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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지상의 가장 심각한 상처 - 빈 무덤
조회수 | 2,259
작성일 | 07.06.11
인류 역사상 무덤 앞에 돌이 굴러져 있고 안에 있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감시병을 세워둔 무덤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성금요일 저녁의 그리스도의 무덤이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시체를 지키는 것보다 더 해괴한 광경이 있을까? 그러나 죽은 자가 다시 걷고, 말없는 자가 말하며, 창으로 찔린 심장이 다시 생명의 박동을 치지 않도록 보초가 세워졌다. 그들은 주님이 죽었다고 말했으며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었고, 다시 살아나지 못할 거라고 말했으나 감시를 철저히 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주님을 사기꾼이라고 불렀으나 아직도 주님은 속이고 계실까? 그들이 싸움에 이겼다고 믿게 그들을 "속인" 주님께서는 생명과 진리와 사랑을 위한 싸움을 이기셨을까? 주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 부르시고 그들이 이 성전을 파괴한지 삼일 후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말씀을 그들은 기억하였으며, 주님께서는 자신과 요나를 비교하시며 요나가 삼일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당신도 삼일 동안 땅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삼일 후에 봉헌 제물로 바친 이사악을 돌려받았으며, 삼일 동안 에집트는 어둠에 싸여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삼일째 되는 날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에 내려 오셨으며, 따라서 다시 한 번 삼일 째 되는 날에 그들은 우려하고 있다. 토요일 일찍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빌라도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였다. "각하, 그 거짓말쟁이가 살아 있을 때에 사흘만에 자기는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저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이 되는 날까지는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백성들에게는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것보다 더 심한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마태오 27, 63-64)

그들이 "삼일째 되는 날" 까지 경비를 세워 달라고 요청한 것은 사도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살아난 것처럼 꾸며 부활을 자극할까 두려워서라기 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에 대해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사람들 때문에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에 전혀 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조사했다. 그는 죽은 유대인을 위해 카이사르의 군대를 쓰는 어리석은 짓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 가서 너희 생각대로 잘 지켜 보아라"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7, 65)

경비를 서는 것은 폭력을 막기 위한 것이고 봉인을 하는 것은 사기를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도 허튼 수작을 못부리게 적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에 봉인을 했으며, 경비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적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앞에 경비대를 세워둬야만 하였다. 죽음과 부활의 확인서는 적들이 손수 서명을 하여야만 했다. 이방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 확인하였다.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다. (마태오 27, 66)

왕께서는 당신 주변에 경비병을 세워두시고 누워계신다. 죽은 자를 경비하고 있는 이 광경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적들은 부활을 예기하고 있었는데 정작 주님의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신앙인들이고 잘 속아넘어가는 자들은 비신앙인들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확실히 믿기 전에 증거를 필요로 하여 요구했다. 부활의 드라마 가운데 위대한 세 장면을 보면 슬픔과 불신의 징후를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울고 있는 막달레나의 장면이다. 그녀가 아침 일찍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 온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인사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서였다.

무덤에서의 막달레나

어스레한 일요일 새벽녘에 몇몇 여인이 무덤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 여인들이 향유를 가져 온 것을 보면 전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렇게 여러 차례 언급하셨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상하게 보인다. 주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해 예언하셨을 때마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기억했던 것 같다. 제자들에게는 부활이란 전혀 가능한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에 부활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돌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굴러져 막았을 때 그리스도만 묻힌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희망도 따라서 묻혔다. 여인들의 오직 한 가지 생각은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절망적이면서도 아직 믿지 않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최소한도 그들 중 두 명은 그리스도의 장례를 목격한 자들이었기에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 내 줄 사람이 있을까요?" 하고 말을 주고 받았다. (마르코 16, 3)

