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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조회수 | 1,614
작성일 | 08.09.24
제1독서 :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코헬렛 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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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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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일생 동안 베드로는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의 박해 시대에 ‘구원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이 땅의 순교자들 역시 베드로와 같은 응답을 하며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숱한 고문과 형벌 속에서도 ‘구원의 그리스도’를 외치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교자 현계흠 바오로는 서울에서 약방을 운영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됩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됩니다.

그에게는 다섯 살 난 아들과 여덟 살 난 딸이 있었습니다. 현석문 가롤로 성인과 현경련 베네딕타 성녀입니다. 베네딕타는 훗날 여회장이 되어 선교사를 돕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된 그녀는 동생과 선교사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습니다. 베네딕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순교합니다.

현석문은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자 그의 봉사자가 되어 전국을 누빕니다. 그는 기해박해로 선교사들이 모두 순교하자 그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찬해 남겼습니다. 포졸들에게 잡혀 가혹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 역시 ‘구원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가족 모두 베드로 사도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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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08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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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인심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꾸로 돌아가도, 곡식들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맞추어 충실하게 그 열매를 맺어 갑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가까이 오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유가(儒家)의 전통 가운데에는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에 딱 들어맞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시’는 곧 ‘천시’(天時)입니다. 하늘의 때이지요. 하늘이 정해 놓은 때에 딱 들어맞게 행하는 것이 곧 사람의 도리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면, 그가 곧 성인(聖人)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인배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자,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 또한 ‘시중’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이제 곧 때가 이르게 되니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제자들의 태도를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때에 맞춘다는 것은 신중하게 산다는 것이며,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식별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중하거나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만, 용케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실지에 대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각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때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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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0년 9월 24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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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통해서 메시아가 되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를 물리치심으로써 메시아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도 콜카타의 복자 데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한 연설이 생각납니다. “나는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배고프고 헐벗고 집 없는 사람과 불구자, 시각 장애인, 나환자, 이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며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사회에 짐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기피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데레사 수녀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사셨기에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기피하던 사람들의 친구로 사셨기에 그들의 벗으로 산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으며 우리 인생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겠다는 고백이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걷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으로만 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그 믿음을 실천할 때 참된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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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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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더불어, 「코헬렛」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탄복하는 것이 ‘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관점에서 세상사를 하나하나 새겨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깁니다.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에트’를 종종 어떤 행위를 위하여 사람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적절한 시점’을 뜻하는 그리스 말 ‘카이로스’와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때’를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정하신 ‘주어진 기회’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은 우리가 행한 일들의 전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이 하느님께서 이 일을 위해 주신 때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의식’은 지니고 있으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체 내용을 시작과 끝의 흐름 안에서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이렇게 모두 정해진 때가 있고 그 세상사의 전체적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우리가 수고를 들여 행하는 모든 일이 어떤 보람을 가질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반복하는 근원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애써 해낸 일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질문을 조금 바꾸어 던져 보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내가 한 일에서 내 역할이 미소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내가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코헬 3,20 참조) 내게 ‘주어진 기회’에 해 놓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의미를 찾게 되는가?’ 「코헬렛」이 던져 준 ‘허무’와 ‘때’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인간 조건 속에서도 충만한 의미의 비밀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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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9월 26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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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메시아 고백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실 수도 있고, 훌륭한 ‘멘토’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출세를 보장하는 ‘현자’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메시아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1911년 비오 신부의 오상은 시작되었고, 1918년 9월 20일 비오 신부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던 중에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오상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꽃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비오 성인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시관과 채찍질의 고통을 실제로 느꼈습니다. 1968년 성인은 오상을 받은 50주년 기념 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 23일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하였습니다. 우리도 성인처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 안에 지니는 영광을 소망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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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16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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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분명하게 대답하지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른다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평화와 생명이 넘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평화와 생명을 얻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변하려면 먼저 내 안에 깃든 온갖 종류의 어두움과 악의 기운, 이기심들을 없애야 합니다. 반면 생명의 기운, 선한 마음, 남을 위하는 마음들을 살려야 하지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고, 증오와 의심을 사랑과 신뢰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내 생활에서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변화하고자,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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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매일미사 2018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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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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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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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헤로데의 의문으로 제기된 예수님의 신원 문제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드린 답변은, 안타깝게도 헤로데가 전해 들은 소문(루카 9,7-9 참조)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되살아난 옛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고나 하였을 뿐(요한 6,15 참조), ‘수난을 겪는 메시아’ 곧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는 그 길을 방해 없이 끝까지 가시고자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가끔은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장의 변화만 바라다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군중의 몰이해와 외면을 이겨 내는 세월 끝에 성부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셨고, 성 비오 사제도 오십년이 넘게 오상(五傷)의 고통을 참아 내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면, 우리라고 어찌 그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때와 방식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하며 언제나 희망 안에서 이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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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강수원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22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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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   [수도회] 꽃보다 아름다운  [6] 559
1570   [전주/부산/대구/청주] 간절히 간절히  [4] 640
1569   [수원] 지붕을 벗기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4
1568   [인천/서울] 이제는 우리의 사고를 바꿀 필요가  [4] 509
1567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내려보냈다)  [6] 1958
1566   [수도회] 하느님의 연민(compassion)이 답이다  [3] 559
1565   [의정부/수원] 예수님의 사도로서 산다는 것은  [2] 664
1564   [청주] 수확할 것은 많은데  20
1563   [서울/인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매일의 생활  [2] 592
1562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5] 1771
1561   [수도회] 서로 다가가는 용기를  [5] 875
1560   [전주/청주] 예, 그리스도인입니다.  [3] 582
1559   [수원]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3] 19
1558   [인천/서울] “예, 주님!”  [4] 511
1557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7] 2236
1556   [수도회] 그들이 있기에  [5] 488
1555   [부산/청주/전주]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3] 761
1554   [수원] 사람을 심판하면 믿으나 마나다.  [1] 34
1553   [인천/서울]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말  [4] 485
1552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 하늘 나라에 간다)  [8] 2322
1 [2][3][4][5][6][7][8][9][10]..[79]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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