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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살아 있는 평화
조회수 | 1,870
작성일 | 08.09.24
벌써 오래 전의 일이 되어 형량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아마도 무기징역이었던 것 같다-선고를 받은 박노해 시인의 해맑은 웃음이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애써 고뇌하는 듯한 심각한 얼굴의 검사나 판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로운 웃음을 간직할 수 있는 그의 모습은 한 점 두려움도 없어 보였고,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자유와 정의와 해방의 정신을 꺾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물리적인 공권력을 이용하여 요한을 신체적으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고귀한 영혼만은 꺾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라는 소문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강한 척했지만 탐욕과 허영과 두려움에 갇힌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에게서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강인한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인간에게 굴복하기보다는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하느님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기도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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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씨튼 수녀회 최혜영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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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지나가고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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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영혼의 치유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여 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반문하며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는 헤로데 영주, 바로 내면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런 저런 상처들로 인해 그 내면 깊이에는 이런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이 깔려있는 법입니다. 이런 불안이 잠재해 있는 한 참으로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 영혼에 또 하나의 심각한 질병이 있으니 삶의 허무감입니다. 유한한 인간조건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허무의식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생명의 하느님을 찾는 코헬렛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짙어져가는 삶의 허무감입니다. 늘 반복되는 제자리의 삶,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자각, 예기치 않은 죽음들, 모든 것이 잊혀 져 간다는 사실 등, 모든 것이 허무로 귀착되는 듯합니다.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은 평화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요, 허무의식은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불안과 허무의식이 깊어질수록 갖가지 중독에 정신질환이 뒤를 잇고, 십중팔구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비전을 지니지 못함으로 인해 자초한 화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태양이 지면 온통 밤의 어둠이듯이, 하느님 태양이 사라지면 마음은 온통 불안과 허무의 어둠입니다. 이런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과 허무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생명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너무나 잘 잊고 지내는, 너무나 평범하고 자명한 진리입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살아있는 중심이, 비전이 될 때, 비로소 단조로운 반복의 나날은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날로, 불안과 허무의 나날은 빛과 생명, 평화로 충만한 날로 변모될 것입니다.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의 질병인 불안과 허무의식을 치유해 주시고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하루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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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의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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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어리둥절해졌다. 요한이 다시 살아났을까? 그는 분명 죽었는데. 이 사실은 늘 마음 한구석 헤로데를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헤로데는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헤로데가 예수를 보고자 한 것은 예수께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흔히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너도나도 구경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수없이 많은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소문과 죽었던 사람도 살려냈다는 소문이 헤로데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그도 한번 구경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호기심의 충족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무슨 공로를 세워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열정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쏟아진 것이다.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구원이다. “주님,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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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속회 선교사 박강수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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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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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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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신부 2022년 9월 22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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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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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소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 느낌으로 만나는 참 좋은 계절입니다.
참된 만남은 헛된 소문을 뜬소문을 따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 은참된 만남을 바탕으로 깊어집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번의 올바른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은 살아가는 삶 자체에서 다시 만납니다.
신앙인의 기준이자 신앙인의 정확한 실체는 올바른 실행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올바른 삶으로 결정됩니다.
올바른 삶은 이타적인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타적인 삶은성 요한 세례자가 보여준 간절한 믿음입니다.

소문은 더 많은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간절한 믿음은 참된 중심을 잡아줍니다.
중심이 없으면 삶은 변덕스러워집니다.
의심과 중심 사이에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믿는 만큼깊어가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선구자적인 삶을
살다가 떠난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의 중심점입니다.
삶의 중심점이 없다면 믿음은 소문으로
또 다시 죽어가는 사문화의 용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우리는어디에 중심을 두고 어디에 에너지를
쏟으며 살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소문을 품고사는 것이 아닌 믿음을 품고 살아가는
하느님의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정체는 올바른 믿음이며 간절한 실천입니다.
간절한 중심점에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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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9월 22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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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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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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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2년 9월 22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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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중심의 삶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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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 90,1;14)

또 강론 제목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부제로는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가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그러니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이신 하느님뿐입니다. 마치 밤의 어둠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하느님입니다.

