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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부족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조회수 | 66
작성일 | 21.10.26
12 제자 선출은 예수님 공생활 기간에 있어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 제자들 합류로 인해 예수님의 공생활은 더욱 탄력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제자들 한 명 한 명을 놓고 오랜 묵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 현실 안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스펙’입니다.
스펙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겠지요.
취득한 자격증, 이수한 코스, 수여한 상장...

열두 제자의 스펙은 사실 보잘 것 없었습니다.
스펙이 보잘 것 없으면 성품이라도 무난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대기 좋아하는 제자, 성격이 불같은 제자, 드러내놓고 아부하는 제자,
당대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던 제자,
혁명으로 세상을 전복시키려던 제자...

공생활 기간 동안 제자들의 삶은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때로 불과 불이 만나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겠지요.
때로 정치성향을 달리하는 두 제자가 부딪쳐 불화와 반목을 거듭했겠지요.
때로 성숙과 극단적 미성숙이 만나 속병이 다 생겼겠지요.

한 두 세 명은 참으로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충분히 배웠고, 도시물도 먹었고, 배경도 그만하면 괜찮았습니다.
나머지 사람 가운데 대 여섯 명은 그저 그랬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놔두셨으면 한 평생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온 몸으로 뼈 빠지게 땀 흘려 근근이 먹고 살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두세 사람은 ‘사도단’ 가입이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원래 노는 물에서 놀아야 되고,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출신 저기 출신,
이런 신분, 저런 신분, 한 마디로 ‘비빔밥’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부족한 사도단이었지만
인재양성의 귀재 예수님을 만나면서 놀라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강도 높은 특별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12제자들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12사도 각자 안에 깃들어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십니다.
그 작은 가능성, 그 작은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

12사도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똘똘 뭉칩니다.
굉장한 응집력을 발휘합니다.
상부상조, 일치단결하여 신명나게 공동사목을 펼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다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니 다른 형제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바라보면 볼수록 하나같이 부족합니다.
나약합니다. 때로 한심합니다.
너무 한심해서 혀를 차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면서 ‘뒷담화’도 많이 나눕니다.

때로 형제들의 부족함, 이중성, 이율배반,
극단적 이기주의 앞에 크게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이게 뭔가 하는 생각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또 괴롭습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부족하니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심하니 형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약하니 나를 통한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이토록 부족한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는
하느님께 그저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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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11년 10월 28일
498 81.6%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복음 18절~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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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사목자들과 교우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어떻게 영성생활을 하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살아 생전 감염병과 맞서 싸우신 경험이 있습니다.
돈보스코가 39세 되던 1854년 7월초,
제노바에서 콜레라가 발생해서 300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 전해졌습니다.

7월 말경에는 토리노에도 첫 감염자가 발생했습니다.
왕과 왕족들은 일찌감치 특수 제작된 감염 예방 마차를 타고,
도시 외곽의 안전한 성으로 떠났습니다.
귀족들과 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 확진자는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아주 가까운 보르고 도라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주민들이 정착한 판자촌이었는데,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영양결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8월 한 달만에 800명이 전염되었고, 500명이 사망했습니다.
토리노 시장은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고 환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라 다들 망설였습니다.

돈보스코는 8월 5일 오라토리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 은총 안에 있고,
아무런 대죄도 범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콜레라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제가 보장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콜레라 환자들을 운송하고 간호하기 위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시장님의 호소를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런 일을 하기에 아직 어리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형들 가운데 저와 함께
환자 간호나 이송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아이들 가운데 14명이 지원했습니다.
며칠 뒤 나이가 어린 아이들 30명도 합류했습니다.
아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첫번째 그룹의 큰 아이들은 병원이나 환자들의 집에서 하루 종일 간병했습니다. 두번째 그룹은 혹시라도 새로운 환자가 발생했는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확인했습니다.
세번째 막내 그룹은 오라토리오에 남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돈보스코는 감염 방지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철저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그만 식초병을 하나씩 나눠주고,
환자들과 접촉한 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팬데믹 시대 돈보스코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감염병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국가나 지방 정부의 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두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조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을 자원봉사자로 모집하는 과정에서
감염되지 않도록 잘 교육 시켰고, 철저한 방역조치를 취했습니다.