이런 말은 신앙이 거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외침소리였다. 힘센 장정이 거대한 돌을 굴려 무덤의 입구를 막아 버렸다. 그들의 걱정은 어떻게 하면 그 장애물을 제거하여 시신에 기름을 발라드릴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부름을 받고야 무덤에 왔다. 그들의 신앙은 너무도 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들도 슬픔에 겨운 나머지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림으로써 위안을 얻고자 왔을 뿐이었다. 신심깊은 여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역사적인 것이다. 부활이란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그러한 기대가 싹터나올 만한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돌은 굴러져 무덤 입구가 열려져 있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큰 지진이 있었으며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떨다가 까무러쳤다. (마태오 28, 4)

여인들이 다가와서 보니 엄청나게 큰 돌인데도 벌써 옆으로 굴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주의 몸이 부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옮겼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신 스승의 시신대신에 천사를 보았는데 천사의 얼굴 모습이 빛났으며 그의 옷은 눈처럼 하얗고 천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하였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마르코 16, 6-8)

천사에게는 주의 부활이란 신비가 아니며 주님의 죽음이 신비였을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주님의 죽음은 신비가 아니지만 주님의 부활은 신비로 보인다. 천사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포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천사는 적들이 구세주의 무덤 근처에 배치했던 경비원보다 훨씬 철저한 경비원이요, 빌라도가 임명했던 병사보다 훨씬 강한 병사다.
  
천사의 말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 복음 전파였으며 이 복음은 주님의 수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 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주님의 인간적인 이름과 주님께서 사시던 장소의 비천함과 주님의 치욕적인 죽음을 전해준다. 이상 세 가지 모두, 즉 비천함과 치욕과 부끄러움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비교된다. 베들레헴과 나자렛과 예루살렘이 모두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표시가 되었다.
  
"이곳이 바로 그들이 주님을 묻은 곳이다" 라는 천사의 말은 주의 죽음의 사실성과 고대 예언의 실현을 확인해준다. 무덤의 묘비는 이렇게 써있다. Hic jacet(여기에 누워계시다). 그런 다음에는 죽은 자의 이름과 그를 칭송하는 몇 마디가 새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조적으로 천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묘비명을 말해준다. 즉 "그분은 여기 안 계신다" 천사는 빈 무덤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줄 것으로 생각하며 여인들에게 주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를 보라고 명한다. 그들은 즉시 서둘러서 부활의 소식을 알리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을 전해 들은 사람은 동정여인이었고, 주님의 부활을 들은 사람은 타락한 여인이었다.
  
빈 무덤을 본 사람들은 한 번 주님을 십자가를지지 못하도록 유혹하였으며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에게 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죄와 주님의 부인이 신적인 사랑을 질식시키지는 못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죄가 크면 클수록 신앙이 적으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믿음 또한 더 커진다. 주님께서 오신 것은 광야에서 숨을 헐떡이며 길을 잃어 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오신 것이며, 세리와 창녀와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와 박해하는 바오로에게 극히 설득적인 사랑의 탄원이 이뤄진다. 바위라고 불리우며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지지 못하게 유혹했던 그 사람에게 천사는 여인들을 통해 전갈을 전한다. "가서, 베드로에게 말하라."
  
공생활 중에 베드로에게 주어진 개별적인 탁월성이 부활에 있어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러나 베드로가 으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엠마오에서 다른 사도들에게 자신을 몸소 보여 주시기 전에 베드로에게만 나타나셨다. 나중에 사도들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이 타락한 여인과 주님을 부인한 사도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둘 다 그전에 회개한 사람들이었다.
  
동료들 중에서 어두운 가운데 앞장서 가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돌이 이미 한쪽으로 굴러져 있고 무덤 입구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재빨리 훑어보자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녀는 먼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생각하고 흥분 속에 그들에게 뛰어갔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여인은 증인으로 뽑힐 수 없다. 그러나 마리아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말을 보면, 그녀는 주님이 여전히 죽어계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요한 20, 2)

