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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회수 | 2,715
작성일 | 07.06.02
독서 : 이사 61,9-11
복음 : 루가 2,14-51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가 2,41-­51)

묵상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는 수녀회 입회 전에 같이 놀아주었던 어린 조카의 기억이 늘 새롭다. 이따금 명절에 부모님께 갔다가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 조카를 만나면 꼬마 녀석이 언제 이렇게 큰 어른이 되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짝을 찾지 못한 것 같아 지난 조카 생일에는 작고 예쁜 케이크를 들고 갔더니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고모, 조카 사이에도 이렇듯 정이 기우는데 하물며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부모도 모르는 구석이 자녀에게 늘 있는 것 같다. 기도모임이나 성서모임에서 만난 자매님들은 모임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자녀들에 대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특히 모임 뒤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기면 더 깊이 토로한다. “수녀님, 자식이 애물단지예요. 실은 우리 애가 자랄 때 집안에 이런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가 아빠한테 큰 상처를 받아 지금 그러는 것 같아요. 원래 착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속수무책입니다. 저도 어찌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나도 할말을 잃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작은 기도방에 앉아 있으면 애타하던 그 자매님의 모습이 가만히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그 자매님을 성체 안의 주님께 조용히 맡겨드린다. 내게 더 말하지 못했던 많은 얘기들도 주님이 직접 다 들어주시라고…. 그리고 그 자매님도 자녀를 주님께 맡겨드리도록 은혜를 구한다. 어머니에게 자녀는 신비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녀에게 걱정스러운 일, 놀라운 일,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대부분 어머니들은 자녀에 대한 주도권을 잃은 듯 불안해한다. 아이에 대한 참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잊기 쉬운가 보다, 자녀를 사랑할수록 더.

오늘 복음의 성모님도 그런 모습이시다. 소년 예수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다가는 막상 성전에서 찾아낸 그를 보고 깜짝 놀라기까지 하신다(48절). 성모님도 아들이 누구인지를 새로 배워나가시는 듯하다. 아들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그토록 마음에 되새기셨을 텐데도 말이다. 제 손으로 키운 자녀를 신앙의 눈으로 보려면 성모님이 겪으신 과정을 모든 어머니가 거쳐야 하는가 보다. 자녀를 통하여 걷는 신앙의 여정을….

김효성 수녀 (성심수녀회, 통합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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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가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이 축일의 목적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그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가복음 사가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몰랐습니까?”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깊이 새겼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는다-발견한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아주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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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이 너무나 덥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단을 입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더군다나 수단을 입고서 제의까지 입을 때면 그 더위는 배가 되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부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이겨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여름이어서 두꺼운 검은 수단을 여름 수단으로 바뀌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이 수단의 색깔이 흰색이라 때가 많이 탄다는 단점이 있네요. 저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얼마나 활동적입니까? 아이들이 성당 마당에서 축구나 농구를 하면, 수단을 벗지도 않고 그 상태로 함께 뛰어놀지요. 흙탕물이 튀든 말든 상관없이 마구 뛰어다니지요. 때로는 계단에 수단을 질질 끌면서 올라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수단의 밑단은 항상 새카맣습니다. 그리고 워낙 칠칠치 못한 저인지라 커피 흘린 자국도 곳곳에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지저분한데 왜 수단을 세탁하지 않을까 라고 말이지요. 물론 저도 세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여름 수단은 딱 한 벌이라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버티자 라는 마음으로 입고 있습니다. 지저분한 수단을 입었다고 해서, 신부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제 모습을 보기 싫으셨나봅니다. 글쎄 본당의 제의방을 담당하는 수녀님께 말씀을 하셨답니다. 아마도 수단이 전례복이니까 수녀님 담당이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그렇게 지저분한데도 세탁하지 않으니까 수녀님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씀을 하셨나 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제가 괜히 수녀님하고 우리 본당 교우들을 죄인으로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에 죄송했습니다. 즉, 교우들은 수녀님 탓을 했을 테고, 수녀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저 때문에 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요. 모든 원인은 저한테 있는데 괜한 분들만 분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내 뜻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으며,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이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의탁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성모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파스카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지요. 당시에는 아이 유괴가 많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혹시 예수님이 유괴된 것은 아닐까 하고 얼마나 가슴을 졸이셨을까요? 그런데 그 잃어버린 아들이 성전에서 편하게 학자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 걱정과 함께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말하니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상태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기에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고 있나요? 혹시 내 뜻만을 주장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만 계속해서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참, 신자들에게 분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수단 맞추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맞추면 8월 말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올 여름에는 제 수단이 지저분해도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화를 먼저 내지 말고 그 화를 마음속에 우선은 간직합시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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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2장 4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에게 순종하셨으며,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루카 2,52)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모님에게 순종하신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것입니다.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하신
순종의 현세적 표현입니다.예수님께서 부모님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루카 22,42)라고 하신 순종을
미리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다시 찾은 일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들의 사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신비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카 2,51).
우리도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성모님처럼 침묵을 중시하는 마음을 우리 안에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청주교구 박영봉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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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가?

특별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1917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 후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인 1942년에 전세계를 성모 성심께 봉헌하였고, 이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1969년 로마 전례력이 개정됨으로써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한 등급 낮추어졌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인 토요일에 성모 성심을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마음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분의 모성적인 사랑을 공경하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온전히 결합된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어머니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영적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비체의 머리이며 만민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원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니다.