돈보스코를 밀착수행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에 남긴 레뮈엔 신부의 증언입니다.

“감염자들에게는 홑이불, 담요, 옷가지 등이 자주 부족했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돈보스코의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알렸다.
그녀는 오라토리오의 옷장을 활짝 열어 뭐든 다 내주었다.
즉시 오라토리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한 아이가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와서
환자 한명이 홑이불도 없이 침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고 하면서,
그를 덮어줄 적당한 것이 없겠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맘마 마르가리타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제대포를 벗겨 소년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환자에게 갖다 주렴. 아마 주님께서도 눈감아 주시겠지?”

돈보스코는 전염병을 하느님의 진노나 징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부나 지도층 인사들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이 순간 전염병에 감염되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질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지금과 같은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셨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물론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기에 그에 충실했겠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가 겪는
고통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
악령들린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듯이
감염병의 퇴치와 종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
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8절-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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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0년 10월 28일
  | 10.27
498 81.6%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 다가가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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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장 12절)

예수님께서 바쁜 공생활 중에 시간을 내어 아버지 앞에 나아가십니다.
하느님 현존의 장소, 고요와 침묵의 장소인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그 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당신을 온전히 내어드린 선물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제자들을
뽑으시는 큰일를 앞두고 계셨지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아버지 마음을 찬찬히 헤아리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당신의 뜻으로 받아안는 시간이 되었을 거고요.
"밤새"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인 채로 완전한 사랑의 시간을 보내셨을 겁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루카 복음 6장 18절)

예수님 곁에 모여든 군중은 나름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고, 또 치유도 원하지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희망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루카 6장 19절)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닿고자 손을 뻗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힘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걸 믿고 또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닿음으로써 영혼과 육신, 정신과 마음의 병이 달아난다니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게지요.
군중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실 접촉은 두 존재 사이의 매우 내밀하고 정감 있는 관계 맺음입니다.
이 터치에서 육신의 체온은 물론 마음의 지향까지 전달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전인적인 행위가 외적 의도만으로 욕망될 때
상대를 도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마치 자판기처럼 왜곡할 수도 있지요.

예수님께 힘껏 손을 뻗는 군중의 모습은 기도하는 영혼의 형상화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혼의 손을,
영혼의 촉수를 길게 뻗어 하느님께 가닿고자 하지요.
눈먼이처럼 더듬거리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그분을 만지고자 애를 씁니다.
이 기도의 이유는 단 하나 오직 "사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관계맺음이며 사랑입니다.
기도 내용이 청원일 때도 있고
하소연일 때도 있고 찬미와 찬양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사랑 때문에
주님 앞에 머무르기도 하지요.
기도가 치유나 성공, 이윤 등의 목적에서 차츰 정화되어,
밤새 산에서 아버지 앞에 머무르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그저 "사랑"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의 정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바랄 것도 없이 구원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
형성된 사도와 예언자들과 우리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소서 2장 21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와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건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하느님의 거처"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사도, 예언자,
우리 모두는 한 생명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이 여정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그래서 미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불완전하고 약하지요.
그런데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목적 지향의 자기중심성에서 서서히 벗어나
오직 "사랑"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깨닫고
체득하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분도 그걸 바라시고,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무엇도 바라지 않고 주님 앞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오직 숨은 이유, 바로 "사랑" 때문이지요.
주님은 간절히 이 또한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 온 존재와 힘을 다해 손을 뻗는 우리의 이유가
"오직 사랑"이 될 때까지 지치지 맙시다.
기도가 사랑 때문에 이어질 때,
우리도 사도들처럼 아버지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각자 삶의 필요를 잠시 내려놓고 그저 사랑만 지니고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심장 깊숙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할 때까지...

성 시몬과 타대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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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신부
2020년 10월 28일
  | 10.27
498 81.6%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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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상에 함께하시듯
모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듯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다.
부르심은 현재 진행형이다.

내어주고 나누는 부르심이다.
부르심은 만남이다.
만남은 부르심을 통해 내어맡김이 된다.

