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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조회수 | 1,691
작성일 | 08.09.24
▥ 제1독서 :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렛 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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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장 7절-9절

그때에
7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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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보는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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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4,1-12에서는 헤로데에 의해 세례자 요한이 죽은 내력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을 대조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삶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묵상합시다.

1. 가문

헤로데는 영주(분봉왕)입니다. 영주(분봉왕)이란 유대 땅을 몇으로 나누어 그 한 지역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여기 나오는 헤로데의 경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헤로데의 가문은 왕가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2장에 나오는 헤로데 대왕으로 예수님의 탄생 당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의 헤로데(안티파스)은 세례자 요한을 살해합니다. 또 사도행전 12장의 헤로데(아그리파 1세)은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로서 주님의 제자 야고보를 살해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헤로데 가문은 예수님과 악연을 가진 악한 가문입니다.

반면에 세례자 요한은 루가복음 1장에 보면 사제(제사장)의 가문입니다. 늙은 사제 즈가리아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제의 가문에서 태어난 요한은 평생을 주의 길을 먼저 준비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았으며 주님과 의로운 인연입니다. 헤로데 가문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보이는 가문입니다.

2. 의식주

헤로데 왕은 궁중에서 붉은 고급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살았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 보듯이 잔치가 나오면서 온갖 유흥과 좋은 것들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반면 요한은 광야에서(루가 1,80)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좋게 말하면 자연식으로 좀 비참하게 표현하면 짐승같이 살았습니다(마태 3,4).

그런데 누가 하늘나라의 복을 누렸습니까? 화려한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헤로데에게서는 천국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음습한 어두움과 피비린내를 봅니다. 그곳에는 탐욕과 욕정과 음모만이 있습니다. 번민과 갈등과 암투, 원한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빈들에서 살던 요한에게서 우리는 천국을 봅니다. 그는 하늘나라, 천국을 외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3. 양심의 자유

세례자 요한은 의로움을 간하다가 헤로데에 의해 옥에 갇혔습니다(3절). 헤로데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4절). 그러나 정말 누가 갇혔고 누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마르코복음에서는 헤로데의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의 지적을 받고 크게 번민을 느꼈습니다(마르 6,20). 바른 말 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그렇게 한 것으로 인하여 헤로데는 더욱 양심의 자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늘 요한으로 인하여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의 편에 선 요한은 비록 감옥에 갇혔으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양심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두려워하는 것

마태오 14,5에서는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헤로데가 요한을 죽이지 못했던 이유는 민중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민중을 두려워한 것은 민중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민중들의 인기를 잃는 것은 권력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그 맡은 지역을 소요없이 통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진리나 하느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권력을 잃게 되는 것만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두려워 한 것은 무엇일까요? 헤로데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이나 죽음을 당하는 것 역시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마태 10,28). 하느님이 주신 양심의 소리를 분명하게 내므로 죽는 것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사는 것보다 낫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죄를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언자적 삶입니다.

5. 자존심

헤로데가 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벱니까? 자기 자존심 때문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기쁘게 하자... 그는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주겠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치며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어달라고 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고민을 하면서도 주변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요한의 머리를 베었습니다(6-9절). 요한은 그런 자존심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신의 삶에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고 그래서 의를 지키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6. 정말 살아있는 사람은?

세레자 요한은 헤로데에 의해 참수를 당했습니다(마태 14,10-12). 그러나 과연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아 있습니까? 죽었지만 살아있는 세례자 요한, 그리고 살았지만 죽어있는 헤로데의 대비를 보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헤로데의 가슴 속에 살아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혹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습니다(1,2절). 그는 요한을 죽였지만 결코 요한의 그 소리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7.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

주님이 요한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셨나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이보다 더 좋은 평가가 있을까요?
그러나 헤로데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루가복음 13,32에서 주님은 헤로데를 가리켜 "여우"라고 평하셨습니다. 흔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이렇게 동물에 비유를 직접 하신 경우가 없습니다. 여우라는 표현에 담긴 헤로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교활하고 더러운 욕심에 가득 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인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로 보이지만 모든 것을 잃고 마는 헤로데가 여전히 부러운 우리들은 아닙니까? "양심이 밥 먹여 주냐"며 요한을 답답하고 속 좁은 사람으로 취급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게 살기는 싫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바로 잡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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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의 묵상 중에서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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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나온 답변 중의 하나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마르 8,28 참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임금은 자신이 요한을 죽였다며,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다시 살아난 요한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율법에 어긋나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고는 아내의 간계에 넘어가 요한을 죽입니다.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방관했습니다.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십자가의 처형을 묵인하는 빌라도와 닮았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지도자들입니다.

내일의 복음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였습니다(루카 9,20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을 온몸으로 추종합니다.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명분과 체면이 아니라 열정과 희망으로 함께합니다.

이제 정치는 민중의 것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의로운 지도자들도 많아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헤로데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나 베드로와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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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08년 9월 25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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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에는 질긴 악연이 존재합니다. 이 악연은 주님의 탄생 전부터 시작되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의 악연은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평화와 불화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권력에 젖어 사는 가련한 인생입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헤로데가 보기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그러나 그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변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종교도, 정치도 백성이 없이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모두가 백성을 위한 행위이고, 백성이 참여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종교이고, 정치이지요.

