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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영 : 나의 아버지
조회수 | 2,991
작성일 | 08.12.17
‘나는 아버지’라는 단어만 떠 올려도 가슴이 뭉클 하고 아려온다. 이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마는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진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6,25가 터졌다. 아버지는 지게위에 이불 보따리 하나를 얹으시고 그 위에 나를 얹어 놓으셨다. 그리고 그 지게 하나에 생명을 걸듯 지개를 지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큰언니 둘은 이미 시집을 갔고 열세 살 오빠는 작은 봇짐 하나를 어깨에 걸머지고 아홉 살 언니는 제힘으로 걸어야 했다. 엄마는 세 살 난 남동생을 업으시고 피난길을 떠났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두 어깨는 여섯 식구의 안위와 미래가 걸려있는 막중한 위치이다. 그 소중한 아버지의 어깨에 내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피난길에서 꼭 필요한 그 어떤 무기처럼 아버지의 가슴을 차지하고 아버지의 등 뒤에 숨겨졌다. 그렇게 아버지의 넓은 등은 나의 보호막이 되어 따듯하고 포근했다. 전쟁 중이니 어디를 간들 안전할 수가 없다. 다만 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괴산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여주에서 충북까지의 그 먼 길에 나는 오직 아버지의 등짐이 되고 있었다.

들썩 들썩 아버지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둥실 둥실 무동을 타는 듯한 기분이기도 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의 행복이다. 가다가 날이 저물면 빈 집에 여장을 풀고 낮 서른 얼굴들이 한곳에 모여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둘러앉아 밤을 보내곤 했다. 그럴 때도 아버지는 그 방에 있지 않았다.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방을 양보하시고 아버지는 밖에서 밤을 보내셨다. 콩깍지나 고구마 줄기 볏짚 같은 소여물을 저장하는 깎지통 에서 밤을 보내셨다고 했다. 긴장된 피난길은 고달프고 지루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 길에서 병이 들어 죽어가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힘겨운 피난길은 한 달이 훨씬 넘어서야 아버지의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모네 건넌방에서1.4후퇴가 끝나기까지 일 년 반 정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동안에 나는 홍역에 걸려 다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으시고 동분서주 약을 구하러 다니셨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 아버지의 사랑 속에 별 탈 없이 전쟁의 틈새에서 살아나왔다.

돌아오던 길은 봄이었다. 겨울을 지낸 보리 싹이 파랗게 밭고랑을 채우고 여기저기 거름을 주는 농부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도 엄마 등에 업혀있는 동생은 답답한 듯 내려놓으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쉬어 갈 겸 동생을 길에 내려놓으면 흙장난을 하며 놀기만 하고 다시 업힐 생각을 안 한다. 그렇게 고난의 피난길 은 식구들 모두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막상 고향에 돌아와보니 집은 불타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곁방살이로 생활을 시작했다. 오빠는 중학교에 언니와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쟁이 스쳐간 학교 시설은 말도 아니었다. 지붕은 초가였고 교실 바닥은 가마니를 깔고 변소는 재래식으로 아궁이의 재를 퍼다 놓은 곳이다. 가마니가 문짝을 대신했다. 학생들의 나이는 여덟 살 부터 애 아버지에 이르기 까지 다양했다. 학교 마당 한쪽 귀퉁이에 두레박 우물이었다. 휴식종이 울리면 변소와 우물가는 길게 줄을 서고 한바탕 소란스럽다.
  
곁방살이를 하느라 옆 동네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농삿길이 상당히 멀어졌고 짐을 나를 수 있는 도구는 오직 지개뿐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우리식구들의 삶을 일구어가는 도구였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농사도 짖고 광산에도 다니시며 열심히 일을 하셨다. 가을이면 학교 지붕을 새 짚으로 갈아입히는 일이 있을 때 마다 봉사도 해주셨다. 힘든 농사일도 오직 등지게 하나로 감당하시는 아버지, 그럼에도 아버지가 물려놓은 밥상엔 언제나 반 그릇의 밥이 남아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허기인줄도 모르고 철부지 계집애는 맛있게 먹으며 행복했다. 곁방살이 오년 만에 아버지는 우리 집을 새로 지으셨다. 하지만 그간의 고달픈 삶에 지치신 탓일까 새 보금자리의 기쁨은 삼년을 넘지 못하고 내 나이 열두 살 때 아버지는 위암으로 세상을 접어야 했다.
  
나를 가장 안전한 등 뒤에 감추시고 생명의 보호막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애절한 신음소리에도 따듯한 말 한마디 위로할 줄 모르는 그저 나는 철없는 계집애일 뿐이다.

그런 철부지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 더 아음 아팠을 아버지의 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어른이 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가장 힘들었던 시대적 비운을 만나 평생을 전쟁 속에 살다가 오직 고생만으로 짧은 생을 접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어느 해봄, 남의 소를 빌리어 논갈이를 하던 날 소죽을 탐스럽게 먹고 있는 누렁 소를 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부러워하시던 그 눈빛을 나는 잊을 수 가 없다. 누렁 소 한 마리만 있었으면 하시던 그 말의 여운은 오늘도 내 귓가를 맴돈다. 그 소망을 꼭 내손으로 이루어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환한 얼굴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그것마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으로 자라온 막내딸의 가슴은 오늘도 이루어 드리지 못한 아버지의 작은 소망으로 얼룩진다. 옹이진 설음으로 남아 음~멍 ~ 마음 골짜기에 메아리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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