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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전주] 우리들 중 누가 제일 높을까요?
조회수 | 1,927
작성일 | 08.09.25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더구나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모르면 물어야지요. 설사 알기가 귀찮거나 공부하기 싫으면 질문을 안하면 되지 두려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지금 분위기를 보면 그리 무서운 분위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떤 분위기냐 하면예수님 일행은 갈릴래아로 향해 가시는데 일부러 사람들을 피해 외진 길이라면 외진 길로 가십니다. 왜 그렇게 가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따로 과외수업을 해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리면 시끄러워서 수업도 되지 않을 것이고 ‘주님, 도와주십시오. 고쳐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등 온갖 요구에 시달리다보면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공부고 뭐고 다 피곤해 질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을 피해서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수업을 하고 계십니다.

특별 과외수업이니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 줄 수 없는 비장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가르쳐주시는 건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어렵게 말하거나 비유로 말씀하시거나 비비 꼬아서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한테 특별히 가르쳐주시는 건데 얼마나 자상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그리고 비비 꼬고 그러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알아듣질 못합니다. 알아듣질 못할 뿐만 아니라 질문 하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스파르타 학원 선생님처럼 몽둥이 하나들고 문제 하나 틀릴 때마다 자 패고 그랬겠습니까? 공포 분위기도 아닌데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였을까요?

우리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 길이 방금 말씀드린 수난의 길입니다. 고통 받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을 이야기 하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보았을 때‘예수님은 이 정도는 삶의 길을 걸어가실 꺼다’라고 보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는 적어도 이 나라의 왕정도는 안 되시겠나 잘되면 로마 황제이상도 될 수 있을 끼다.’ 라는 자기들이 만든 삶의 길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예수님 죽기 전에 최소한 어느 정도 높은 자리는 차지를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외수업이고 뭐고 틈만 나면 자신들내에서 서열 싸움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이룩할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을 이야기하는데 제자들은 죽음을 통해서 보다는 죽기 전에 올라가야할 자신들의 삶의 길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합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가 자신들의 속내가 들어날까 두려워합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이렇게 하질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자꾸 수난을 당하신다. 고통을 받으신다. 죽으신다. 이야기하시는 데 그러면 후계자라도 미리 정해두시는 게 안 좋겠습니까? 저희들이 꼭 그걸 바래서라기 보다는 미리 정해두면 예수님 돌아가시고도 혼란이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중 누가 제일 높을까요? ‘죽음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삶의 길을 바라보자라는 말이 죽기 전에 한 몫 떼어주고 가십시오라는 말로 바뀌어 버리는게  우리들인가 봅니다.

‘삶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보라는 하느님의 생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없애 주시고 이왕이면 한 세상 조이 살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진 않았는지 반성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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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지병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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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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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깨달음의 길, 함께 가는 길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비 그친 아침 하늘은 맑고 푸릅니다. 몸에 와 닿는 공기도 상쾌합니다. 건강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삶과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분과 신명(身命)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분 가는 길에 대한 깨달음이 필수적입니다. 그 깨달음은 머리로 얻는 지식이 아닙니다. 자기 비움과 그분에로의 철저한 귀의(歸依)가 깨달음의 바탕입니다. 예수께서 걷는 길을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함께 걷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자기를 꼿꼿하게 주장하고 고집하는 사람은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예수를 따르는 사람 또한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걸었던 길을 함께 걸을 수 없음도 자명합니다.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며 손익(損益)을 따지고 계산 하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ㅣ) 너와 내가 만나는(ㅡ) 자리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만나게 합니다. 여기 하늘나라(天國)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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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신앙인

사람은 누구나 자아완성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욕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람은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성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능력이 점점 커지면서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많은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의 능력이 커진다 해도 세상 모든 것을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 이룰 수 없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아완성을 이룰 수 없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로 인해서 사람은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최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사람은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께 의지함으로써 실패를 이겨내는 존재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인생의 황혼녘에 서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잘 바라보고 있다. 그는 온갖 부와 권력을 가지고 인생의 갖가지 향락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허무했다. 또한 그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쌓았고, 이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인간의 수고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때에,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하고 말한다. 그 때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다. 때도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것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고, 사람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그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운명을 미리 헤아려보고 자신의 힘으로 정복하려는 온갖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에 달렸다고 해서 모든 희망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께 의지하며 맡기고 ,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으니,”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3,13)라고 설교자는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고자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하느님의 능력과 같은 것처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셀 수 없는 시간 안에서 내가 사는 시간이란 점에 불과하고, 광활한 우주 안에서 나의 능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행하시며, 하느님께서 주신 때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삶은 곧 하느님의 섭리이다.

오늘, 삶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자. 하느님 앞에 서서 겸손하게 주신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때로 힘들고 고통스럽다할지라도 주어진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복되게 살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하셨으니,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의탁하자. 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산다는 점을 믿고 받아들이자. 그럼으로써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를 주님의 힘으로 완성하자.

▮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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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부산/청주/전주]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3]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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