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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대전/수원] 그리스도인의 현실
조회수 | 139
작성일 | 22.12.21
[의정부] 그리스도인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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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으로 기다려온 성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달콤하지만 빛바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기억됨으로써 현재화되어야 할 신비로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이상을 좇아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현실에 매몰되어 이상을 내팽개치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상을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드립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전혀 차원이 다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현실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나라와 복음’이라는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야 합니다. 앞의 현실이 ‘꿈과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현실’이라면, 뒤의 현실은 ‘꿈과 이상을 품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가지 현실 모두를 소중히 품에 안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이라는 삶의 현실에 집착하여, 하느님나라와 복음을 지금 살아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성 없는 숭고한 이상이나 내세에나 주어질 현실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일상생활 안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기 십상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하느님나라와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의 거룩한 장식물처럼 다루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상한 기호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교회를 인간적인 친교의 발판쯤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늘어나지만, 세상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와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비(非)복음적으로 전개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쯤에서 무엇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지, 무엇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현실이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가정, 직장, 사회, 정치, 경제 등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만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몸소 살아야 할 현실’이 아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고상한 이상’으로 넘겨버리는 그릇된 현실 인식만은 경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현실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의 할례식에 아기의 부모와 친척들과 이웃들이 모입니다. 이들은 분명 하나의 시간, 하나의 공간, 하나의 현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아버지 즈가르야와 어머니 엘리사벳이 느끼는 현실과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은 다릅니다.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느냐 아니면 ‘즈카르야’라고 짓느냐라는 문제는 ‘과연 무엇을 절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다름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인간적인 전통을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알려준 대로 아기 이름을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신다,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뜻을 지닌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현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번져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우선적으로 보듬어야 할 참된 현실은 하느님나라와 복음이어야 합니다. 이 현실을 또 다른 현실, 즉 구체적인 삶의 현장 안에서 실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성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하루 함께 하는 이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구원의 현실을 기쁘게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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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201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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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그대! 주님의 손길이 당신을 보살피고 지켜주십니다.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복음 1장 57-66절)

주님 손은 약손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다시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한 줄기 빛이라도 발견한 것마냥 엄청난 기쁨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부제 때에 신학교에서 테니스를 치다 한 쪽 눈에 공을 세게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더니 즉시 다친 쪽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안과에서는 홍체 조절 근육이 손상되어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제 서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앞을 못 보게 되다니….’ 매일 아침마다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눈을 바라보며 ‘난 이제 끝이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한쪽 눈으로 생활하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힘도 없고 의지도 없는, 무기력과 괴로움이 서서히 저를 잠식했습니다. 그렇게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희망없는 마음으로 눈을 떴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 만에 다친 눈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쓰시고자 하시는구나!’ 하는 기쁨과 함께 온 세상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나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생각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손길로 보살펴주십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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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이승현 대건안드레아 신부
생활성서 2022년 12월 23일
  |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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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더구나 하느님의 운동선수인 우리는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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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2년 12월 23일
  | 12.24
533 50%
나의 이름이 누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인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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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신호등 대기를 하는 중에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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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산용 요셉 신부
2022년 12월 23일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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