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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십자가 처형
조회수 | 2,294
작성일 | 07.06.11
보통 십자가행렬은 나팔을 부는 사람이 앞을 가면서 길을 열었다. 그 뒤를 이어 전령이 따르면서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다. 때로는 죄수의 이름과 죄목을 판대기에 적어 죄수의 목에 걸어주었다. 죄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의회의 두 증인도 행렬에 같이 따라가도록 되어 있다. 백인대장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상당한 숫자의 파견 병사들과 함께 행렬의 일부를 이루었다. 행렬 중에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하게 될 도둑이 두 명 있었다. 주님께서는 채찍질로 이미 살갗이 벗겨진 어깨와 등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다.
  
지난 주 일요일에 그리스도는 "왕"이라고 환호를 들었지만, 성금요일 아침에는 백성들이 "카이사르 외에는 다른 왕이 없다" 고 외쳤다. 주님을 환호하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주님을 거부하는 예루살렘이 되었다. 성전 사제들이 주님을 저주받은 자로 판결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쫓아낸다. 레위기의 율법에 의하면 속죄 제물은 성문 밖이나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속죄제물로 드린 황소와 염소의 피를 뽑아 성소에 가져다가 죄를 벗기는 예식을 올리고 나서 그 가죽과 살코기와 똥은 진지 밖으로 모두 내다가 함께 태워야 한다. (레위기 16, 27)

최후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양처럼 도시 밖으로 끌려나가셨다. 그 순간부터 예루살렘은 그 위대성을 상실하고 천상 예루살렘이 그 자리를 대신 하게 되었다고 성 바오로는 주장한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13, 12-14)

이사야는 "그의 통치는 그의 어깨 위에 있으리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통치요 생명의 법칙임이 명백해졌다.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바 있다.
  
장시간 채찍질을 당하고, 피를 많이 흘린데다 가시관을 쓰고 계셨기에 십자가형을 받기도 전에 돌아가실까 걱정하여 주님의 적들은 시레네의 시몬이라는 낯선 사람에게 강제로 주님의 십자가를 도와 지게 하였다. 시레네는 북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시몬의 국적은 분명치가 않다. 시몬은 이름을 보면 유대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고향과, "억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도와 지게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아프리카 흑인이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이번이 처음으로 구세주께서 당신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지게 하신 것이다. 시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처음으로 지는 특권을 받았다.

그 때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올라 오다가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병사들은 그를 붙들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마르코 15, 21)

시몬은 기꺼이 이 일을 떠맡지는 않았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 단어는 페르시아 말에서 빌려온 것으로 이 말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우편물을 전달하기 위해 억지로 동물들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시몬도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자 몰려든 호기심 많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며 강력한 로마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의 치욕에 동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강제로 끌려나왔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겠지만 시몬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멍에는 달고 짐은 가볍다" 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바오로가 나중에 그의 두 아들을 교회의 기둥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손해에 대해 친절로 대하라고 가르치셨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마태오 5, 41)

시몬은 이런 말을 한번도 들은 일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제 말씀을 따르기에 그런 말은 필요가 없었다.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는 여인들도 많이 있었다. 십자가형을 처하는 과정에 있어서 기대를 저 버린 남자들의 예는 수없이 많이 있다. 동산에서 잠을 잔 사도들이나 배신을 한 유다나 주님을 단죄한 유대인이나 이방인 법정 등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으나 주님을 죽이라고 했다는 여인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 한 이교도 여인이 빌라도에게 그리스도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십자가 밑에는 여인이 네 명이나 있었으나 사도는 한 명밖에 없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내시던 마지막 주간동안 어린 이들은 "호산나" 라고 외쳤지만 남자들은 "십자가에 못박아라" 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여인들은 "울었다" 우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 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하고 젖을 빨려 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가 이제 올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산을 보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할 것이며, 언덕을 보고 '우리를 가리워 달라' 할 것이다. 생 나무가 이런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오죽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23, 28-31)

여기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는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해 언급하신다.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 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 싸고 사방에서 쳐들어 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가 19, 43-44)

