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영성사

영성가

전례와 영성

준주성범

영적독서

오늘의 묵상

영성강좌

그리스도의 생애

영혼의 쉼터

♣ 현재위치 : 홈 > 가톨릭 영성 >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스도의 생애 코너 ( 그리스도의 생애는 관리자만 글을 올릴 수 있는 코너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9 96.8%
55. 닫혀 있는 문
조회수 | 1,952
작성일 | 07.06.11
예루살렘에 돌아 온 두 제자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사도들이 아직 믿지 않고 있음을 본다. 토마가 초저녁에는 사도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찍 떠난 것 같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먼저 마음의 눈으로 부활을 보았고 다음에는 육안으로 보았다. 그것에 비해 사도들은 먼저 육안으로 부활을 보고 나중에 마음의 눈으로 부활을 보게 될 것이다.
  
부활주일에 제자들이 모인 곳은 다락방이었다. 바로 72시간 전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12사도들에게 성체를 나눠주셨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회 대표들이 집안에 침입해 들어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허위죄목으로 체포해 가지나 않을까 두려워 문을 꼭 잠그고 빗장을 가로질러 놨다. 게다가 평판이 별로 안좋은 이 집에 종종 그런 예가 있었듯이 사람들이 불쑥 쳐들어오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갑자기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이렇게 인사하셨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24, 36)

주님께서는 무덤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여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하셨지만, 십자가의 피로 부활을 가져오셨기 때문에 이제 주님은 직접 평화를 주러 오셨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다.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의 불의를 보상해야만이 참된 평화를 주장할 수 있다. 평화란 질서의 평온이지 평온 자체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강도도 약탈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태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는 육체가 영혼에 종속하고, 감각이 이성에 종속하며 피조물이 창조주께 종속하는 질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사야는 악인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하느님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멜기세덱이요, 평화의 왕으로서 그들 가운데 서 계신다. 부활하신 후 세 번 그리스도께서는 장엄한 평화의 축복을 주셨다. 첫 번째는 사도들이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을 때였고, 두 번째는 당신 부활을 입증해 주신 후였고, 세 번째는 일주일 후 토마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사도들은 처음에는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여인들의 말과, 엠마오의 제자들의 증언과, 빈 무덤과, 천사의 환시와,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베드로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고 있었다. 주님의 현존은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순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루가 24, 38)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당신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창으로 뚫린 당신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루가 24, 39)

믿으려 들지 않던 사도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져 보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중에 토마가 그러한 표시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는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최후만찬 저녁 때 주의 가슴에 몸을 기댔던 요한은 특히 옆구리, 즉 가슴의 상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결코 그 감동스러운 장면을 잊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요한 Ⅰ서 1, 1)

요한은  또한 이 사건을 기억하며 묵시록을 쓸 때 하늘의 옥좌에 앉으시어 흠숭을 받으시는 주님의 성스러운 인간성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일곱 영신이십니다. (요한묵시록 5, 6)

이렇게 해서 주님은 지금 영광 중에 계시는 왕이요, 주님이시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으로 인식이 되실 것이다. 추악한 상처는 인간의 잔인성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통해 구원을 성취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상처 자국을 없애 버린다면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사가 있었음과 주님께서 사제이시며 희생제물이셨음을 잊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시는 몸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바로 그 몸이며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아리마테아의 요셉에 의해 무덤에 묻힌 바로 그 몸임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이 몸은 이제 전에 취했던 그런 몸이 아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주님의 옷이 눈보다 더 희어지던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았었고 나머지 제자들은 주님을 고통의 사나이로밖에 몰랐다.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을 뵙는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와 이 모든 것들은 죄와 악을 거슬러 싸운 뚜렷한 투쟁의 상처들이었다. 병사들이 전투에서 얻은 부상을 부끄러운 상처로 생각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기념으로 생각하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상처를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니고 계신다. 승천하신 후에 이 상처는 천상 아버지 앞에서 웅변적인 탄원을 올리는 입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상처를 지니고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옛 전설에 의하면 사탄이 성인에게 나타나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자 성인이 "못자국이 어디 있소?" 라고 묻는 바람에 사탄이 낭패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그려보라고 맡겨두면 지상에 계실 때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잔재와 표시를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는 결코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수난의 상처를 갖지 않고 부활하셨더라면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주님을 의심하였을지도 모른다. 희생적인 목적을 가지고 주님께서 오신 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기 위해 주님께서는 최후만찬 저녁에 당신 죽음의 기념물을 남겨 주시어 이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기억되도록 부탁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똑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당신 몸에 구원의 기념물을 지니고 계신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걸 믿고 있었을까?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루가 24, 41)

