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13 12.8%
성모승천대축일 해설
조회수 | 67
작성일 | 22.08.14
성모승천(聖母昇天,
라틴어 : Assumptio Beatae Mariae Virginis in coelum) 대축일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늘나라에 불려 올라가심을 받은 것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묵주 기도 영광의 신비 4단인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를 기념합니다. 성모승천은 하느님의 은혜인 동시에 성모님의 삶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겸손과 가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상 받으심을 축하해드리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발적인 믿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도와드림으로써 승천이라는 상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 4대교리 중에 ‘상선벌악(償善罰惡)’이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음덕양보(陰德陽報)라는 사자성어도 있습니다. 남모르게 덕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상을 받고 축복을 받으신 날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것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몽소 즉 ‘하느님의 힘으로 불려 올림’을 받아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께 다른 성인성녀들과는 달리 공경지례가 아니라 상경지례(上敬之禮)의 예를 갖춥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오늘 성모님을 축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그 무엇보다 다 함께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이 상을 받으신 성모님께 대한 우리 선물일 것입니다.

둘째 성모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의미는 우리 구원의 희망이며 위로입니다.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1974년 발표한 교황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성모승천대축일은 우리가 바라던 종국적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인 성모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늘에 가시면 우리도 하늘에 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영원한 것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확실한 예표(豫表)’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영광스럽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원형이며 모델이며 표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모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곰곰이 생각하며 되새기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성모님의 신앙은 곰곰이 사유(思惟, la Pensée)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신앙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께 나타나 주님의 잉태 소식을 전하자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그리고 장차 ‘내 인생은 어떻게?’ 사실 믿음에는 많이 아는 것보다 곰곰이 생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감성이 사유를 앞지르는 세상이 되 버렸습니다. 파토스가 에토스와 로고스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감성보다 곰곰이 사유하는 것이 신앙에 필요합니다. 사유하는 신앙은 감각을 지배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짜 신앙은 감성에 휘둘립니다. 성모님은 ‘곰곰이 사유하기’로 감각과 감성을 이겨내십니다. 곰곰이 따지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면 가방 끈이 아무리 길고 지식의 양이 아무리 넘쳐나더라도, 그것이 참된 믿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가방 크기가 작고 지식의 양이 아무리 적더라도 곰곰이 생각할 줄 알고 믿는 사람이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접촉합니다. 신앙인은 좁고 얕게 접촉하는 사람이 아니고 넓고 깊게 접촉하는 사람입니다.

​성모님은 일생 동안 곰곰이 반추(反芻)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바로 이런 믿음, 곰곰이 생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믿음이 하늘에 이르는 첫 걸음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사유하고 되새기는 사람이 없기에 교회와 본당에 문제가 생기고 또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사람 잡습니다. 우리 주변에 곰곰이 사유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이간질과 아첨에 놀아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사유할 줄 모르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거나 감투를 쓰고 있다면 그 사람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고 곰곰이 사유하며 살아가도 불행합니다. 이런 희망 없는 분위기에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오히려 조직에 찍히고 불이익을 당하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눈치만 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강요된 침묵과 자발적 자기검열이 횡횡할 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성모님의 신앙과 모험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모험과 탐험의 위대한 노마드 신앙인입니다.

둘째 우리가 성모님께 본받아야 할 점은 주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따르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바로 이 응답이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모든 대답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응답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문을 열어 구세주를 내리게 하는 실존적 응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외치면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마니피캇이라고 불리는 성모의 노래를 바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하여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따르는 신앙을 갖도록 본받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성모님을 본받을 점은 참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잘 승화하면서 사셨다는 점입니다. 성모님의 삶은 고해(苦海)였습니다. 성모칠고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받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수태고지 이후의 인생전체가 가슴에 가시가 박히는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분의 삶은 아픔과 한에 맺힌 ‘여자의 일생’이었습니다. 깨끗한 평생 동정이시지만 한동안, 약혼한 남자로부터 간음한 여자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도 여러번 섭섭한 일을 겪습니다. 여러 날 동안 예수를 잃고 찾다가 성전에서 아드님을 발견했지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핀잔을 당하시기도 하고, 예수가 군중 가운데에서 강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풍문에 전해 듣고 용기를 내어 겨우 찾아가 면회를 청했다가 ‘누가 내 어머니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이다’ (마르 3, 34-35)라고 말씀하시어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푸대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성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아픔을 주었습니다. 또 그 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어미는 제쳐놓고 다른 여자에게 발현하셨다는 섭섭한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모님께서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면서 한 평생 아드님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살다보면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나에게 왜 이런 힘든 일이?’라는 한탄과 신음이 저절로 나올 만큼 캄캄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돈 있고 권세를 가진 자에게 부조리(不條理)하게 당한 억울함 앞에서 좌절하고 무릎을 꿇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역겨워지고 세상살이가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이 주무시고 계신다고,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이겨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가까이는 성모 솔숲 마을에 가서 곰곰이 사유하면서 성모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멀리는 메주고리에 가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모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이도 저도 안 되면, 가까운 성당에 가서 곰곰이 사유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성모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성모님께서는 그냥 쿨쿨 잠만 주무시고 계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컨데,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고, 본보기(모델)이십니다. 우리는 칠고(七苦)를 겪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시는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죄인들의 피난처이고 상처받은 자의 위로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갖가지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신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부조리와 풍파를 헤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신바람나지 않지만 신바람 나게 살고, 흥이 나지 않지만 흥을 내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 대신 빌어주실 변호자이시며 중재자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전구는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닿을 수 있도록 끌어올려주시는“은총의 사다리”입니다. 이런 성모님께 우리는 이 미사 중에도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8월 15일
513 12.8%
성모님의 ‘믿음’과 ‘신앙생활’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인도해 주는 ‘빛’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승천’은 신앙생활의 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희망의 등대’와 같습니다.
‘승천’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희망입니다.