모든 사도들과 제자들 가운데 다섯 명만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바위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다섯 명의 처녀처럼 세 여인과 두 남자만이 무덤을 살펴보았다. 모두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흥분한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뛰어갔으며, 마리아는 뒤쳐져 따라왔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더 잘 뛰었으므로 그곳에 먼저 도착했다.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둘이 같이 무덤에 들어가 아마포가 옆에 놓여 있으며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던 수건도 놓여 있었지만 아마포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개어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도둑이나 혹은 친구에 의해서가 아니고 품위있고 깨끗하게 되어 있었다. 주님의 시신은 무덤에서 사라지셨다. 원래 주님의 시신을 묶었던 끈들은 둥근 형태로 남아 있었다. 만일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더라면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아마포를 벗겨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마포 천을 남겨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의 능력으로 거기서 빠져 나와 부활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0, 9)

그들은 부활의 사실과 증거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주님께서는 처음으로 나타나시기 시작했는데,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승천하실 때까지 열 한 번 나타나신 기록이 있다. 어떤 때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 오백명이나 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신 적도 있고,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적도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떠난 후 다시 돌아왔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주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비록 마리아 자신이 일곱 마리 죄의 악마에 의해 봉인된 무덤에서 살아났지만 아직 부활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울음보를 터트렸다. 막 솟아 오르는 눈부신 태양빛이 이슬을 머금은 풀밭위를 비출 때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는 누군가 가까이에서 묻는 소리를 들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요한 20, 13)

그녀는 잃어 버린 것에 대해 슬피 울었으나 그 사람의 질문은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그녀는 자기가 울고 있는 까닭을 말했다.

뒤를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인 줄은 미처 몰랐다. (요한 20, 14)

그녀는 천사를 보았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슬픔이 너무도 극심하였기에 설사 세상이 불바다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을 보았다. 그녀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걸 몰랐다. 그녀는 그가 요셉 아리마테아의 정원지기인줄 알았다. 이 사람은 잃어 버린 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거라고 믿으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릎을 꿇은 채 부탁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 20, 15)

가엾은 막달레나! 성금요일부터 쳐서 성토요일에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생명력과 기운이 실오라기처럼 약해가던 그녀가 "주님을 옮기려고" 하다니 세 번이나 그녀는 "그분"이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사랑이 너무도 열렬했기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요한 20, 16)

이 목소리야말로 천둥소리보다 더 놀라웠다. 그녀는 한 번 예수께서 당신 양들을 직접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죄와 슬픔과 눈물을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각 영혼에게 개인적이며 특별하고 유별난 사랑을 새겨주신 그분께 돌아서서 주의 손과 발에 묻어 있는 붉은 납빛 자국들을 보고서 단 한 마디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 서서 히브리 말로 "라뽀니" 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여"라는 뜻이다.) (요한 20, 16)

('라뽀니' 이 말은 히브리말로 "스승"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는데 그 한 마디 속에 천상적인 모든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한 마디만을 내뱉었지만 그 한 마디 안에 모든 이 세상 것이 다 들어 있다. 정신적인 한 밤이 지난 후 이처럼 빛난 광채를 보게 되었고, 여러 시간 낙심하던 차에 이러한 희망을 찾았으며, 열심히 찾다가 이처럼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었고, 잃어 버린 후에 이렇게 찾게 되었다. 막달레나는 무덤 위에 엎드려 경건히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며 주님께서 아침의 날개를 타고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오로지 순결과 무죄함만이 거룩한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무염시태 마리아가 베들레헴 마을, 지상의 문간에서 주님을 만났다. 그러나 죄의 무덤에서 하느님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회개하는 죄인만이 죄에 대한 승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은 영광스럽게도 이렇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한 여인이 성 금요일 십자가와 가장 가까이 서 있었으며 부활 아침에는 무덤에 맨 먼저 가 있었다고 ……,
  
마리아는 항상 시중을 들었다. 주님을 장사지내기 위해 기름을 바를 때에도 거기 있었고, 십자가 밑에도 서 있었다. 이제는 주님을 보고 기쁜 나머지 주님의 발치에 몸을 던져 주님을 껴안으려고 하였으나, 주님은 제지하는 몸짓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 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 간다'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 주셨다. (요한 20, 17)

