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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교회의 일꾼
조회수 | 1,672
작성일 | 08.09.24
올여름 서울대교구 부제서품식에서 한국교회 첫 청각장애인 부제가 탄생하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서울 번동본당 박민서 부제로 가톨릭농아선교회 정순오 신부(현 번동성당 주임)의 권유로 사제성소를 생각했고 꼬박 10년이 걸려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각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그분의 바람대로 건청인(건강한 청력=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잇는 다리가 되시기를 기대해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순교선열들의 공로로 아직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배출하고 있지만 일손이 부족한 곳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는 해외의 많은 나라들과,
특히 북한교회와 중국교회를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역할과 책임감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일꾼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를 느끼는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일꾼을 양성해가야 합니다. 사명감을 심어주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 모두 교회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므로
성소자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성소자 감소를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에,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신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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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씨튼 수녀회 최혜영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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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할 때만이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8,25)라는 그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파견된 이들의 목적은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주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이 되게 위해서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신을 따르도록 하셨고(5,1-11), 두 번째,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들을 구성하시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셨고, 그들을 교육시키셨다.(6,12-8,56까지)

그리고 이제 이렇게 준비된 이들을 파견하신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교육의 목적이다. 즉 부르심-교육-파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교육과정이며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교육시키셨고 또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힘과 권한을 주셨다. 오늘 복음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제자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활해야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귀가 갖고 있는 힘과 권한이 아니라(4,32.36) 죄를 사해주는 힘과 권한이다. 이 힘과 권한은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낫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된 사람들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불러 주셨고 양육시켜 주셨고 파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허락된 사람들만 알고 다른 이들은 비유로만 알아 듣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따라서 선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다.

선교를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선교사인가 아닌가는 내가 어디에 있든 또 어떤 신분으로 있든 반드시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고 있는 가에 달려있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이면서 아직까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용기가 없고 또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해야하는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하는 법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없다면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고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그런 교육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훈련을 시키셨다. 오늘 복음 이전의 모든 교육은 바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신 내용들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지려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맹목적으로 믿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하고 묵상한 말씀을 실행하면서 복음적으로 사는 삶의 방법을 훈련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복음 선포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지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들을 묵상하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팡이, 여행 보따리, 돈, 여벌 옷이다. 복음 선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활하신 방법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2,6-7)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코후8,9) 복음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가난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복음선포자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

이토록 가난한 모습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선포는 나의 능력이나 재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코후12,10)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활동하신다.

제자들이 가지고 가지 말아야할 것들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고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지니지 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 선포자는 선교를 떠나면서부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 하지 말고 "그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야 한다. "(마태 6,32-33)

지금은 우리가 이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의 여정은 항상 나만을 위한 생활에서 다른 이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진보하고 성숙해지는 여정이어야 한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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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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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이다. 제자들이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만났던 이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는 나와 같다.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나’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다른 것’과 ‘나(自我)’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세파와 온갖 근심과 걱정, 분노와 격정으로 시달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까? 자신을 돌아본다. 허전함을 느낀다. 은연중에 허전함을 느끼기에 나는 나와 함께 소중함을 찾아 나설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감각의 숲을 헤매기도 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름 모를 강이나 산을 오르기도 한다. 그러다 저 멀리 부르는 나 자신, 거짓일지도 모르는 그 자신에 집착하다 길을 잃기도 한다. 힘이 다해 걸을 기운조차 없다. 들리는 것은 어두운 밤 숲에서 부(富)·권력·명예의 소리만 가득하다. 어디를 가야 찾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선포’하는 이가 ‘선포’하는 중에 만나는 이에게 이런 길을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마음이 머물렀다. 마음은 우리 자신의 의향에 따라 작용한다. 지금까지 예수를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지만 삶에서 다른 어떤 것들에 매달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한데 내 앞에는 수많은 갈림길만이 놓여 있다. 도대체 어느 길이 옳고, 어느 길이 그른 길일까?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나를 휘감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자들을 길에서 만나 다시 당신께 시선을 돌리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놀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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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속회 선교가 박강수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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