<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종말론자들이 말했던 ‘휴거’는 ‘승천’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휴거’ 같은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말한
‘휴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승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났을 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라고 말하면서 성모님의 믿음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십니다.’라는 말은 원래는 ‘복되십니다.’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말에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성모님의 ‘믿음’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은(루카 1,31-33),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 본 적도 없는 일, 확인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는
일에 관한 예언이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 예언을 믿었습니다.

<원래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에 대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29).
성모님은 바로 그 믿음,
즉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2)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게 될일을 말하자, 성모님은 그 ‘말씀’을 믿긴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루카 1,34).

이 말은 “저는 동정녀인데, 메시아 강생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루카 1,35),
엘리사벳이 임신한 일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었고(루카 1,36),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37).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만능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서는
바로 그런 믿음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3)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는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이 특별하게 보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말한 것은(요한 2,3),
예수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4).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거절’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부탁하시니 무엇이든 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할까요?”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대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우리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가지고 계신 바로 그 ‘믿음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2)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을 찾아왔을 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인사했습니다(루카 1,28).

이 인사말에는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보증해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성모님 쪽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도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잘 나타냅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말로만’ 해서 될 응답이 아니고,
인생 전부를 걸고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머니께 당신의 교회를 맡기기 위해서
하신 말씀도(요한 19,26)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보증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믿으셨기 때문에
안심하고 당신의 교회를 맡기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신앙생활’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모님을 당신의 나라로 모시고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신앙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가신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이기도 하고,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서 무슨 길인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어둠 속의 방랑이 아니라,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상태에서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서 걸어가는 ‘희망과 기쁨의 여행’입니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계신 그곳에 도착할 것이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맞이하실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1년 8월 15일
  | 08.14
513 12.8%
구약성경 창세기 5장에 있는
‘아담의 자손들의 족보’를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 되었을 때, 므투셀라를 낳았다.
므투셀라를 낳은 다음, 에녹은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아들딸들을 낳았다.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 5,21-24).”

에녹이 ‘365년’을 살았다는 말은,
그의 생애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365’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라는 말도
그의 삶이 신앙인으로서 흠잡을 것 없는 삶이었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다.’ 라는 말에서 바로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루카 1,28).>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라는 말은, 에녹이 승천했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합니다.
그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에녹만 유일하게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 사라졌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최초로 승천한 인물입니다.

집회서 저자는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에녹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린 뒤 하늘로 옮겨졌다.
그는 만대에 회개의 모범이 되었다(집회 44,16).”
이 말에서도 성모님이 바로 연상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큰 기쁨’이신 분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이야말로 ‘만대에 회개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5-6).”

이 말은 그대로 성모님에게도 적용됩니다.
성모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모범’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신 분입니다.
(‘믿음의 모범’이라는 말은, ‘믿는 대로 사는 것’의 모범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이미 에녹도 승천했고, 엘리야 예언자도
승천했고(2열왕 2,11), 또 우리는 성모님께서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승천의 은총’을 받으신 일이지만,
예수님의 승천은 주님으로서 당신 자신의 권한과 권능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승천의 은총’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승천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신앙 여정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또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보다 먼저 가서
우리를 위해서 미리 자리를 마련해 놓으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이 말씀은, 그곳에 자리가 없어서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앞장서서 먼저 가신 다음에 우리도 당신 뒤를 따라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모님도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믿는 사람은 누구나’라는 말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에 ‘무임승차’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마리아의 노래’는 성모님처럼 승천하기를(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삶의 지침’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 나라는 참으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여기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기득권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빈손으로 쫓겨나기 전에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소외계층에 속해 있다면, 기득권층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기득권층이 되려고
애쓰지도 말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소외계층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8월 15일
  | 08.14
513 12.8%
어머니와 함께 걷는 생명의 길