그녀의 부드러운 애정의 표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아들인 그분께 향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명하셨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인들과 골로사이인들에게 똑같은 교훈을 주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Ⅱ고린토 5, 16)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골로사이 3, 2)

주님의 말씀은 그녀가 주님을 다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천상의 주님이시기에 그녀의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올라가셨을 때 - 이것은 아버지의 권능을 의미한다 -, 그리고 진리의 성령을 보내실 때 - 진리의 성령은 그들의 새로운 위로자요 주님의 내적인 현존이시다 -, 그때에야 그녀는 자기가 갈망하던 그분을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 참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당신과 인간이 맺게 될 새로운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주신 언질이며,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최후만찬 저녁에 상세하게 말씀해 주신 바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모습에 너무 집착되어 있는 당신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교훈을 주시며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이 지당하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막달레나는 십자가 처형을 받기 전처럼 주님과 함께 있기를 바랐지만 영광과 성령을 보내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비록 막달레나는 구세주께서 몸을 만지지 말라고 하시자 실망했지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빈 무덤의 의미는 알아들었지만 그것이 구원과 죄와 악에 대한 승리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막달레나는 부활의 향기가 온 천하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값진 부활의 향유병을 깨뜨려야할 것이다. 주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 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하고 일러 주셨다. (요한 20, 17)

주님께서 사도들을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기 전에 인간은 먼저 하느님과의 원수관계에서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

주님께서는 당신의 친자성(親子性)을 다른 하느님의 아들들에게 증식시키기 위해 십자가형을 당하셨다. 물론 원래의 아들인 당신과 성령을 통해서 양자가 된 인간은 무한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항상 그러하시듯이 "나의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를 엄격하게 구분하신다. 주님은 한번도 당신 자신과 우리가 같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할 수 있는 "우리 아버지" 라는 말을 쓰신 적이 없으시다. 주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한 것이며 전이해줄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원래가 아들이시고, 인간은 은총과 입양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히브리서 2, 11)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보다는 당신이 승천하실 거라는 사실을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부활은 승천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승천은 아직 사십 일이 남아있다. 주님의 말씀의 의도는 돌아가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때 가시화되고 일치된 영적왕국의 시작이 지금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고자 함 이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서둘러 갔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이 주님을 보았음을 알려주었으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녀가 전한 소식의 반응은 어땠는가? 여전히 회의주의와 의심과 불신이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당신이 돌아가신 후의 부활에 대해 표상과 상징과 비유와 직선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 바를 들은 적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코 16, 11)

하와는 뱀의 말을 믿었으나, 사도들은 하느님의 아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주님의 부활에 대해 말하려는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 (루가 24, 11)

이것은 세상이 구원의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말해주는 예고였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도 처음에는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여자란 뻔하지! 언제나 상상을 잘하지." 과학적인 심리학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이 그들을 속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비범한 것을 보았을 때의 현대인들의 불신은 부활의 첫 소식을 듣고서 즉시 반응을 보인 회의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부활사화에 대한 현대 회의주의자들의 말을 사도들 자신이 먼저 말했다. 그것은 부질없는 허튼 소리라고. 그리스도교 최초 불가지론자들과 사도들은 만장일치로 부활사화를 망상이라고 거부해 버렸다. 그들이 불신을 극복하기 전에 뭔가 아주 특이한 일이 벌어져야 하고 이 모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어야 했다.
  
이들의 회의는 갈바리아 산에서 희망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한데서 나오는 것이기에 현대인의 회의보다 훨씬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회의는 희망이 없는 현대인의 회의보다 훨씬 치유하기가 힘들다.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활을 쉽게 믿거나 보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손실에 대해 스스로 위로하고자 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어떤 불가지론자도 부활에 대해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을 쓴 적은 없다. 마호멧이 죽었을 때 오마르는 손에 칼을 들고 텐트에서 튀어나와 대예언자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여 버리겠다고 포고했다.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은 쉽게들 믿었으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것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의심하도록 내 버려두신 것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수세기를 거쳐 내려 오면서 믿게 될 신도들이 결코 의심에 싸이지 않게 하시려고 했을 것이다.