삶이 선택이듯 빛과 어둠도 선택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느냐. 어둠인 허무를 선택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창밖 아래 진흙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밖 하늘 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묵상중 감히 9월9일자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제 말로 바꾸어 읽어 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평생 매일 강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론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로 맡겨진 것입니다.”(1코린9,16-17)

곳곳에서 원하고 요구하는 분들이 많기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써서 나누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쓰는 행위는 마치 새벽 일찍 허무의 허공에 말씀의 태양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을 상징하는 말씀의 태양이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길 소망하며 하늘에 태양을 쏘아 올리듯 날마다 강론 태양을 허공의 어둠으로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2020.12.1.일 제 집무실 게시판에 써붙인 글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하루의 양식이자 하루 삶의 의미요, 중심이자 방향이요, 유언이자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다.”

역시 살기 위해, 살아 있음의 확인을 위해 쓰는 강론입니다. 날씨가 썰렁한 가을로 접어들면 저절로 본능적으로 빨라진 퇴근 걸음들은 대부분 따뜻한 집의 보금자리 품을 향합니다. 지친 영혼들의 위로처와 안식처가 되는 가정은 마치 주님의 집과 같습니다. 또 많은 이들이 가을을 맞이하면, 특히 나뭇잎들 지는 늦가을 만추晩秋가 되면 삶의 허무감에 영혼의 몸살을 앓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전례를 통한 섬세한 배려가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가을철 삶의 허무감에 빠지지 않도록 허무의 계절을 기도의 계절로 바꿔줍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대림의 기쁨에 허무가 침투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허무의 어둠을 환희의 빛으로 바꿔주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삶의 허무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도하라는 신호로 하느님의 초대장일수 있습니다.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삶의 허무와 더불어 삶의 무지, 무의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중심의 삶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말끔히 자취없이 몰아내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기도로 빛이신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허무, 무지, 무의미의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전례중 매일미사 말씀의 배치도 참 절묘합니다. 말씀을 골고루 균형있고 조화롭게 배치해 줌으로 영적 편식이나 과식을 막아 줍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을 보니 참 반가웠습니다. 종파를 초월, 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전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역설적으로 코헬렛을 최고의 지혜라 찬탄했습니다. 바로 허무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서 허무에 대한 답을 찾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코헬렛 주제를 나타내는 2절 이후 내용도 가슴 서늘한 충격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성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연인의 사랑을 소개하는 아가서가 있는가 하면 이런 극단의 인생 허무를 노래한 코헬렛도 있습니다. 바로 이 아가서가 코헬렛 뒤에 옵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든 이들의 필독서가 코헬렛이요, 이어 생명과 사랑의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허무’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입깁’ ‘실바람’을 뜻하는데, 추상적으로는 ‘허무’ ‘허망’ ‘무상’ ‘덧없음’ ‘헛됨’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이 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73번 사용되는 데 코헬렛에서 38번 나옵니다. 이책의 중심 주제인 이 말은 맺음말 첫머리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12,8)

삶은 엄중한 선택입니다. 허무를 선택하면 필시 삶의 본질은 허무라 할 것이며 어둠으로부터 구원의 해방은 요원할 것입니다. 반면 빛이자 생명이자 사랑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면 삶의 본질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선택함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삶의 본질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 맞는 것입니다. 하느님 선택에 이어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부단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규칙적으로 공동전례기도훈련에 매진함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허무나 무지, 무의미가 도저히 침투할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짧은 단락의 루카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줏대없고 우유부단한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안절부절, 갈팡질팡, 두려움과 불안에 떱니다. 그대로 삶의 중심이 없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 중심이 없거나 잃어버렸을 때 누구나의 보편적 감정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이런 이들은 십중팔구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희생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도저히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늪에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래서 하느님의 선택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 내려야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헤로데 영주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그러면서 그는 예수를 만나 보려고 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흡사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화두같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은, 또 언제나 선택하여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할 분은, 생명과 사랑의 빛이신 하느님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뿐이십니다. 참 어리석게도 늦게서야 빛이신 주님을 찾기 시작한 헤로데입니다.

바로 날마다 거행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몰아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의 빛 안에서 ‘텅 빈 허무’가 아닌 ‘텅 빈 충만’의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 9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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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
2022년 9월 22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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