이끄심의 여정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토대가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부르심과 간택, 따름과 응답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다.
끝까지 함께하는 믿음이며 부르심이다.

부르심과 믿음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부르심의 길은 따름의 길은 따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길이다.
이와같이 사도는 세상의 누룩이 되는 사람들이다.

뽑아주신 주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매순간 봉헌하는 것이다.
밤을 새우신 기도로 간택되었듯이 기도가 중심이 되어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낮아지고 작아지신 주님을 닮고 따르는 사도직이길기 도드린다.
부르심은 모든 것을 내어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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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0월 28일
  | 10.27
498 81.6%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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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오늘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왜 두 사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지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사도가 주님의 형제들이라고
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인데 두 분이 사도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께서 뽑아서 된 것인지 그것이 두 번째 질문이지요.

제 생각에 두 분이 제자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이고,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된 것은 뽑힌 것일 겁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열두 사도 외에 주님을 추종한 사람들
곧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가 되기로 자원할 때와 사도로 뽑힐 때
두 분의 마음이나 의도는 어땠을까 다시 생각이 됩니다.

망설임은 없었을까요?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은 없었을까요?
오히려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 있었을까요?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라면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이용하여
주님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셨을 때 한 자리 차지하려는 것과
사도단 가운데서 자기들은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뻐기는 것이지요.

만일 두 분이 이랬다면 제자에서 사도로 뽑힐 때는 기뻤을 것이고,
그러나 나중에 진정한 주님의 사도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회개와 세례가 필요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형제라는 것 때문에 제자와 사도 되는 것에
망설임이나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었다면
열두 사도 중 주님의 진정한 사도가 되기 위해
제일 많이 탈바꿈해야 할 분은 두 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탈바꿈에 대해 생각해보려는데
탈바꿈의 사전적 의미는 모양이나 형태나 상태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물의 경우는 매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충이나 유생에서 성충이나 성체로 탈바꿈하고,
식물의 경우는 본래의 것과는 아주 달라져 독립된 종으로 탈바꿈하지요.

그러니까 탈바꿈이라는 말에는 성숙과 완전한 변화라는 좋은 뜻이 있고,
그렇게 되기 전에는 미숙하고 불완전하였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분이 이런 탈바꿈의 대표이고 모범이기 때문이겠는데
우리는 두 분의 탈바꿈을 영적인 탈바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영적인 탈바꿈은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의 물의 세례와 비교하여
주님의 세례를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라고 한 것과 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완전히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적인 탈바꿈은 존재의 영적 탈바꿈 뿐 아니라
삶과 역할도 영적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영적으로 탈바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탈바꿈하도록 모범이 되고 역할을 하는 겁니다.

두 분의 경우 단순한 제자에서 사도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사도란 열두 지파의 대표로서 주님 교회의 기둥이 되는 것이니
두 분을 본받는다면 우리도 제자에서 사도로 영적 탈바꿈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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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2021년 10월 28일
  | 10.28
498 81.6%
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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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지속해나갈 직제자 선발이라는
큰일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영감과 교훈을 선물합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결혼이나 새로운 출발, 중요한 결단이나 큰 수술 앞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서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잘 따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셨을 때는
어김없이 외딴 곳으로 가셔서 홀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피땀까지 흘려 가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을 때,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고 여겨질 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정은 과감하고도 용기있는 결단과 실행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신중한 식별 작업 끝에 이루어진 결정이라면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결정한대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발표한 사도들의 명단을
들은 군중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다들 예상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본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중에
제자들을 선발하리라는 것을.
적어도 당대 ‘인싸’ 그룹이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제자단을 구성하시리라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이름 하나 하나가 호명될 때 마다
다들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들, 열혈당원, 세리, 죄인....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신 결정을 뒤엎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선발된 열두 사도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서시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멋진 장면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갖가지 질병과 악령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다음,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하고도 단호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바로 예수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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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1년 10월 28일
  | 10.28
498 81.6%
두 분의 사도를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 모두가 하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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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제자단을 구성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영적으로 계승하는 열두 명을 따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밤을 세워 하느님과 의논하시며 그분의 뜻을 찾으셨지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루카 6,17)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 일행 앞에 큰 무리가 몰려듭니다.
다른 제자들도 있고 가르침과 치유를 청하는 군중도 있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에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며 달려왔을지 짐작이 갑니다.
가난하고 단순 소박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하느님의 메시지이고 구원의 희망입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앴를 썼다."(루카 6,19)

