복음에 하느님의 전능한 팔로 사회개혁을 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비천한 자 굶주리는 자, 일으켜 세우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신다고 하십니다.

개혁의 필요성은 바로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성, 평등성, 즉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고 사람은 자기 권리를 찾을 의무가 있습니다. 개혁의 주체는 하느님이시고 근본 사상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 뜻을 이 땅에 실천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아니 자기 자신임을 의식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은 마음속에서부터 자비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며 보충하고 협력하며 목숨을 내어놓고 정의 실천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입니다.

저녁기도에 늘 ‘성모의 노래’를 하고 레지오 마리애 군대가 기도 중에 성모의 노래를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의 힘으로 악의 무리를 쳐부수고 선한 사람이 살도록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결의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찬미가의 노랫말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맞이는 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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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석진 신부
2015년 12월 22일
  | 12.21
533 50%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내려놓으니 기쁨이 다시 시작됩니다. 마리아의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변화는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내면의 기쁨으로 초대하십니다. 내면의 기쁨이란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기쁨입니다. 하느님만이우리 마음을 어린 아이들처럼 기뻐 뛰게 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의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내면의 기쁨은 인간을 향해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잃어버린 내면의 기쁨과 고요를 되찾아주는 선물의 시간입니다. 우리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면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 감정들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울어주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먼저하느님께 집중되고 무엇보다도 앞서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봉헌하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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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15년 12월 22일
  | 12.21
533 50%
참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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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 사무엘 아이를 봉헌하는 한나를 보면서 스친 말마디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두분의 감사와 찬미의 노래가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한나가 하느님께, 또 복음은 마리아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특히 ‘마니피캇’이라 불리는 성모찬가는 우리 가톨릭 수도자는 물론 모든 신자들이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님과 함께 즐겨 부르는 기도입니다. 두 분 다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빔의 영성을 대변합니다. 예나 이제나 아나빔의 영성을, 정신을 사는 이들이 아름답습니다. 고귀하고 존엄한 품위의 사람입니다. 얼마전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8,852 m의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정상을 1,000미터 앞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도가 아니라 태도라는 사실이다 ”-존 맥스웰의 ‘태도’ 중에서 -

이건 제가 산티야고 순례 중에도 깨달은 사실이고 우리의 영성 생활에도 직결되는 진리입니다. 산티야고 2000리 장거리 순례의 성공 비결은 체력도, 정신력도 아니 ‘간절함’이란 영혼의 태도요 자세라는 것입니다. 수도 생활이나 기도 역시 관건은 '있고 없음'의 소유의 유무가 아닌 시종일관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자세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와 한나의 영혼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간절함의 자세입니다. 이런 간절함이 시류와 야합하지 않고 정신적, 영적 귀족으로 한결같은 품위의 봉헌의 삶을 살게 합니다. 마니피캇 서두의 고백은 늘 들어도 신선합니다. 아나빔의 고귀한 정신이 잘 들어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나빔의 영성을, 자세를 사는 이가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신뢰와 겸손, 희망과 기쁨을 두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성모님을 닮은 아나빔의 후예들입니다. 새벽에 얼핏 읽은 어느 일간지의 2016 신춘문예 시詩에 대한 예심 결과의 평중 일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세월호나 세 모녀의 자살 사건, 시리아 난민 이야기 등 유난히 시사적인 소재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세계의 비참이라는 무게감에서 미적美的으로 승화昇華되는 부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올해의 경우 역시 잘 쓴 시들은 많은데 '울림' 있는 시들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목할 말마디가 '미적美的 승화'와 ‘울림’입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아름다움이 감동을 주고 마음을 정화합니다. 바로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시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성모님의 ‘마니피캇’은 늘 불러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한나의 고백 역시 역시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눈물겹도록 가난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한나입니다. 이어 터져 나오는 한나의 하느님 감사 찬미가가 바로 방금전에 바친 화답송입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임을 깨닫습니다.

한나에 사무엘이요 엘리사벳에 세례자 요한, 마리아에 예수님입니다. 비단 성서의 예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수없이 확인되는 바 이런 어머니들의 모범적 삶의 자세입니다.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등 삶의 자세는 그대로 자녀들에게 유전됨을 봅니다. 끝으로 어제 읽은 재미난 구절과 이에서 영감 받아 쓴 ‘하느님의 두 젖가슴’이란 시를 나눕니다.

-아비가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였는지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하루는 다윗과 아비가일이 어두운 골짜기를 걷고 있었다. 달도 비치지 않는 컴컴한 밤이었다. 그때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청했다.