동산에서 주님은 자신을 데려가고 사도들은 내버려두라고 병사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인들에게도 당신은 죄가 없으므로 당신을 위해 울지 말고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해 울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종말에 이루어질 세상의 파멸을 상징한다. 실제로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산에 있는 동굴이나 바위 속에 몸을 숨겼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였다.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이후로 주님께서 침묵을 깨뜨리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말씀은 구세주의 수난강론이었으며 그 수난 강론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난 강론의 이 부는 십자가상 주님의 칠언(七言)으로 되어 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슬픔에 젖으시어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위안으로 혹시 받아들이신 적이 있다면 갈바리아 산으로 오르시는 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여인들에게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셨다. 베다니아에서 우셨고 지금 예루살렘 길위에 피를 흘리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하셨으니, 당신 죽음은 자발적인 필연성으로써, 당신께서 자유스럽게 원하셨지만 인간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푸른 나무는 주님 자신이고 마른 나무는 세상이다. 주님은 에덴에서 옮겨 심어진 생명의 푸른 나무다. 마른 나무는 먼저 예루살렘이고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세상이다. 주님의 경고 말씀은 무죄한 당신을 로마인들이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당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예루살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이토록 으깨지셨는데, 최후심판 때 죄인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벌을 받겠는가? 숲 속에서 불이나면 푸른 나무는 진액과 습기로 검게 되지만 속까지 썩은 고목은 얼마나 잘 타겠는가!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께서 고통을 당하셨다면 죄로 썩은 자들은 얼마나 고통을 당하겠는가!
  
지금 이 현장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구세주와 아주 가까이 지냈던 베드로는 추후에 이와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썼다.

의로운 사람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치 못한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착한 일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진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Ⅰ베드로 4, 18-19)

데릴라의 눈물도 삼손이 오늘같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막지는 못햇을 것이다. 예루살렘 여인들의 피상적인 통곡소리 때문에 주님의 확고부동한 희생의지가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이 눈물의 지참금을 드린다고 해서 주님의 마음의 신부가 될 수는 없었다. 주님이 죽으러 가는 착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들에게 마음껏 울 게 하셨겠지만, 주님은 희생제사를 바치실 사제셨기에 그들이 그 희생제사와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위해서만 울 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없애주실 것처럼 지금은 죄에 대해서만울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심으로써 슬픔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 여인들은 주님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분을 위해 울었지만 주님께서 임종하실 때는 이렇게 우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슬픔을 거부하심으로써 주님은 자신이 사형을 당할 착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사람이심을 보여 주셨다.
  
주님의 말씀 속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 충실하라는 호소가 담겨 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여인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들이 회개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주님은 청중들에게 자기 자신의 영혼상태를 살피라고 명하신다. 주님은 죄가 없는 당신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한 자들에게 주의를 돌리신다. 젊은이가 주님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당신은 머리를 뉘일 곳도 없다고 하셨다. 그 젊은이의 영혼의 상태가 그러한 가난한 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였을까?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말했을 때 주님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약한지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제는 여인들에게 무엇에 대해 슬퍼해야할지 말씀하시며 그들의 영혼과 자녀들과 도시를 살펴보게 하셨다. 주님을 위해서는 울 필요가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는 울 필요가 있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도록 지정된 장소는 골고타로서 "해골산"이라 부르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이 아담이 묻힌 장소라고 한다. 십자가형을 나타내는 그림들은 가끔 십자가 밑에 해골을 그려 새 아담이 옛 아담을 위해 죽으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형을 집행한 후 죽은 자들의 뼈를 갖다 버린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언덕에 도착하여 형집행인들이 주님의 옷을 벗기자 성스러운 주님의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모두 통털어서 분명히 피를 흘린 것은 일곱 번이었다. 할례받을 때, 동산에서 고뇌하실 때, 채찍질을 당하실 때, 가시관을 쓰실 때,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그리고 곧 뒤따르게 될 두 번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와 성심(聖心)을 찔렀을 때였다.
  
십자가형틀이 준비되고 그 위에 빌라도가 히브리어와 라틴말과 그리스말을 쓴 명문(銘文)을 달았는데, 명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빌라도가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씌어 있었다. (요한 19, 19)

주님의 죽음과 그의 왕권이 세계의 세도시 즉 예루살렘과 로마와 아테네의 이름으로 선포되었으며, 선(善), 진(眞), 미(美)의 언어로 선포되었고, 시온(Sion)과 포룸(Forum)과 아크로폴리스(Acropolis)의 언어로 선포되었다. 빌라도는 자기가 쓴 것을 바꿔 써달라고 청원을 받겠지만 거부할 것이다. "내가 쓴 것은 쓴 것이다." 주님의 왕권은 이미 선포되어 있었다. 현재로써는 십자가가 당신 옥좌요, 당신 피가 왕권을 가리키는 붉은 옷이요, 못이 당신의 왕위이며, 가시관이 당신의 왕관이다. 사람들이 조롱할 때 진리는 억지로 말하게 된다.
  