-------------------------------------------------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교회 역사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는 전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림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은 하늘에 올림을 받으십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1950.11.1.)을 통해‘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의로 선포하십니다.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신 어머니는 저희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도록 협력하시는 ‘교회의 전형’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복음사가요 신학자인 요한 사도의 묵시록(제1독서)은“신약은 구약에 숨어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의미를 드러냅니다.”(계시 헌장 16항)라고 밝힙니다. 천상 성전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계약 궤’와 큰 표징들이 예형으로 등장합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은 모든 민족을 다스릴 아들을 낳습니다. 이 여인은 영육 간의 수고 외에도 악(용)의 세력의 도전을 받으며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찬송하듯 들립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묵시록 12장 10절)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원천(제2독서)이심을 단언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맏물’이 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수액을 받아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삼위와 친교를 이루어 영원한 생명의 유산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 모든 나라와 권능과 영광을 하느님께 넘겨 드립니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물리쳐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자녀다운 기도인‘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며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복음 1장 39절-56절)은 동정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합니다. 유다 산악 지방에 아인카렘(예루살렘 서쪽 6㎞)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요한이 태어나 살던 이 마을 안에는 성 요한 세례자 성당이 있고, 마을 밖에는 마리아 방문 성당이 있습니다. 두 성당을 잇는 길에는 마을 이름을 딴 ‘포도원의 샘’이 있습니다.

아인카렘에서 두 분의 만남은 구약 시대가 저물고 신약 시대가 열리는 세상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할 때,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의 태 안에 아기가 즐겁게 뛰어놉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오심을 알아본 엘리사벳은 경탄하며 하례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찬미가를 부르듯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복음 1장 46절~55절)로 화답합니다. ‘마니피캇’은 이 노래를 라틴어로 번역한 첫째 단어입니다. 성모님과 인간 역사에 큰일을 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 노래입니다.

노래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 부분(루카 복음 1장 46절~49절)은 만세가 행복하다 할 정도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마리아에게 베푸신 큰일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다음(루카 복음 1장 50절~53절)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비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교만과 부와 권세를 누리는 자들은 내치시고,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은 돌보십니다. 마지막(루카 복음 1장 54절~55절)은 주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은 물론 인류 역사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영원히 미칩니다.

원죄 없고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는 하느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fiat)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주님의 어머니’가 되게 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나이 든 친척 엘리사벳에게 석 달가량 봉사합니다. 예수님의 강생, 유년 시절, 공생활, 부활의 산증인인 마리아는 주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을 기다리며 다락방에서 공동체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세기 초부터 오늘까지 교회는 자녀다운 효성으로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초대교회는 마리아 생애와 관련된 장소를 순례하고, 카타콤(지하무덤)에 가서 마리아상을 봅니다. 동방교회는 축제 행사 때 찬미가를 부르고, 대관식과 행렬을 가집니다.

교회의 전승이나 관습을 보면 성모님 승천축일에 행렬, 촛불 봉헌, 화관 증정 외에도‘약초축성’과 포도 맏물 봉헌 등으로 공경합니다. 교회는 ‘병자의 치유’이신 성모님께 인류를 위해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중재기도에 함께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십니다.‘ 천주의 성모님’을 공경하는 우리는 성모 호칭기도로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전구를 청합니다. 침묵의 묵주기도를 바치며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사랑의 삶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아멘.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김창선 세례자 요한
2021년 8월 15일 <가톨릭 신문>에서
  | 08.14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49   [수도회] 친교의 삶  [6] 368
548   [부산/전주/마산] 진정한 자유  [3] 361
547   [수원/의정부] 진정한 자유  [2] 19
546   [서울/인천] 사랑의 눈빛  [7] 446
545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9월 21일) 독서와 복음  [12] 358
544   한국순교자 대축일 독서와 복음 해설  [5] 322
543   [수도회]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이  [9] 3680
542   [수원] 자랑스러운 이름  [15] 4665
541   [인천] 목숨 보다 소중한 하느님의 사랑  [16] 4530
540   [서울] 우리 시대의 순교  [27] 4706
539   [마산] 우리의 신앙생활, 취미생활이 아닌가?  [14] 4168
538   [부산] 순교자 대축일  [14] 2197
537   [안동] 한국 순교 성인의 특성  [13] 4360
536   [대구] 순교란?  [15] 4073
535   [전주] 일생의 순교자들  [11] 3908
534   [광주] 주님의 십자가  [4] 3590
533   [청주] 선조들 처럼  [5] 848
532   [대전] 흔연히 웃고 낙락하니라.  [8] 3836
531   [군종] 순교자 가문  [8] 966
530   [의정부] 장하다. 순교자  [10] 3563
1 [2][3][4][5][6][7][8][9][10]..[28]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