“그대의 젖가슴을 풀어 헤쳐 그 빛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추어 주오.”(사랑. 분도출판사, 88쪽)-

전 여기 아비가일에게서 주위를 환히 밝히는 마리아와 한나의 아름다운 영혼의 빛을 묵상했고, 불암산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두 젓가슴’이란 시를 썼습니다.

날마다
바라보는
하느님의
두 젖가슴
한쪽은 크고 한쪽은 작고
짝째기다
불룩한
불암산 두 봉우리

그러고 보니 하느님의 거대한 두 젖가슴 불암산 두 산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아나빔의 영성’을 살아가는 여기 요셉수도원이요, 여기서 환히 퍼져 나가는 ‘하느님 자비의 빛’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어제 수도원 본관의 명칭 공모에도 대다수 형제들이 ‘자비관’이란 명칭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모 마리아를 닮아 감사와 찬미, 신뢰와 겸손, 희망과 기쁨의 아나빔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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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
2015년 12월 22일
  | 12.21
533 50%
신입생 선발을 위한 면접, 서품식 준비 모임, 신학생 동계 연수 모임 장소 답사 등으로 조금 분주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추운 겨울 청계천 길을 걸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시에서는 아름다운 조명을 꾸몄고, 길을 걸으면서 멋진 작품을 감상하였습니다. 명동에서 혜화동 신학교까지 걸었습니다. 지나는 사람도 보고, 하늘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도 느껴 보았습니다. 낭만은 저에게 작은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컴퓨터를 보면 모니터의 글이 흐리게 보이는 것입니다. 컴퓨터로 작업을 주로 하기에 불편하기도 했고, 문득 겁이 났습니다. 눈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 온 것은 아닐까?

고등학교 동창이 안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전화를 하고 찾아갔습니다. 친구도 걱정의 눈으로 저를 보았습니다. 다행히 큰 손님은 아니고, 추운 겨울 찬바람을 많이 받아서 작은 염증이 생긴 거라 합니다. 간단한 검사하고, 친구가 처방해 주는 약을 받았습니다. 치료를 받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잔하자는 말이 더 반갑고, 기뻤습니다. 친구와 만난 것도 벌써 4년 전이니, 도시 생활이 바쁘긴 바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노래’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깊은 영성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펼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셨나이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올 한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 할 일이더군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감사 할 일도 많을 것입니다. 미움, 원망, 분노, 욕망은 잠시 치워두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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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15년 12월 22일
  | 12.21
533 50%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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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들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미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큰일입니다.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 순간 모두가 가장 큰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체온을 먼저 나누십니다. 비천한 마음을 견디어 낸 우리를 당신의 체온으로 건져 올리십니다.

사람들 속에서 큰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비천함이 은총이 되는 순간은 뜨겁습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천함과 굶주림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엎드린 이들을 위로하시며 역사를 바꾸십니다. 작고 큰일도 모두 주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믿음이 은총이 되는 큰일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은총 아닌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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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12월 22일
  | 12.22
533 50%
감사를 넘어 찬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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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마리아 찬가는, 어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엘리사벳의 마리아 칭송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찬가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기쁨을 감추지 않고 토로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리아를 보면서 우리도 기쁨 찬미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기뻐할 일도
찬미할 일도 없다면, 그리고 기쁘더라도 그 기쁨이 그리 크지 않다면
우린 불쌍하고 대림절을 잘못 살고 무엇보다 한 해를 잘못 산 것일 겁니다.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표시이고,
한 것이 있어도,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에게 기쁜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감추거나 누르지 말고 마리아처럼 감사와 찬미로 토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고,
기쁨을 사유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한해의 기쁨이 자기가 이룬 기쁨이거나
기껏해야 이웃과 함께 이룬 기쁨이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이룬 기쁨이고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기쁨이라면
이 기쁨은 반드시 감사와 찬미로 이어지고 표출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 중에 이기주의적인 기쁨이 얼마나 많습니까?
같이 이룬 것을 자기가 다 이룬 것인 양 열매를 혼자 다 따먹고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자랑은 하지만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이룬 것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덕이 있는 사람이 감사한다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찬미할 것입니다.
찬미는 하느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이루신 선과
나와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신 선이 다 하느님 덕분이라고
감사드리는 것이요 감사를 넘어서 칭송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먼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큰일 곧 구원을 찬미한 다음자기에게 베푸신 자비가 자기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침을 찬미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있다면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고,
우리끼리 이룬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신 것이며,
공동체를 통해 내게 이루신 것이요
나를 통해 공동체에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미는 마리아의 찬미처럼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의 구원을 모두 찬미하는 노래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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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신부
2022년 12월 22일
  | 12.22
533 50%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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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 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할 것이다.”(시편 35,9)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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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신부 2022년 12월 22일
  | 12.22
533 50%
빈자(貧者 ; 아나뷤 anawim)의 영성
시의 힘, 노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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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 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2부 여섯째 날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O gentium)”로 시작되는 M후렴이자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어제 ‘명상의 힘’이란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 강론 “빈자(貧者;아나뷤anawim)의 영성-시의 힘, 노래의 힘-”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내적 마음의 치유와 위로의 구원에 명상의 힘, 시의 힘, 노래의 힘은 큰 역할을 합니다. ‘자신을 느끼세요, 판단하지 마세요!’라는 제하의 끝부분입니다.

