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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십자가를 향한 칠언(七言)
조회수 | 2,130
작성일 | 07.06.11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상에 달리신 예수님께 향한 일곱 가지 말도 있다.

십자가를 향한 첫 번째 말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십자가 곁에 오래 남아 있지를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지나가던 사람들" 에 속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아라" 하며 모욕하였다. (마태오 27, 39-40)

그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마자 내려와 보라고 말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는 말은 자아포기와 극기를 반대하는 새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극히 전형적인 요구로써, 곧 십자가 없는 종교를 주장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아버지, 용서해 주소서" 하고 사형집행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때 "네가 만일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고 그들은 비웃었다. 만일 주님께서 "내려와 봐라" 는 그들의 조롱을 따랐더라면 그들은 누구를 믿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더라면 십자가는 있을지언정,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는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는 모순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는 죽음이 보다 높은 삶의 조건임을 보여 주심으로써 생명과 죽음의 모순의 해결책이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재판을 받을 때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고 삼 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다는 구태의연한 비난을 또 다시 퍼부었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당신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이 그들의 머리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그들은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일 때에도 이런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조롱도 고통의 잔을 채우고 있는 내용물이다. 주님께서 그러한 조롱을 인내롭게 참지 않으셨다라면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비슷한 시련을 받을 때 그밖에 어떤 방법으로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조롱하는 입술의 포악함도 못을 박는 포악성처럼 죄의 유산에 속한다. 유혹의 산에서 사탄은 똑같은 기교를 사용하면서 굶주린 주님께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요구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굶주리시다니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시다니 이 또한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들이 조롱하면서 말했던 "삼일"을 왜 기다리지 못했을까? 회의주의자들은 항상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은 기적을 바라면서도 용서라는 더 큰 기적은 바라지 않는다.

십자가를 향한 두 번째 말

이 세상에는 평범한 자들에게만 자리가 있다. 아주 착한 사람에게나 아주 악한 사람에게는 자리가 없다. 선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양심의 가책이 되고 악한 사람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선이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십자가야말로 무가치한 자들과 배척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이 자리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다. 밤중에 도둑처럼 오시겠다고 하신 주님께서 도둑들 가운데 계신다. 의사가 나병환자들 가운데 계시며 구세주께서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감명을 받은 착한 도둑이 십자가 위에 계시는 구세주께 말하였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루가 23, 42)

이 말이 십자가를 대고 말한 것 가운데 유일하게 비난조가 아닌 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보고 주님의 신성을 판단하려고 하지만, 착한 도둑든 죄로부터 구원받기를 부탁하고 있다. 믿는 자는 아무런 증거도 요구하지 않으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같은 조건도 없다. 도둑의 말은 자기를 하늘나라에 들여보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주님께서 하시고자하시면 분명히 고통을 덜어 주실 수 있고 못을 빼내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십자가 둘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착한 도둑이 보여준 신앙을 부인하는 태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 때 그는 믿었다. 회개하는 도둑은 주님을 "주" 또는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주님께 외적인 왕권의 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희생자와 주라는 말은 착한 도둑이 볼 때는 서로 양립하는 용어였다. 죽어가는 도둑이 사도들보다 먼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였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 유일한 임종시의 회개사건이지만 그에 앞서 고통의 십자가가 있었다. 착한 도둑이 부탁한 것은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형집행인들에게 베푸신 용서가 자기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바라는 외에 기여되기를 바라는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그 도둑의 믿음은 이미 부서지고 멍들었기 때문에 이 도둑에 대해 어떤 질책이나 비난하는 말도 없다. 이 말이 십자가를 향해 한 말 가운데 유일하게 대답을 들은 말이며 그 대답은 바로 그 날 도둑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것이었다.

십자가를 향한 세 번째 말

십자가를 향한 세 번째 말은 왼쪽에 있는 도둑이 한 말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루가 23, 39)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이기적인 사람은 "하느님은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고 묻는다. 이런 사람은 시련에서 구해주시는 능력을 보고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판단한다. 왼편에 있는 이 도둑은 첫 번째 공산주의자다. 마르크스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는 "종교란 인민의 아편이다. 시련으로부터 구원해주지 못한다면 종교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람이 죽어갈 때 영혼을 생각하는 종교나, 법정이 불의를 자행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명하는 종교나, 위장은 비어 있고 육체는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 천국이나 "허황된 약속"에 대해 말하는 종교,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두도둑과 마을 목수가 처형대에서 죽어갈 때 용서에 대해 강화하는 종교, 이러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왼쪽 도둑이 이해할 수 있는 구원은 영적이나 도덕적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무엇을 구하란 말인가? 우리 영혼을 구하란 말인가? 천만에! 인간에게는 영혼이란 없다! 우리 몸을 구하란 말이오!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종교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 사형대에서 내려와 보시오! 서민층을 구하시오! 그리스도교는 사회 복음이거나 아니면 마약이다." 이상이 그의 외침이다.
  