따라서 성모의 모성적 사랑은 성모의 덕행과 내적 생활, 하느님께 받은 갖가지 은총과 연결됩니다. 심장으로 표현되는 성모 성심은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음이므로 그에 합당한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더 우리의 삶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부산교구 곽용승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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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스승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스승입니다. 곧 예수님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그분은 가장 철저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성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제2독서의 내용,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 주교의 강론을 언급해 봅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으로 오시는 천상의 신비를 받아들였기에 성령으로 풍요해 진 것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티 없이 깨끗하신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모님을 가장 낮은데서 가장 높은 데로 들어 높이고 빛나는 모습에서 더욱 빛나는 모습으로 바꾸어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성령이 내재하시어 일고 듣고 본 것들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성모님의 마음은 참으로 복되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의 뜻에 따라 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내적으로 믿음을 위한 지혜가 지시하는 대로 외적으로도 육신의 봉사를 다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몸소 거처하실 교회의 집을 지으시면서 계명을 지키고 마음을 깨끗이 하며 겸손의 규범과 영신적 봉헌의 모범을 지극히 거룩한 성모님 안에서 발견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뜻하는 바가 다 있습니다. 내가 즉시 아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 수 없다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마음은 바로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보는 하루이고 싶습니다.

대구대교구 한창현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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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

지난 월요일 청룡산에서 아빠 빠진 꿩 가족을 만났습니다. 엄마 꿩 주위에 병아리 꿩들이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길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털이 보송보송 난 꿩 병아리들이었습니다. 나를 마주친 엄마 꿩은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겠습니까? 엄마 꿩은 새끼들이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길 한 가운데 꼼짝 않고 서있었습니다. 엄마 꿩은 “내 새끼들을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애원하는 듯 했습니다. 엄마 꿩의 그 사랑을 범할 수 없어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죽였습니다. 이윽고 길을 건너 꿩 가족들은 낙엽을 신나게 뒤적이며 평온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길을 버티고 서있던 그 엄마 꿩의 사랑은 저에게 참 사랑을 많이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지만,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냥 길 한 가운데 멈추어 선 그 엄마를 어찌 하찮은 날짐승 한 마리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비록 새끼를 보호하려는 한 마리 까투리의 본능이라 할지라고 저에게 전해진 엄마 꿩의 사랑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꿩 가족을 뒤로하면서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라는 의문표를 저의 가슴에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저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 파묻혀 그 고귀한 사랑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어머님의 고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담을 수 없는 어머님의 마음을 우린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너덜거리는 걸레처럼 찢겨질 대로 찢겨진 통고의 심장을 우린 눈물도 없이 그저 사랑이라 일컫습니다. 아들의 절규에 구멍이 뻥 뚫린 어미의 마음을 얄팍한 감상에 젖어 잠시 눈시울을 적시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서 그 마음에 비수를 꽂는 짓거리를 행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갑남을녀가 된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돌아오길 원하시는 어머님의 절규에 이제 마음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고통이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음을 어머님의 성심을 바라보며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에 담긴 사랑과 고통을 이젠 우리 마음에도 담아야겠습니다. 고통을 밀어내면 사랑이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어미 꿩이 그랬듯이 언젠가 새끼 꿩도 엄마처럼 그렇게 새끼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어미 새가 저에게 전해준 그 메시지를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대구대교구 하성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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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2장 41-51절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주고받는 말들이 기도가 되고 사랑이 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흘 동안이나 행방이 묘연했던 아들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아 마리아와 요셉은 다시금 오던 길을 거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사흘이란 시간은 부모에게 있어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아이가 행방불명되었는데 부모 입장에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야말로 노심초사, 안절부절, 전전긍긍하며 아들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 곳곳을 샅샅이 찾아다녔겠지요.

부모는 천신만고 끝에 기적처럼 아들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너무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속은 분노로 이글거렸겠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더 화가 났던 것은 아들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도 태연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며 겨우 아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아들은 자신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율법 교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 저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당장 달려 들어가 아들 멱살을 잡아끌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뒤통수를 세게 때리며 사정없이 심한 욕설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애써 인내하십니다. 마음속은 분노로 이글거렸겠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 순간, 보통 사람 같았으면 어떻게 나왔을까요?

“죄송해요. 엄마, 제가 이분들과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깜박했네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나 소년 예수님은 아주 특별한 대답을 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정말 황당한, 그래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아들 예수님의 대답 앞에 보여준 마리아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가 막힌 일 앞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통곡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자식 잘못 가르쳤네’ 하며 후회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하소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맛있는 된장찌개가 팔팔 끓어 넘치려고 하면 뚝배기 뚜껑을 살짝 열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안에 끓어오르는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적절한 순간에 가끔씩 살짝 살짝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제대로 한번 크게 폭발할 것입니다. 그 때는 뒷감당이 안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과 관련해서 그런 작업에 익숙하셨던 것 같습니다. 끝까지 잘 참아내셨습니다. 성숙하게 잘 대처하셨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어머님이셨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말은 침묵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기도 안에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육적인 눈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한 기쁨과 행복도 컸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통과 슬픔, 아쉬움과 섭섭함도 컸습니다.

수시로 겪게 된 이해하지 못할 일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비수 같은 아들 예수님의 말들 앞에 상처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 때마다 마리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때 마다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건네셨던 언약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기억하며 그 험난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셨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묵상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고받는 한 마디 한 마디 말들이 우리 마음 안에 고이 간직되고 묵상 안에 되새김질 될 때, 그 말들은 모두 기도가 되고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지상에서 눈 뜨고도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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