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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현인들의 지혜
조회수 | 1,775
작성일 | 08.09.25
때로 노학자의 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리도 최신 현안 문제에 대해 지혜롭게 답할 수 있을까 탄복하게 됩니다. 인생의 경륜이 모든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를 주나 봅니다. 최근 피에르 신부님의 <하느님… 왜?>(샘터, 2006)라는 책을 읽었는데“영원한 질문에 답하다”라는 부제처럼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서였습니다.

95세 노인의 생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참신한 생각으로 사제들의 독신과 결혼, 여성 사제 문제,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입양 문제, 교황의 선출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명료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용기 있게 발언할 수 있는 것은 평소 단순하고 욕심없이 생활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줄기를 세울 줄 압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진보’다 ‘보수’다 하여 틈만 나면 연령별, 계층별, 지역별로 편을 가르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새것과 옛것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들의 지혜가 절실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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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씨튼 수녀회 최혜영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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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

일설에 의하면 예로니모 사제는 세속에 몸담고 있을 때, 잘 나가던 때, 휘황찬란했던 날들의 기억을 떨치기 위해 성경을 펴들었고, 제대로 된 성경번역을 위해 한 평생 매진하신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성경 번역작업을 위해 오랫동안 그 어려운 히브리어 공부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유혹의 높은 파도가 다가올 때 마다 예로니모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성서 번역과 연구는 예로니모의 본업이자 아르바이트, 특기이자 취미였습니다. 하루 온 종일 성서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 동안 한사코 미사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서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 간의 세밀한 번역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경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 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마리의 사자가 절룩거리며 예로니모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발을 내밀었습니다. 예로니모가 자세히 보니 사자의 앞발에 커다란 가시가 박혀있었습니다. 보기가 딱했던 예로니모가 그 가시를 빼주었습니다. 사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갈기로 덮여있던 자신의 머리를 예로니모의 몸에 비볐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성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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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담아 들어라 (루카 9,43-45)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상황에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우연히 이 말을 하신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임에 분명하다.

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이다.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어린이를 고쳐주고 나니까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고 하였다. 놀랄 만도 하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들 떠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제자들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어제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지만 제자들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그런 것을 바라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모르고 다만 병이나 고쳐달라고 그런 것만을 쫓아다니며 거기에 매달리는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제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병을 고쳐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고백한 그리스도는 단순히 병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분이시다.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는 것도 좋지만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병을 고쳐 달라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당신께서 하라는 대로 나는 할 것이며 또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구원자(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라고 고백한다면 오늘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희생을 치루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분이 치루신 희생을 나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말씀 한 마디로 나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가셨고 그 길이 곧 내가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셨다.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듣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들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에 들어 간 말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 마치 땅에 떨어진 씨가 그곳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무슨 말을 귀에 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열매를 맺게 된다. 루가는 이 말씀 앞에 어린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영이 사로잡히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영은 아이를 뒤흔들어 거품을 물게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마르고 복음에서는 여기에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고 하였다. 더러운 영이 들어가면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흘리며 땅에 뒹군다. 아이는 더러운 영이 들어갔고 그 영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귀에 무엇을 담느냐 즉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매일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욕을 하게 되고, 좋은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좋은 말을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법이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 6,4-7)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감히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와 지금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을 귀에 담아두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들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 없이 우리 나름대로 말하고 행동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이 말을 명심하여라."고 "이 말을"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귀에 담아 두어야할 말은 바로 "이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만큼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는 말은 권고의 말씀이 아니라 명령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은 내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내 운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하는 종, 즉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듯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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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 계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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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흑야」의 주인공은 수용소에 갇힌 어린 천사 같은 아이가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는 장면을 보고 있다. 교수형이란 자기 몸의 중력으로 숨통을 죄어 죽도록 하는 처형 방법이다. 하지만 이 어린아이는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 자기 목을 졸라 질식시킬 수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버둥거리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아이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주인공은 중얼거린다. “하느님도 저기에서 죽어가고 있어.” 죽어가는 고통을 아이와 함께하고 있는 하느님은 적어도 방관자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또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수많은 일본인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고문받고 ‘벌레처럼’ 죽어갈 때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신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당신을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냉담한 침묵으로 일관하신단 말인가?” 로드리고 신부는 그동안 그려왔던 영웅적인 순교의 모습이 한낱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이 더욱 흔들린다.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의 표시인 성화를 밟으려는 순간 이런 목소리를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때 로드리고 신부는 비로소 신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신은 ‘너무 먼 당신’이 아니다. 이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무관심하게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곁에 와서 인간의 고통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제 고통을 당하고 계신 하느님이다. 그래서 의롭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뜻을 본받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고통은 회피해야 할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더 적극적으로 바뀌어 고통은 신과 친교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과 같이 여겨진다.

이렇게 인간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하느님, 인간의 고통에 같이 눈물 흘리시는 신의 모습은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너절한 말을 늘어놓는 대신 손 붙잡으며 같이 울어줄 친구만 있어도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덜 수 있는가! 하물며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나누며 눈물 흘리고 계신다면 얼마나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을까? 때문에 고통을 부인하는 대신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고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등장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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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속회 박강수 선교사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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