“자신에 대해 판단하지 마세요. 뭘하든 ‘나’라는 존재는 다 옳습니다. 명상을 통해 순간순간 존재하는 자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명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마라나타-오소서, 주 예수님!” 성구를 되뇌이며 바치도록 권유하는 명상기도가 바로 이런 명상의 진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힘과 더불어 시의 힘, 노래의 힘 역시 내적 상처의 치유에 아주 효과적이니,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어 계속되는 행복기도문은 고백성사 보속으로 소리내어 읽게 하고 자주 기도로 바치도록 기도문도 꼭 나눠주곤 합니다. 또 보속으로 가끔 가톨릭 성가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소리내어 부르게도 합니다.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시의 힘, 노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 산책때 마다 자주 부르는 ‘바다’와 ‘푸른잔디’ 동요외에 80년대 민주화 운동당시 젊은이들의 애국가와 같았던 ‘아침이슬’을 때 늦은 나이지만 너무 좋아해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배밭 사이 산책시 아무도 없을 때 부끄러운줄 모르고 열창熱昌하곤 합니다.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광야의 침묵과 고독중에 하느님만을 찾는 우리 수도승들의 정서에도 잘 드러맞는 시이자 노래임을 늦게서야 깨닫습니다. 가난한 민초(民草;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닌 백성을 일컫는 말)들이 즐겨 부른 노래가 숱한 민요와 가요들입니다.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anawim’ 빈자貧者들이 즐겨부른 노래가 바로 오늘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아나뷤을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믿을 것이라곤 하느님뿐이 없는 가난한 사람인 마리아가 부른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시작되는 마리아의 노래는 정말 혁명적 성격의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가난한 이들을 들어 높으시고 교만한 권력자들을 뒤엎으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을 고백하며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불편한 시요 노래입니다. 아마 독재자들이 들으면 금지시켰을 성격의 노래입니다.

감사시편의 전통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시편의 찬미가는 예수님 어머니의 개인적 감사의 마음을(46-50절), 그리고 계약의 약속을 이행하신 데 대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을 노래(51-55절)합니다. 아나뷤의 역사는 자못 깊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우리의 민중신학은 바로 여기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삶에 기초하며 민초로도 표현합니다. 민초들에게 민요가 있었듯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에겐 찬미와 감사의 시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의 어머니 또한 전형적인 아나뷤의 민초입니다. 엘리에게 사무엘을 위탁하는 어머니 한나의 믿음도 감동적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어 즉시 아나뵘인 한나의 입에서 터져나온 감동적 찬미가(사무엘 상2,1-10)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들이 한나가 노래한 감사와 찬양의 시편이요, 마리아의 노래 역시 여기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한나, 엘리사벳, 마리아 모두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나뷤 어머니들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요 이는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을 봐도 담박 드러납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들은 강합니다. 남자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어머니의 철부지 아이들같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천하무적의 아나뷤 어머니들입니다. 자녀들 역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하느님이기에 이들 어머니의 시편 노래는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시의 힘, 노래의 힘은 우리가 매일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기도의 교과서와도 같은 성서의 시편은 아나뷤의 노래집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가톨릭 교회의 수도자들이나 신자들은 아나뷤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난한 영적 아나뷤이 되어 시편을 노래합니다.

한맺힌 민요나 가요가 아니라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선사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노래가 시의 힘, 노래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바로 시편의 시의 힘, 노래의 힘은 하느님의 힘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기도로 바침으로 살아 계신 주님께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받고 기쁨과 평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이래서 가톨릭 교회나 수도원은 명실공히 힐링 센터가 되곤 합니다. 세상에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아나뷤의 노래인 찬미와 감사의 시편보다 더 좋은 시나 노래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아나뷤 성모 마리아 어머니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 가톨릭 교회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날마다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영적 아나뷤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저녁 시편 성무일도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적 아나뷤인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선물하신 하느님 최고의 시, 둘은 '예수님'이자 이 거룩한 '미사'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날마다 가난한 아나뷤인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미사잔치입니다. 세상에 영육의 전인적 힐링에 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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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
2022년 12월 22일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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