헤로데는 그러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 드는 가련한 정치의 수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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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0년 9월 23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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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례자와 엘리야는 공통점이 있는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권력자의 비행을 꾸짖었으며, 간악한 여인의 원한을 산 것도 똑같습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불의를 고발하는 요한 세례자를 처치하자 군중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 다시 되살아나신 분이라 하였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헤로데는 군중들 사이에 퍼진 소문을 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렸을 때 찾아오는 양심의 소리가 불안입니다. 헤로데는 회개하라는 요한 세례자의 진심 어린 충고를 무시하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권력자라 하더라도 죄를 지은 헤로데의 마음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에게 불편한 진리이셨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지만 대면하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둠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빛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고통을 피하고자 빛을 파괴하거나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럴수록 양심의 바늘은 자신을 더 아프게 찌릅니다. 죄를 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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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2년 9월 27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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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 가운데 「코헬렛」의 저자가 가장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흐름을 관찰한 뒤 모든 것은 ‘허무’라고 결론짓는 그의 모습에는 우주의 원리와 인생사의 의미를 캐묻는 고대 철학자의 풍모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저자가 경험하고 확인하는 허무는 경험을 초월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허무이기에 학문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며 넘어서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추상적인 사유를 목적으로 하는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구도자이자 실천가로서의 철학자라 하겠습니다. 그가 직면한 허무는 인간의 수고와 삶 전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코헬렛」을 읽다 보면, 참으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으로 일관하는 ‘허무의 철학’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의 견해처럼, 철저한 현상 인식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의지하는 피상적인 낙천주의를 벗겨 내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저자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 업적과 소유, 지식, 쾌락 따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는 것을 알기에 먼저 그 환상을 깨야 했을 것입니다. 「코헬렛」 1장과 2장에서 말하듯,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알아볼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삶의 덧없음’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즐거움’(코헬 2,24 참조)에 눈을 뜰 때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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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9월 25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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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탐욕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에 젖어 살았기에,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습니다. 한때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영험이 예수라는 자에게서 나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불같은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예언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하느님의 진리로 돌아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종종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법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이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을 견디어 내면 하늘 나라의 영광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헤로데처럼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허무의 심연 속에 빠져들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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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16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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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생겼다가 또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겪게 되는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은 이런 무상하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에, 그 앞날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불안에 떱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을 낫게 해 주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소문은 꼬리를 뭅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헤로데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못 이겨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결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면 나도 믿겠다.”라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헤로데처럼 결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지요. 예수님께서 붙잡혀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징이라도 보려고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루카 23,9 참조). 예수님과 참된 만남을 이루려면 믿음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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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매일미사 2018년 9월 27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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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이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꽤나 유명하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이천 년 동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며 내친 결과가 예수님에 관한 무성한 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졌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의 가치를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소문을 통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다듬어져 왔으니까요.

문제는 다양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한 것은 다른 뜻, 다른 권력, 다른 유명세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죽인 헤로데가, 새로운 가르침을 얻어 새롭게 거듭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헤로데의 호기심은 권력에 대한 애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에 헤로데는 당황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음이, 그 잘못이 드러날까 불안했을 터이지요. 헤로데의 모습이 저의 일상 모습인 것 같아 헤로데의 마음에 한참이나 머물며 이 묵상 글을 적고 있습니다.

무성한 소문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에도 교회는 지금껏 여유로운 의젓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잘못과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잘못과 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솔직히 서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끝기도 때 저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아파하고 용서를 빌겠지요. 다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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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9월 24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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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와 페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당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포레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더 발견되는데(사도행전 2,12 ; 5,24 ; 10,17 참조), 그때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매우 특별하고 기묘한 행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사실 헤로데를 그토록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죽었던 이가 되살아났다는 바로 그 소문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사실 내세의 존재와 의로운 생애에 대한 죽음 뒤의 보상(상선벌악)을 뜻하기에, 헤로데처럼 세상의 재물과 쾌락만을 탐닉하며 오늘만 사는 이는 커다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반복되는 세상사는 그저 인생의 권태로움과 무상함을 일깨워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냉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며 그분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을 이어 가는 가운데, 비로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8, 90년이며,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찰나와도 같겠지요. 감정과 소유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헤로데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와 무상함, 모순과 한계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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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22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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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내려보냈다)  [6] 1958
1566   [수도회] 하느님의 연민(compassion)이 답이다  [3]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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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청주] 수확할 것은 많은데  20
1563   [서울/인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매일의 생활  [2] 592
1562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5] 1771
1561   [수도회] 서로 다가가는 용기를  [5] 875
1560   [전주/청주] 예, 그리스도인입니다.  [3] 582
1559   [수원]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3] 19
1558   [인천/서울] “예, 주님!”  [4] 511
1557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7] 2236
1556   [수도회] 그들이 있기에  [5] 488
1555   [부산/청주/전주]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3] 761
1554   [수원] 사람을 심판하면 믿으나 마나다.  [1] 34
1553   [인천/서울]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말  [4] 485
1552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 하늘 나라에 간다)  [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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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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