그래서 그들은 고기와 꿀을 주님 앞에 갖다드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먹이시며 그들에게도 같이 먹도록 권하셨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그들은 부활을 믿게 되었으며 그러한 믿음을 통해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이 너무 커서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도 겁이 나서 믿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너무도 기뻐서 믿을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감각을 완전히 만족시켜 주실 때까지 쉬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이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일 것이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음식을 주라고 명하셨고 나자로는 부활한 후에 주님과 함께 음식을 들었으며, 이제 주님께서 몸소 부활하신 후 당신 사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당신 몸이 전에 그들이 보고 만지고 느꼈던 것과 똑같은 살아 있는 몸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그러나 이 몸은 동시에 영광스럽게 된 몸이기도 하다. 이 몸은 나약함의 상징인 상처는 전혀 없고 승리의 영광스러운 상처로서의 부상밖에 없다.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식사하신 것은 식물이 필요에 의해서 땅에서 수분을 흡수하는 것과 다르며 태양이 그 열로 저절로 수분을 흡수하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당신 죽음에 대해 당신과 얘기를 나누시던 거룩한 변모 때 영광스럽게 된 당신 몸의 본질을 다소나마 예시해 주셨다. 바로 그것은 부패가 부패하지 않은 것을 입고, 죽을 운명이 불멸을 입게 되고, 죽음이 생명 안에 삼켜질 것이라는 약속이요, 서약이었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제자들 앞에서 식사를 하심으로써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신 후 두 번째 평화의 인사를 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0, 21)

첫 번째 평화의 인사는 그들이 겁이 났을 때 하신 것이고, 이제는 그들이 믿음의 기쁨으로 충만해있기 때문에 두 번째 평화의 인사는 세상과는 관계가 있다.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은 당신이 공생활을 보내시던 세상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하신 전세계다.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주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요한 17, 18)

같은 생각을 계속 유지하며 주님은 세상에서 당신 대표자들이 될 사람만이 아니라 역사를 통털어 당신을 믿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요한 17, 20)

이처럼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 저녁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 세상에 대한 당신의 전교활동에 대한 - 당신을 배척한 세상 안으로 전교활동을 펴나가는 것 - 관심을 표명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지금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열 두 초석이 될 당신 사도들에게 가슴위에 걸친 옷에 돌을 달았지만, 이제 참 대사제는 당신의 가슴에 살아있는 돌을 새겨두셨다. 주님의 전교활동과 사도들의 전교활동은 하나다. 그리스도께서는 파견되시어 당신 고통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이제 주님은 당신 십자가의 몫과 그리고 당신 영광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셨다.
  