경비병들과 뇌물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알리러 가 버린 후 무덤 주변에 서있으면서 부활을 목격했던 경비병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대사제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이에 대사제들은 즉시 최고의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이 회의의 노골적인 목적은 경비원들을 매수하는 것이었다.

대사제들은 원로들과 만나 의논한 끝에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 주며 "너희가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여라.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 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도록 하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마태오 28, 12-15)

"거액의 뇌물"과 유다가 받은 하잘 것 없는 삼십 은전이 아주 뚜렷이 대조가 된다. 최고의회는 부활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편견을 가지지 않고 부활의 진실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똑같은 증언을 빌라도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전했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이 멸시하던 로마 병사들에게 성전 돈을 주기까지 하였다. 로마병사들보다 더 미워하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유다가 돌려 준 돈은 "피돈"이기 때문에 만지려 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은 정화시키는 어린양의 피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사려고 한다.
  
경비원을 매수한다는 것은 부활이라는 사실을 회피하려는 정말로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맨 먼저 제자들이 주님의 시신을 가져간 후 그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하는 문제가 있다. 주님의 적들이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시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로마병사들 경호원 모두가 근무 중에 잤다고 하는 믿기지 않는 사실은 발설한다 하더라도 그날 밤 벌어진 사건이 그들이 자는 동안에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병사들은 시킨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말짱하게 깨어 있어서 도둑을 보았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 정도였다. 모든 병사들이 자고 있었더라면 도둑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일 몇 사람이 깨어 있었더라면 도둑질을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몇몇 겁많은 제자들이 돌로 막혀 있으며 공식적으로 봉인되어 있고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에서 잠자고 있는 경비병들을 깨우지 않고 스승의 시신을 훔치려했다는 것도 결코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시신을 몰래 옮긴다고 하는 것은 사도들에 관한 한 전혀 의미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로써는 그들의 스승의 인생은 실패요, 패배였다. 물론 뇌물을 받은 자보다는 뇌물을 준 자의 죄가 훨씬 크다. 왜냐하면 평의원들은 교육을 받은 자요, 신앙깊은 자들이었으며, 병사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단순한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공식적으로 행정당국에 알려졌다. 최고의희는 사도들보다 먼저 부활을 믿었다. 최고의회는 유다의 키스를 샀듯이 이제는 경비원들의 침묵을 사고자 한다.

비탄에 잠긴 마음과 부서진 빵

바로 같은 부활 주일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들은 열렬한 희망으로 불타고 있었지만, 어두운 성 금요일과 무덤에 장사지낸 일로 그들은 기쁨을 잃어 버렸다. 바로 이 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라는 인간외에 어느 주제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지난 이틀 동안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슬픔과 걱정에 찬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라나 그들의 눈은 굳게 닫혀있어서 그분이 부활한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을 평범한 여행객으로 생각하였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그들의 눈을 멀 게 한 것은 그들의 불신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이 주님을 보기를 기대했었더라면 주님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당신께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현존을 허락해주셨고, 그들이 당신의 부활을 의심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 현존의 기쁨과 지식을 감추셨다. 이제 주님의 육신은 영광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주님을 알아 보는 것은 주님께서 기꺼이 당신을 보여 주실 때만 가능하며 또한 인간의 마음의 자세에 달려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주님을 몰랐지만 이 낯선 자와 주님에 대해 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낯선 분이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루가 24, 17)

물론 이 제자들이 슬퍼한 이유는 주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며, 예수께서 체포되시고 모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다 보았다. 사랑하는 자를 잃어 버렸을 때 여인들의 마음은 슬픔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마음으로 괴로워 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허탈한 상태에 빠진다. 그들의 슬픔은 산산이 부숴져 버린 성공의 꿈에 대한 슬픔이었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구세주께서는 이런 식으로 말씀을 시작하지 않으셨다. 즉 "나는 너희가 왜 슬퍼하는지 안다"고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끄집어 내는 것이었다. 슬픈 마음은 슬픔을 털어놓을 때 가장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들의 슬픔이 혀를 가지고 말을 하면 주님은 귀로 들으시고 슬픔을 덜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상처를 보여주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당신 치유의 기름을 쏟아 부어주실 것이다.
  
