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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조회수 | 1,618
작성일 | 08.09.24
제1독서 :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코헬렛 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
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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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43ㄴ- 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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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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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칭찬받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람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이 있느냐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 고백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단이냐, 아니면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는 판단도 역시 신앙 고백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은 제자들에게 과연 영생을 약속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해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일반적인 그리스도관

성서에는 주님을 대면한 사람,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 그로부터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판단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1)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명을 가진 예언자인 줄로 알았다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헤로데왕처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후 다시 살아나서 활동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2)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말라 4,5절에서 엘리야는 메시야가 아니라 그의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자로 예언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님이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옛 예언자 중에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성서를 잘 못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올바른 그리스도관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말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선듯 나서며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즉,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에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언자이어야 합니다. 이 일에 히브리서(1,2)에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그에게 대사제적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110,4)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야훼께서 한번 맹세하셨으니 취소하지 않으시리라. "너는 멜기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족보를 계승한 영원한 왕이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진 이가 바로 메시야의 자격자인 것입니다. 이같은 분은 예수님 이외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3. 베드로와 하늘나라의 열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는데 이 이름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그에게 부쳐진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반석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에 나오는 두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이름은 페트로스(Petros)로 이 단어는 작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반석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석의 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석에 페트라( )란 말이 있습니다.

이 반석이란 말은 거대한 반석으로써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고 했습니다(1고린 10,4).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신앙 고백으로 그 반석의 한 부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이며, 또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그러나 각 종파 간에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또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열쇠란 구원의 열쇠, 생명의 열쇠를 말합니다. 너라고 하신 대상은 베드로 한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지칭합니다.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그리스도와 합치한 몸이 되어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우리의 신앙이 이 같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면 우리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신앙이며 이런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II. 책망 받은 베드로의 메시아관

베드로는 주님께 칭찬들을 만큼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한지 얼마 못되어 그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하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신앙을 뒷받침할 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주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긴 했지만 그러나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직 이같은 지식이 없는 베드로는 사탄의 대리자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들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길은 죽음을 향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 같은 고난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 곳에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죽음의 고난을 이기시고 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하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53장에 나오는 고난의 메시야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으로 오르시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대비하여 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은근히 서로 간에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누려야 할 주님께서 왕은 고사하고 잡혀서 죽게 된다고 하니, 결코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도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말리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뒤돌아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고 하시는 책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메시야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하셔야 할 활동을 몰랐기 때문에 왜 대사제나 율법학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도 세상 마지막에 있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선생이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부활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지, 즉 올바른 메시아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는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가 율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2)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아버지의 뜻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3)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그는 그의 백성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요한1서 4,10)고 하셨습니다.

3.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로서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영광을 구합니다. 하느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앞세웁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정욕에 의하여 그의 생각이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탄의 대변자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는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사탄은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하면 사탄은 그 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나와 가까운 내 주변의 사람을 통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 계교를 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며 언제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여 영생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와도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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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 묵상’에서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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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설마하니’ 하는 생각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 그렇게 당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마귀를 몰아내고 숱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스승님께서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 사람이 어느 날 빈민촌으로 봉사 활동을 갔습니다. 어렵고 힘겹게 사는 이들을 보면서 그는 기도 중에 따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이들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무슨 잘못으로 아무런 기쁨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이들보다 더 불행하게 사는 이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정녕 못 본 체하십니까?’

그의 이러한 푸념이 끝나자마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 비판의 화살을 보내는 인간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따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라도 건성으로 들으면 자신의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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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08년 9월 27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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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께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일러두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로 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입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고,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께 경탄을 보내던 사람들이 결국 주님을 팔아서 죽음의 손에 넘깁니다.

못 믿을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마저도 죽음에 부쳐 버립니다. 제자들 또한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 내십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당신 생명에 참여시키십니다.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을 살려 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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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0년 9월 25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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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의 「코헬렛」은 우리에게 ‘젊음의 날’에 즐기라고 권고하며, 허무를 인간 조건으로 안고 사는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길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지금’ 즐기는 데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권고는 로마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유래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날을 잡아라!)이라는 격언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를 ‘쾌락주의’에 대한 권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이어지는 두 가지 구체적인 권고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하고 권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과 하느님을 알고 기억하는 것은 서로 다르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코헬렛」은 ‘젊음’이 상징하는 ‘현재’에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무는 것이 허무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체험하는 진정한 ‘삶의 기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자에게 ‘현재’는 ‘하느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느끼는 행복’(코헬 2,24 참조)이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는 ‘현재’에 머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고통의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코헬렛」의 ‘행복의 철학’이 도달한 이러한 결론에 감탄하고 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답에는 여전히 허무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허무와 좌절을 넘어 근심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지난 일에 대한 감사와 앞날에 대한 희망 없이 그저 현재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누리는 현재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기억,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헌신하려는 결단,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수렴되는 자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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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9월 27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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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찬사를 보내고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찬물을 뿌리듯이 수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 상황이 실감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의인들의 죽음은 많았으며 그들에 대한 박해와 죽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시대에서도 종교 간의 충돌과 증오로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난민이 되고 고통과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 외면하고 싶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지구촌 가족인데 서로를 증오하고 피를 흘리게 하는 현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전쟁과 폭력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아들인 수난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기워 갚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노에 대해 온유함을 보여 주셨고, 증오에 사랑을,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보여 주신 길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겪어 낸 사람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귀담아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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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16년 9월 24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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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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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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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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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22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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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   [전주/부산/대구/청주] 간절히 간절히  [4] 640
1569   [수원] 지붕을 벗기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5
1568   [인천/서울] 이제는 우리의 사고를 바꿀 필요가  [4] 509
1567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내려보냈다)  [6] 1958
1566   [수도회] 하느님의 연민(compassion)이 답이다  [3] 559
1565   [의정부/수원] 예수님의 사도로서 산다는 것은  [2] 664
1564   [청주] 수확할 것은 많은데  20
1563   [서울/인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매일의 생활  [2] 592
1562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5] 1771
1561   [수도회] 서로 다가가는 용기를  [5] 875
1560   [전주/청주] 예, 그리스도인입니다.  [3] 582
1559   [수원]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3] 19
1558   [인천/서울] “예, 주님!”  [4] 511
1557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7] 2236
1556   [수도회] 그들이 있기에  [5] 488
1555   [부산/청주/전주]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3] 761
1554   [수원] 사람을 심판하면 믿으나 마나다.  [1] 34
1553   [인천/서울]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말  [4] 485
1552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 하늘 나라에 간다)  [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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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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