인간은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가 있다. 두 도둑은 똑같이 마음이 타락하였지만 자기들 가운데 계신 분께 각기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어떤 외적인 수단이나 좋은 본보기도 그것만으로 저절로 회개시킬 수는 없다. 이 도둑은 분명히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자기를 십자가에서 내려줄 수 있는 능력을 보고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못을 뽑아주시고 손과 발에서 나오는 피를 멎게 하시며 새롭고 신선한 생명을 그에게 돌려주셨더라면, 과연 그가 남은 일생동안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을까? 아니면 그냥 계속해서 도둑으로 살았을까?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명성만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사람이라면, 어디서나 당신의 위력을 보여 주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느님으로서 모든 사람의 비밀을 알고 계시기에 침묵을 지키신다. 하느님은 단순히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는 않는다.

십자가를 향한 네 번째 말

이 말은 그 당시의 지식층인 대사제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나온 말이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 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 보시라지" 하며 조롱하였다. (마태오 27, 42-43)

지식인 계급은 언제나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왜곡한다. 따라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주장하셨던 "구세주", "이스라엘 왕",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세 가지 칭호를 하나 하나 들먹이며 조롱한다.
  
"구세주"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을 이렇게 불렀다. 이제 이들은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즉 야이로의 딸이나 나임의 과부의 아들이나, 라자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구세주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있기에 그들은 이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남들은 구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그들이 볼 때는 아직 결정적인 기적이 부족하였다.
  
물론 주님은 자신을 구하실 수 없었다. 푸른 초목에 새싹을 틔우게 하려면 비(雨)는 자신을 아낄 수 없다. 태양이 세상을 비추려면 자신을 아낄 수 없다. 군인이 조국을 구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아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조물을 구하시고자 하실 때엔 당신을 아끼실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왕"  이 칭호는 주님께서 군중들을 먹이시고 산으로 혼자 피하신 후 군중들이 붙여준 것이다. 군중들은 성지주일에 주님의 발밑에 나뭇가지를 깔아드리면서 이 칭호를 반복해서 불렀다. 이제 이 칭호는 놀림거리가 되어, 그들은 "그가 만일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한 번 내려와 보시라지" 하며 빈정댔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다 황금 왕좌에 앉아야만 할까? 만일 이스라엘의 왕께서 십자가에서 다스리고자 하시며 힘으로 그들의 육체의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어떨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서문헌은 굴욕을 통해 영광에 이르시는 왕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 왕좌에서 내려오시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왕을 조롱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리고 만일 주님께서 정말로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더라면 그들은 제일 먼저, 전에 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그렇게 했다고 말할 것이다.
  
신앙이 없는 무리들은 대재난이 일어날 때는 팔짱을 끼고 휴가를 갖는다. 전쟁이 일어날 때 "너의 하느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고 그들은 따진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만 심판을 받고 인간은 받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왜 재판관과 죄수가 위치가 뒤바뀌어 죄수인 인간이 "하느님은 왜 전쟁을 막지 않으신가?" 하고 물어야 하는가?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놀리는 소리를 듣고 계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지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실제로 저주를 받은 자들이 주님께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조롱하였다. 지옥이 인간들 사이에서 승리하고 있다. 참으로 지금은 지옥의 악마들이 세력을 떨치는 때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내려 오시면 믿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라자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실로 알고 있는 부활을 사도들이 전도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려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며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십자가를 향한 다섯 번째 말

주님께서는 땅에 어둠이 깔릴 때 외치신 말씀 때문에 십자가를 향한 다섯 번째 말이 나온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었다. (마르코 15, 34)

이 말은 "하느님,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십니까?" 라는 뜻이었다. 이 말씀을 듣고 곁에 서 있던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 몇이 이 말을 듣고 "저것 봐!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는구나"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달려 오더니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의 입에 대면서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코 15, 35-36)

주님께서 말씀하신 엘로이를 엘리야로 고의적으로 왜곡하여 알아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히 조롱하는 어감이 들어가 있다. 엘리야가 주님보다 먼저 온다는 것은 말라기의 예언으로서 유대민족의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속말 뜻은 엘리야가 아직 안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주님일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스스로 자만하는 메시아가 자기 보다 앞서 오게 되어있던 자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실 엘리야는 요한 세례자를 통해 영적으로 왔다.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 즈가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태어날 아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가 바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이다. (루가 1, 17)