옷을 벗기우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더 이상 의복에 의해 어느 지역에 한정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서 주님은 세계인 (Universal Man) 이 되셨다. 도시 밖으로 쫓겨 나신 주님은 목숨과 아울러 국적까지도 포기하셨다. 성심께서는 어떤 경계의 구속도 받지 않으신다. 세상이 받게 될 은총이 흘러 나오는 그 손에 지친 못이 고정되고 둔탁한 첫 망치 소리가 적막을 깨며 들려왔다. 연달아 망치소리가 울리고 그 소리는 아래 성벽에 부딪쳐 곧 바로 메아리쳐 왔다. 마리아와 요한은 귀를 곧추 세웠다. 메아리 소리는 마치 또 한번 망치질을 한 것 같다. 가시밭에서 잃은 양을 찾던 발도 잡아 묶었다. 예언의 모든 세부사항들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다. 천년 전쯤에 다윗은 망치와 못에 메시아에게 인사하던 역할을 하기를 학수고대하였다. 목수들이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을 죽음에 처하게 될 때

야훼여! 힘을 떨쳐 일어나소서.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하리이다. (시편 21, 13)

이사야는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메시아는 죄수와 악인들과 하나로 취급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다. 죄인들을 위한 대속 희생물이 되셨기에 주님은 마치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취급받으셨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깍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는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 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믓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이사야 53, 7-12)

십자가형은 모두 형벌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죄수에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약물을 주는게 관습이었다. 아마 예루살렘 여인들이 그러한 약을 가져왔을 것이다. 어쨌든 병사가,

그들은 포도주에 몰약을 타서 예수께 주었으니 예수께서는 드시지 않았다. (마르코 15,. 23)

이것을 주님의 입술에 대주자, 주님께서는 그것이 진통제란 것을 아시고 마시려하지 않았다. 비록 당신의 육체는 기진맥진 하여 물을 찾고 있긴 하지만 중재자로서 당신의 역할을 무디게 하는 것은 마시려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주님의 어머니는 몰약을 선물로 받고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의 표시로 받아들이셨다.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약화시키는 몰약을 거부하셨다. 주님은 전날 밤 베드로에게 당신은 아버지가 주시는 잔을 마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구원의 잔을 마시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쐐기를 박는 잔을 마셔서는 안되신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여러 가지 강단을 쓰셨는데, 바다에 띄워 놓은 베드로의 배나 산꼭대기나, 띠로와 시돈의 거리, 성전, 무덤가의 시골길, 잔치집 마당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올라와 있는 이 십자가의 강단과 비교해보면 이 모든 것들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되어 버린다. 십자가가 서서히 땅에서 일으켜 세워진다. 잠시 중천에서 흔들거리며 주님의 성스런 육체를 찢고 괴롭히다가 갑자기 지옥까지 뒤흔드는 것 같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 준비해 놓은 구덩이 속에 십자가가 박힌다. 주님은 이제 마지막 강단에 오르신 것이다.
  
어느 연사들처럼 주님도 청중들을 내려다 보신다. 저 멀리 예루살렘에는 얼마 안 있어 부끄러워 스스로 얼굴을 가리울 태양이 내뿜는 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성전의 황금 지붕이 보였다. 성전 담 여기 저기 어둠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던 그분을 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군중들 가장자리에 아차하면 도망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겁많은 제자들이 보인다. 또 당신 옷을 차지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사형집행인들도 보인다. 십자가 곁에 유일하게 사도 요한이 서있다. 그의 얼굴은 사랑에서 만들어진 주형같다. 막달레나도 거기 있다. 마치 꺽여진 꽃처럼, 상처받은 여인으로 서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 하느님 맙소사! - 당신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다. 마리아와 막달레나와 요한은 무죄함과 회개와 사제직을 의미하며, 이러한 세가지 유형의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영원히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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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61. 승천  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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