둘 중에 한 사람 글레오파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먼저 말을 했다. 그는 지난 며칠동안 발생한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 낯선 분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루가 24, 18)


부활하신 주님께서 물으셨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루가 24, 19)

주님께서는 사실에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신다. 그들은 올바른 결론을 내릴만큼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슬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치료약은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들을 제대로 관련지어 볼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안에 있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당신에 대한 지식을 심화 시키기 위해 질문을 던지신다. 그러자 글레오파만이 아니라 그의 동료도 주님께 일어난 일을 말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사제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 가 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 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과연 그 여자들의 말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루가 24, 19-24)

  
이들은  위대한 것들을 희망했으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실망시켰다고 그들은 말한다. 인간은 청사진을 그리며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시기를 바란다. 실망은 흔히 사소한 인간적인 소망에서 생긴다. 이제 원래의 계획은 완전히 폐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 계획이 너무 엄청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너무 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소한 욕망의 컵을 깨뜨린 손이 이제 훨씬 풍부한 잔을 제시한다. 그들은 구세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그분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세주를 바랐지만 이방인의 구세주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다시 부활하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를 들었을텐데, 참변과 그들의 스승에 대한 생각을 연관시킬 줄 몰랐다. 그들은 주님을 스승으로, 정치적 메시아로, 윤리 개혁가로, 국가의 구세주로, 로마로부터의 해방자로 믿을 수는 있었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믿을 수가 없었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만큼의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여인들이 말해준 증거를 고려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인들이 천사를 보았다는 말까지 믿지 않았다. 그것은 천사의 발현에 불과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삼일째가 되었는데도 주님은 보이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주님과 함께 걸으며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발현하신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돌아가신 당신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요, 또 다른 목적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만 이제는 영광스럽게 되어 어떤 육체적인 제약도 받지 않으심을 보여 주고자 하신 것 같다. 잠시 후에는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명해주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다.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명하셨던 막달레나의 경우처럼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한 상태를 강조하신다.
  
다른 모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이 제자들도 부활을 인정할 마음의 자세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의심과 극히 완고한 인간성의 거부자세에 대항해서 부활을 증거하여야 했다. 이들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이러한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진실 가능성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비참한 상태로 살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여인들의 증언과 자기들의 이야기를 사실로 입증한 자들의 확증을 믿으려하지 않으면서, 결국은 자기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못봤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들은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가 24, 25-26)


이들은  미련하고 마음이 무디다고 욕을 먹는다. 그들이 자리에 앉아 예언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한 말을 -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 갈 것이다 - 잘 묵상했더라면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잘 믿으면서 하느님은 잘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무딘 마음의 표시며, 생각으로는 쉽게 믿으면서 행동으로는 더디게 믿는 것은 나태한 마음의 표시이다. 이제 이 여행의 핵심을 이루는 말이 나온다. 이전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착한 목자며,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영광 속에서 당신의 수난 덕분에 인간은 죄의 상태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상태로 들어올려졌다는 윤리법을 선포하신다.
  