요한에게 엘리야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의 첫 번째 설교가 "회개하라"였기 때문이다. 말라기 예언자는 주님의 선구자가 이런 식으로 주님을 선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더욱이 요한의 생활양식과 복장은 위대한 엘리야와 내적으로 닮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계신다. 엘리야는 정신적으로 벌써 왔다. 조롱자들은 주님께서 공생활동안 엘리야에 대해 언급하신 말씀을 틀림없이 기억하였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한이 보낸 심부름꾼들에게 당신이 가르치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 상태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요한을 엘리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요한이 전해준 회개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 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 (마태오 11, 14)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양심이 올바르다면 엘리야의 정신을 띄고 온 요한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년이 지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그들의 양심이 드러났다. 그들은 요한이 고행과 극기를 한다고 비난했는데, 이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고 비난한다.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요한과는 다른 엘리야를 기대했던 것처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는 다른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다. 말씀을 곡해한 자들이 십자가를 향해 외친 말은 종교를 항상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생각이다. 십자가 처형을 통털어 한가지 일치된 테마는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는 것이었다.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시기를 바라지 않았다. 베드로는 십자가란 말만 듣고서도 화를 내었다. 그리스도가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려줄 엘리야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은 그리스도는 속인들의 소망이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기를 거부한 것은 손에 상처 하나 없고 하얀 티없는 그리스도를 원하는 자에게 영원한 가책이 될 것이다.

십자가를 향한 여섯 번째 말

여섯 번째 발언은 병사들이 한 것이다.

군인들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권하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실컷 살려보아라" 하며 빈정거렸다. (루가 23, 36-37)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며 피정복민인 이스라엘 시민도 아니었다. 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한 로마 군대의 병사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주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려댔을까? 이교도의 정신을 갖고 있던 그들은 모든 신들은 민족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자기 신이 있었고, 메데스와 페르시아도 자기 신이 있었고, 그리스인들도 자기 신이 있었으며 로마인들도 역시 그들의 신이 있었다. 병사들의 말은 모든 민족신들 가운데 나무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신보다 더 가난하고 더 약하게 보이는 신은 없다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빈정거린 것은 십자가위에 세 나라 말로 새겨있는 글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빌라도가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라고 씌어 있었다. (요한 19, 19)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하거나 자신이나 구하라고 말했지만 병사들은 왼쪽 도둑과 마찬가지로 "자신이나 구하라" 고 도전한다. 이들도 구원에 관심이 없었다. 병사들의 말 속에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질을 얼마나 잘 했으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겠느냐고 은근히 자랑하는 말투가 섞여있다.
  
병사들은 주님의 솔기없는 옷을 차지하기 위해 이미 주사위를 던졌다. 가야파는 그의 사제복을 찢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대사제는 옷을 찢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욕하는 병사들에게 솔기없는 당신 옷을 남겨 주셨고 당신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내 버려 두셨다. 그들은 부활주일 아침에 무덤을 지키고 있다가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으며 왜 주님께서 스스로를 구하시지 않았는지 알 게 될 것이다.
  
이 병사들이 속해있던 로마 제국에서는 일시적인 영광을 위해 수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장군을 대단히 존경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신 구원의 대장을 그들은 비웃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가 병사들에 대해 별로 호의를 보여주지 않는 몇 가지 대목 가운데 하나다. 주님께서 스스로를 구하시기를 거부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생의 법칙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병사들은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 조국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수준을 초월하는 똑같은 희생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건이 계속 진행될 때만 알 수 있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서 계획하셨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시러" 오셨다. 만일 그들의 말에 따라 주님께서 스스로를 구하셨더라면 인간은 계속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를 향한 일곱 번째 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태양은 그 빛을 감추었으며,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땅은 슬픔에 겨워 떨었다. 땅이 흔들렸을 때 바위는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어 잠들어 있던 많은 성인들의 육신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와 성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바닷물을 가르시어 당신 백성을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해 주셨을 때 땅이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였다면, 주님께서 인간을 죄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을 때는 너무도 당연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겠는가. 비록 사람들의 마음은 찢어질 수 없지만 바위는 갈라질 수 있다.
  
병사들의 책임자인 백인대장은 지진을 목격하고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이 장교는 또 다른 이교도인이었던 클라우디아가 했던 것처럼 꿈으로써가 아니라 정직하고 합리적인 사랑으로서의 표현을 통해 증거하였다.

예수를 지켜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예수께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고 말하였다. (마르코 15, 39)

십자가 발치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제자들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으신 그리스도, 한 여인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변호해주는 사람 하나도 없던 그리스도, 누구 한 사람 용감하게 앞에 나와 당신을 인정해주는 사람 없던 그리스도, 그러나 마침내 십자가 처형을 명령하고 주관하던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병사가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주님을 인정하였다. 틀림없이 이 백부장은 전에도 여러 차례 십자가형을 집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고, 마지막 숨결이 너무도 강하여 당신이 바치는 생명의 주인이 자신이심을 보여주는 고통 받는 이 사람에게서 뭔가 신비스러운 것을 느꼈다. 모든 자연이 생동하며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을 보고 이 장교는 머리 속으로 거짓 중상들을 반박하고 이 의로운 사람의 무죄함을 인정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포하기까지 하였다.
  
십자가는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한 유대인 도둑이 벌써 구원을 부탁하여 받았고, 이제 카이사르의 병사가 고통을 받는 하느님을 흠숭하며 고개를 숙인다. 주님의 공생활 동안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굴욕과 권능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십자가 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신을 모독한 자로 처단하였으나 백인 대장은 하느님의 아들로 경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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