예수님께서 구마와 치유로 사람들을 고쳐 주시니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로 몰려듭니다.
손을 뻗어 예수님께 대려는 적극적 행위 안에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과 간절한 바람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힘에 닿고 싶고
그 힘을 입고 싶은 애절한 간원이 그들을 움직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예수님,
사도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눈에 보이는 건물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소서 2,20)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구원 사건과
시공간적으로 큰 격차를 지닙니다만,
하느님의 목소리로 살았던 예언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고 기쁜 소식의 초대 메신저요
실행자가 된 사도들과 현재의 우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생생히 표현했듯,
예수님께서 모퉁잇돌로서 그 중심이 되시고
사도와 예언자들이 기초를 이룬 토내 위에
우리가 차곡차곡 쌓여 교회가 지어지는 중이지요.

'우리'에 포함된 무수한 시대와 문화,
민족과 인종의 고귀한 인격들을 관상하면,
과연 물리적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다양하며 긴밀한 연결체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소서 2,22)

이렇게 지어지는 교회가 곧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 안에서는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이가 없지요.
하느님의 목소리가 된 예언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 사도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
예수님의 선한 뜻을 실제적으로 세상에 구현한 실천가와 봉사자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그 어느께 쯤에 놓여
하느님의 거처를 이루는 중입니다.
그 안에 함께하는 자체가 주님과 우리가 닿아 있음을 증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 모두는 사도들과 예언자들,
순교자들의 양분 위에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거의 2년 가까이
교회와 물리적 거리감이 지속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있는 힘껏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를 이어주던 결속감과
공동체 사랑을 기억하며 다가올 위드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성 시몬과 성 타대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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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신부
2021년 10월 28일
  | 10.28
498 8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루카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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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념하는 성 시몬과 성 유다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었습니다.
카나 출신인(마태오 10,4) 시몬은
유대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운 열혈당원이었다가(루카 6,15)
제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몸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시몬은 로마를 반대하는 유대 민족의 열혈당원이라 불릴 만큼
구약의 하느님 말씀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마태오 10,3 / 마르코 3,18)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가 유다서의 필자라는 주장이 있으나
서간의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유다서 1,1)로서 사도라는 확실성이 없기에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주석 성경, 유다 서간 입문, 970).
유다 사도는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루카 복음 6장 12절-13절).

그분께서는 계시와 기도의 장소인 '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인간적인 잣대가 아니라
하느님 눈으로 사도들을 뽑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민족해방이라는
전혀 다른 목적을 추구했던 열혈당원인 시몬이나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쉽게 치우치는 성질 급한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오히려 복음선포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 뽑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하고
인간적인 허물이 많은 이들을 도구로 삼아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이렇듯 사람의 생각보다 깊고 넓으며,
한없이 높으신 주님께서는 미약한 인간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그렇게 인간적인 기준이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소서 2,19-20)

우리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처신해야겠습니다.
곧 어떤 일이나 사물을 대할 때 나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뽑힌 사도들처럼 세상적인 야망이나 계획, 행동방식, 습관,
가치관을 떨쳐내고 모퉁잇돌이신 그분으로 옷을 바꿔 입어야 합니다.

철새나 연어와 같은 동물들에게는 계절이 바뀌면서
본래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귀소(歸巢)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인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아가곤 합니다.

사도로 파견된 이들이 찾아 되돌아가야 할 고향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으로 지음 받았으니 사랑이신 분께 되돌아가는 것이 본분이겠지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요
또 다른 사도로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소명입니다.

오늘도 기도하시며 사도들을 뽑으신 예수님과,
자신의 가치 기준과 행동방식을 버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죽기까지 따랐던 사도들을 본받아
하느님께 돌아가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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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21년 10월 28일
  | 10.28
498 81.6%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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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의 다채로운 빛깔의 순수한 선물이다.