십자가는 영광의 조건이다. 부활하신 구세주께서는 당신께 일어난 모든 일은 이미 다 예언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한 도덕적 필연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볼 때에는 모욕이요, 걸림돌이요, 패배요, 필연적인 것에 대한 굴복으로 보이던 것이 실제로는 예언되고 계획되었으며 사전에 예고된 어두운 순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주님의 영광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께는 영광으로 나아가는 지정된 통로였다. 성서가 메시아에 대해서 한 말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십자가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루가 24, 27)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서 성취된 모든 상징과 의식과 예식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십자가처형 그리고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들을 설명해 주셨고, 다니엘서를 인용하시어 당신이 어떻게 지상을 채우시는 산이 되신지 설명해 주셨고, 창세기를 인용하시어 한 여인의 자손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 뱀을 으스러뜨렸는지 설명해 주셨고, 모세오경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이 어떻게 악한 인간을 치유해주기 위해 들어올려지는 구리뱀이 되시는지 그리고 주님의 옆구리가 어떻게 재생의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가 되었는지 설명해 주셨으며, 이사야 예언서에서는 당신이 어떻게 엠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는지, 미케아서에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탄생하시는지, 그리고 그밖에 여러 문헌들을 이용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하느님께서 인간 가운데 살고 계시는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셨다.
  
마침내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했다. 전에 한번 호수에 폭풍이 일었을 때 주님께서는 사도들의 배로 건너시려고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주님께서는 여행길을 계속하시려는 것처럼 보이셨다. 그러자 두 제자는 같이 머물다 가자고 주님께 부탁하였다. 낮에 하느님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하던 자들이 저녁 때 그 생각을 쉽게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몰라 보았지만, 좀 더 완전하게 계시해 주고 그들의 슬픔을 걷어주겠다고 약속해 주는 빛이 주님께 엿보였다. 주님께서는 같이 머물자는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셨지만 즉시 주인 행세를 하신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루가 24, 30-31)

빵을 드시고 쪼개시어 그들에게 나눠주신 것은 일상적인 의례적 행위가 아니었다. 이 행위는 최후만찬 때 주님께서 당신 몸인 빵을 쪼개시어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당신 죽음을 계속 기념하라고 하시던 때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쪼개진 성사적 빵을 받자마자 그들의 영혼의 눈이 떠졌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지선악수의 열매를 먹고 나서 그들의 눈이 열려 부끄러움을 알 게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이 제자들의 눈이 떠져 그리스도의 몸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장면은 최후만찬과 유사하다. 두 군데 다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빵을 쪼개어 그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점등이 서로 유사하다. 빵을 주실 때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훨씬 명백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빵을 쪼갬으로써 그들은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 때 주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반성해 보았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루가 24, 32)

주님께서 그들에게 끼치신 영향은 애정적이며 또한 지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불타게 되었기에 애정적이고, 주님의 오심을 예고한 수 많은 예언을 이해하게 해주었기에 지적인 것이었다. 종교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고 빼어난 것이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벌어진 사건은 가장 위대한 진리라하더라도 길에서 친구 나그네를 만나는 것과 같이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사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극히 평범한 인생살이 속에 당신 현존을 감추고 계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걸을 때 주님께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그 지식은 패배를 통해 얻게 된 영광에 대한 지식이었다. 당신의 공생활과 마찬가지로 영광된 삶에서도 십자가와 영광은 하나가 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도 기억하였으며 그러한 고통이야말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당연히 필요한 것이었음을 이해하였다.
  
제자들은 즉시 돌아서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우물가의 여인이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우물가에다 물항아리를 놓고 갔던 것처럼 이 제자들도 엠마오로 가던 목적을 잊어 버리고 성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열 한명의 사도들과 다른 제자와 추종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도중에 일어난 모든 일들과 빵을 쪼갤 때 주님을 알아본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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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62.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몸을 가지시다  4118
82   61. 승천  3560
81   60. 회개  3833
80   59.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발현  1887
79   58. 신적인 명령  1943
78   57. 권위의 조건인 사랑  1960
77   56. 손가락과 손과 못  2140
76   55. 닫혀 있는 문  1953
  54. 지상의 가장 심각한 상처 - 빈 무덤  2259
74   53. 그리스도의 밤친구들  2551
73   52. 주의 옆구리를 찌름  2086
72   51. 성전휘장이 갈라지다  3222
71   50. 십자가를 향한 칠언(七言)  2174
70   49. 십자가상의 칠언(七言)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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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46. 명단의 맨 하위  1969
66   45.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  2198
65   44. 베드로의 부인(否認)  2203
64   43. 종교재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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