주님께서는 "나의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고 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래 "보낸다" 도 사용한 두 개의 그리스 단어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어는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심과 성령의 파견을 묘사하고 있고, 두 번째 단어는 오히려 위임의 뜻을 담고 있으며, 대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권한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화를 통해서 아버지의 영원한 품에서 나오셨듯이,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나가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 와 "너희 아버지"를 엄밀히 구별하셨듯이, 이제는 각각 파견의 차이를 강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한 본성을 지니셨기에 아버지를 현양하러 파견되셨으며, 하늘 나라의 초석이 될 사도들은 아들을 현양하기 위해 파견된다.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동안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몸에 새겨 있는 영광스러운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주님의 상처를 마음에 새기며 사도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고통을 받도록 파견하신 것처럼, 아드님께서는 박해를 받도록 자기들을 보내신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주님의 마음 속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있었듯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 사도적 파견의 배경이 되는 권위는 압도적이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파견하고 아들이 사도들을 파견하는 유추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사도들 가운데 하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신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당연하다. 토마가 그 자리에 없긴 했지만 이러한 은사를 나눠 받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바오로도 그러한 은사를 받았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어 약간의 성령의 능력을 주셨다. 사랑이 깊을 때는 말이 필요없고 언어가 필요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깊어서 한숨과 입김이라는 인간적인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제 사도들이 구원의 알파벳을 더듬거릴 정도로 배웠기에 앞으로 이루어질 일의 표시요, 보증으로 주님은 그들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것은 많은 비를 몰고 올 구름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은 성령의 힘을 말해주는 입김이요, 오순절의 강풍을 예언해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아담에게 자연적인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어 주셨듯이, 주님께서 아담에게 자연적인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어 주셨듯이, 이제는 당신 교회의 초석인 사도들에게 영적인 생활의 입김을 불어 넣어 주신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 주신 영혼에 의해 하느님의 모상이 되었듯이, 성령의 능력을 그들 안에 불어넣어 주셨을 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모상이 되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주신 것을 나타내는 그리스 단어는 신약성서 이외에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반역자들이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살아있는 영혼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이처럼 구원의 첫 열매로서 새로운 창조가 이뤄진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을 때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다. 성령께서는 세 번 외적인 상징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하느님의 친자성을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고, 세상을 회개시키는 성령의 능력의 표시로써 오순절에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추고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입김으로 나타나셨다. 주님께서는 진흙을 개시어 장님의 눈에 발라주심으로 당신이 인간의 창조주이심을 보여 주셨듯이, 이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심으로써 당신이 타락한 진흙 인간의 생명을 되살려주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주님께서 초막 명절에 연못에서 물을 길러오는 것을 보시고, 자기를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 가슴에서 생명의 물의 샘이 흘러나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성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 7, 39)

초막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먼저 죽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제 이 말씀은 당신이 이미 영광 중에 계시다는 뜻이다. 이제 주님께서는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 당신 부활의 생명에 사도들을 참여시키시며, 오순절에는 당신 승천에 사도들을 참여시키실 것이다.
  
다음으로 주님은 그들에게 죄를 사하는 능력을 주신다. 심지어는 사도들이 사하는 죄와 사하지 않는 죄가 구별되고 있다. 이 두 죄를 구분하는 방법은 분명히 사도들의 말에 달려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 23)

유대 사제들이 나병환자들 중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를 가려 선언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죄를 용서하고 용서를 보류하는 능력을 부여하신다. 하느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지만, 사람의 모습을 한 하느님께서 막달레나의 죄와 회개하는 도둑의 죄, 부패한 세금 징수원의 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셨다. 이제 동일한 육화의 법칙이 계속 효력을 발휘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계속 죄를 사하실 것이다. 주님의 인성이 용서를 살 때 당신 신성의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임명하신 성직자들이 주님의 용서의 도구가 될 것이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이 엄숙한 말씀은 죄란 영혼의 상태를 살펴보고 사례의 필요에 따라 용서를 베풀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사법권을 통해 용서를 베풀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사법권을 통해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날부터 인간적인 죄와 허물을 사해주는 것은 죄사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자에게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할 때이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께서 죄 사하는 권한을 주신 자에게 고백하는 것 (침상에 엎드려 죄를 털어 놓는 것을 듣는 것과는  달리)은 죄의 짐에 억눌린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였다.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3   62.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몸을 가지시다  4117
82   61. 승천  3559
81   60. 회개  3833
80   59.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발현  1887
79   58. 신적인 명령  1942
78   57. 권위의 조건인 사랑  1960
77   56. 손가락과 손과 못  2139
  55. 닫혀 있는 문  1952
75   54. 지상의 가장 심각한 상처 - 빈 무덤  2258
74   53. 그리스도의 밤친구들  2534
73   52. 주의 옆구리를 찌름  2085
72   51. 성전휘장이 갈라지다  3219
71   50. 십자가를 향한 칠언(七言)  2173
70   49. 십자가상의 칠언(七言)  2513
69   48. 십자가 처형  2294
68   47. 빌라도 앞에서의 두 번째 재판  2213
67   46. 명단의 맨 하위  1968
66   45.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  2197
65   44. 베드로의 부인(否認)  2203
64   43. 종교재판  2014
1 [2][3][4][5]
 

 

그리스도의 생애 코너 ( 그리스도의 생애는 관리자만 글을 올릴 수 있는 코너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