새로운 탄생의 길은 언제나 순수한 감동과 환희로 벅차오른다.
생명의 길 안에서 미루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뽑으신다.
주님께서 직접 선택하신다.

행복한 사도들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사랑이란 주님께 순명하는 진리의 길이다.
혼자만의 구원이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신다.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도 사도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신비이다.
앞장서는 사도들의 신앙이 못난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깨운다.

불평과 안일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굶주림과 아픔을 참아내며 주님을 따랐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기도로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이와같이 길은 열려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생명과 참된 자유를 다시금 생각한다.
첫 만남과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참되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 시대이 자리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이 되셨다.
최초도 최후도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다채롭고 다양하기에 풍요로운 사도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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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8일
  | 10.28
498 81.6%
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삶
- 기도와 성소,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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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때로는 신원의 위기의식에 자문해 보기도 할 것입니다.
‘수도자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사실 50대를 넘어서면 나름대로 자기를 찾게 됩니다.
어제도 오랜만에 수도원을 찾은 50대 중반의 자매와의 만남이 생각납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행복의 객관적 조건은 다 지녔네요. 기도하시고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세요. 사랑하여 주님을 알수록 나를 알게 됩니다. 기도도 사랑도 항구한 노력입니다.”

이어 보속으로 다음 이사야서의 처방전 말씀을 써드렸습니다.
“너 카타리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야 예언서 43장 4ㄱ절).
말씀을 써드리고 강복을 드린후,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매님, 바로 이것이 자매님의 모습입니다.”

덕담과 더불이 살며시 안아 드렸고, 자매님도 저도 활짝 웃으니
참 마음이 밝아지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부르심의 성소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없이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의 언명대신,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언명에 공감합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대로 하느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의 모습을 기막히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불림받아 ‘그분의 꽃’으로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된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들이자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불림받은 이름이 본래의 이름이라 하여
세례명을 본명本名이라 부릅니다.

사도 바오로가 교회내 우리의 신원을 잘 밝혀줍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로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여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열두사도나 우리가 주님께 불림받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여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새삼 성소의 무궁한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 불림받은 열두사도의 면면이 참 다채롭습니다.
하나하나 고유의 유일무이한 성소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사도로 불림받으므로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게 된 제자들입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양한 이들이 공동체가 참으로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우리 열두명의 수도형제공동체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은 열두사도중 ‘열혈 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히브리어로 “셰마Shema”인데
“셰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아 들어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타대오로 불리는데
타대오의 말뜻은 <사랑스럽다> 라는 의미입니다.
불림받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사랑스런 존재가 됨을 깨닫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인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에는
두 사도가 함께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페르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시몬은 톱에 잘려 순교했고,
유다는 창에 찔려 순교했으며,
두분 다 함께 활동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에 따라
오늘 10월28일 동시에 축일을 지냅니다.

순교는 주님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순교를 통해 부르심의 성소에 끝까지 충실했던
순교성인들의 순교 믿음은 언제 대해도 가슴 먹먹한 감동이요,
순교적 삶에 더욱 충실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기도와 중심, 그리고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사도를 택하기 전 밤을 새우며 기도했고
이어 열두사도를 택합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삶에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복음 후반부의 군중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 온 사람들이었고,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다 낫게 되니
그대로 기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묘사도 은혜롭습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힘은 그대로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쓰는 병자들의 간절한 믿음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는 미사시간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기도가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의 일치를 위해,
각자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
순교적 삶에 항구하기 위해,
또 복된 선종의 죽음을 위해
답은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뿐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엊그제는 노태우 전임 대통령이 서거했고,
요셉수도원의 은인인 매듭전문가이자
무형문화재인 김희진 율리안나 자매가 선종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에 깊이 하나로 결속된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을 깊이하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가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성전에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매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교회의 심오한 모습이
다음 에페소서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이런 교회 공동체의 은혜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중에 계속 ‘자라나고’ ‘지어지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있는 살아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를 떠난 기도와 믿음은
얼마나 허약하고 위태한 지요!
주님은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교회공동체를 살려 주시고,
우리의 성소와 믿음을 북돋아 주시며,
영육의 질병도 치유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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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
2021년 10월 28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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